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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46) 예수 당시에 이미 부활 사상이 있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으로 갔다. 골고타 언덕은 이적의 현장이다. 예수는 이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위 동굴에 묻혔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한다. 그리스도 교인에게는 그야말로 성지 중의 성지다.
중세 때 일어난 십자군 전쟁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십자가와 부활의 성지를 이교도(이슬람)의 손에 맡겨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골고타는 그리스도교 성지의 심장이다.
예수 당시 골고타 언덕은 공개 처형장이 있는 공동묘지였다. '골고타'는 히브리어로 해골이란 뜻이다. 백성호 기자
예수 당시에는 달랐다. ‘골고타’는 히브리어다. 라틴어로는 ‘칼바리(Calvary, 갈보리)’, ‘해골’이라는 뜻이다. 골고타 언덕은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이 가장 기피하는 장소였다. 공개 처형장과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죄목으로 사형을 당한 죄수들이 묻히는 곳도 골고타였다. 그런 곳에서 예수는 최후를 맞았다. 처형장이나 화장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꺼리는 공간이다.
인도에서도 그랬다. 샤카무니 붓다는 출가 전에 인도 카필라 왕국의 왕자였다. 어릴 적에 그는 서쪽 성문 밖으로 나갔다가 사람의 시신을 처음으로 봤다. 왜 성의 서쪽이었을까. 그곳에 강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인도의 화장터는 대부분 강가에 있다. 화장한 유골을 강에 뿌리는 힌두교의 풍습 때문이다. 붓다가 마주친 시신도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도 카필라 왕국의 유적지인 서문 밖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 화장터가 있다. 망자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는 일은 모두 불가촉천민의 몫이다. 그래서 화장터 주변에는 지금도 불가촉천민의 마을이 있다. 죽음의 공간은 동양에서도 꺼리는 장소였다.
예수가 묻힌 곳도 마찬가지였다. 모순적이게도 그런 공간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지’로 탈바꿈했다. 사도 베드로가 묻힌 곳도 그렇다. 그는 로마의 처형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스도교의 성지는 주로 고난과 순교의 현장 위에 있다. 골고타 언덕에 세워진 성묘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처형장 위에 세워진 교회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전경. 백성호 기자
그 무덤 위에 로마 교황청이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졌다. 누구나 꺼리는 장소, 부정 타는 공간. 그런 장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성지가 됐다. 여기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코드가 녹아 있다.
그렇다면 예수 당시에는 어땠을까.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유대인들,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죽음 이후를 어떻게 봤을까. 부활이 있다고 믿었을까. 육신의 부활. 부활은 얼토당토않다고 여겼을까, 아니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을까. 그도 아니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예수 당대의 인물이다. 그가 저술한 역사서에 ‘유대인과 부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을 보면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육신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부활’ 이전에 말이다.
요세푸스가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강연한 『음부론(陰府論)』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하느님은 정하신 때가 되면 만인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킬 것이다. 한 영혼을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전생(轉生)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은 그 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그가 남긴 유대 역사서 『유대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는 귀중한 사료다. 성경을 제외하면 예수 당대를 기록한 역사서는 거의 없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때가 되면 하느님이 죽은 그 몸을 다시 부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요세푸스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대 사회에서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게다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다. 젊은 날 사두가이파였다가 바리사이파로 돌아섰다. 그런 그가 ‘부활’을 거론했다. 심지어 부활을 믿지 않는 그리스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의 부활은 늘 논쟁거리다. 누구는 육신의 부활을 믿고, 누구는 영혼의 부활을 믿는다. 백성호 기자
“여러분 헬라인(그리스인)들은 몸이 썩는 것을 보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지만 부활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여러분도 플라톤의 사상대로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지 않는가? 그러니 이제 의심을 버리고 부활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에게는 죽기 전의 몸과 동일한 원소로 이루어진 몸에 생명을 불어넣어 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은 다시 읽어 봐도 놀랍다. 예수 당대에 이미 ‘부활 사상’이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사흘 만에 부활하기 전에, 예수의 부활과 상관없이 이미 유대인들은 ‘부활 사상’을 믿고 있었다.
짧은 생각
부활절을 앞두고
고(故) 정진석 추기경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혼의 부활인가.
어찌 보면
날 선 질문입니다.
왜냐고요?
그리스도교 안에도
구교와 신교가 있고,
그 안에서도
신교는 여러 교단으로
나뉩니다.
교단에 따라,
사제에 따라,
목사에 따라.
신자에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는
시각은 차이가 납니다.
가장 먼저
육신의 부활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있던
그 몸, 그 마음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100%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런 시각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예수의 부활은
좀 다릅니다.
사람의 몸은
물질이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쓰러지기 마련이다.
무덤에 묻힌
육신은 썩고,
육신을 이루는 물질적 요소는
흩어져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게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마련하신 섭리다.
다시 말해
신의 섭리다.
대신
영혼은 영원히 남는다.
골고타 언덕의 동굴 무덤에서
되살아난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이다.
이렇게 반박합니다.
정 추기경의 답변은
어땠을까요.
정 추기경도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민감한 대목이라
적당히 피해갈 수도 있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 추기경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육신이 아닌
영혼의 부활이라고
말입니다.
신문 지면에 실린
기사의 제목도
그렇게 달렸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정 추기경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기사 때문에
내가 좀 고생했어~.”
그런 뒤에
해맑게 웃으시더군요.
왜
고생했느냐고요?
가톨릭 안에도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라고 믿는
사제들이 있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정 추기경의 인터뷰에
강하게 반발한 겁니다.
그래도
정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말한 대목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웃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알겠더군요.
만약 다시
인터뷰한다 해도
정 추기경의 답변은
똑같겠구나.
그게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부활, 하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기대합니다.
다시 말해
영생을 희망합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기를
고대합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던 이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부활은
그런 욕망과
차원이 좀 다릅니다.
왜냐고요?
동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앞면과 뒷면.
부활도
그렇습니다.
동전의 양면에서
부활은 한쪽 면입니다.
그럼
다른 한쪽이 뭘까요?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통과하는
죽음입니다.
예수에게는
그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이 있고,
우리에게는
나의 십자가와
나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
알 수가 있을까요.
십자가 죽음 후에
만나는 부활이
육신의 부활인지
영혼의 부활인지
말입니다.
논쟁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부활인가,
영혼의 부활인가.
동전을 취하려면
한 면만 취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 면을
모두 취할 때
비로소
내가 동전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소
나의 십자가를
통과할 때
우리는
저절로 알게 되겠지요.
십자가 죽음 후의
부활이
어떠한 부활인지
말입니다.
그때는
육신의 부활이냐,
영혼의 부활이냐는
열띤 논쟁이
그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요.
에디터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