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에는 두 개의 고덕산이 있다.
임실 고덕산(高德山)과 전주 고덕산이다.
덕이 높다는 고덕산 말고 고대산(孤大山), 또는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불렀다.
고달(高達)이란 최고에 도달한다는 뜻.
육산인 듯하면서도 사면이 깎아지른 암벽인 정상은 평평한 헬기장으로 사방이 딱 트여 조망이 아주 좋다.
전주와 익산시가지, 기린봉과 치명자산이 다가오고, 북쪽으로 연석산과 운장산, 숫마이봉, 부귀산이 보인다.
동쪽으로 만덕산과 그 뒤로 덕유산과 지리산 연봉들이 하늘금을 그리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남으로는 구이 저수지와 경각산, 서쪽으로 모악산이 조망된다.
날머리에서 만나는 남고산성(南固山城)은 백제의 얼을 계승하려던 견훤이 후백제를 창업하고 전주부성의 수호를 위해 쌓은 산성이다.
만경대에는 정몽주우국시와 관찰사 이서구의 암각서가 있다.
신라 대찰 남고사와 삼경사, 관성묘 등 문화유적을 품고 있는 대덕산은 천년고도 전주의 수호신으로 불리고 있다.
남고산성을 내려와 찾아볼 풍남문(豊南門)은 보물로 지정된 전주부성(全州府城)의 4대문 가운데 하나다.
고색창연한 전주한옥마을과 한벽당, 전동성당과 치명자산 성지, 그리고 전주 경기전의 태종태실과 전주사고가 한꺼번에 있어 둘러보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나는 단체산행의 일정상 답사하지 못해 훗날 개인적으로 둘러볼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도 나의 버킷리스트는 차곡차곡 쌓여져만 간다.
GPX트랙
거리 및 소요시간
고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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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으로 눈에 익은 마이산을 당겨 잡아 본다.
그랬더니 우리 버스는 내킨 김에 마이산휴게소로 들어가서 마이산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쫑긋한 두 개의 말귀가 하얀 눈을 흠뻑 덮어쓰고 있다.
순천완주고속도로의 '상관IC'에서 내려 749번 도로의 어두마을에서 차를 멈춘다.
온 천지가 하얗게 눈을 덮어쓰고 있는 도로에 내고향 '어두마을'표석과 '고덕산등산로 2km'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서 만난 동네사람이 "산길이 없을 텐데"하며 걱정을 보탠다.
21번국도 아래를 굴다리로 통과하여...
눈 덮힌 마을 안으로 곧장 들어가면서 우측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가늠해 본다.
마을에도 온통 눈세상.
새빨간 예쁜 우체통에 눈길도 주며 우측 능선 잘록이가 올라설 안부이려니...
길은 온통 백색천지에 묻혀버려 찾을 길 없지만 우측 산자락으로 길냄새를 맡으러 애를 쓴다.
작은 개울 앞에서 우측 계곡쪽으로 길을 찾아 보았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물러서서 고덕산 계곡길을 조금 따라가다...
이 지점에서 우측 능선으로 오르기로 하였다. (직진은 고덕산으로 오르는 계곡길, 우측 길인 듯 아닌 듯한 곳은 묘지로 가는 능선길)
그냥 치고 오르기로 하였다.
십자석 잘 단장된...
가족묘지인 듯한 길로...
뚫고 오르다 두꺼운 옷은 이제 벗어제끼고...
15분여 만에 능선에 올랐다. 안부에서 조금 위 좌측 능선으로 붙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능선길이 오늘같은 날엔 더 편하게 오른 셈.
주능선 좌측으로 도드라진 봉우리가 보인다. 고덕산은 저 봉우리 뒤에 있을 터.
눈을 이고있는 잡목사이로 백색천국을 내려다 본다.
러셀이 전혀 안되었어도 산길은 그리 험하지 않고,날씨 또한 그리 춥지 않으니 만사가 오케이다.
토끼비리를 닮은 벼랑길을 비켜 돌기도하며...
능선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자꾸 쳐다보며...
걸어온 길도 돌아본다.
왼쪽 어깨에 내내 걸머지고 온 정상의 모습이 자세히 드러난다.
뒤로 조망이 트이며 도드라진 봉우리가 호남정맥의 경각산(鯨角山)인 듯....
산길은 계속 능선으로 이어지고...
잡목 사이로 좌측 봉우리가 몇 개 더 보인다. 어느 봉우리가 고덕산인가?
첫 이정표를 만난다.
상관면 신리 갈림길과...
영동고덕아파트 갈림길이다.
설송(雪松) 우측 두루뭉실봉이 고덕산일 듯.
천지가 온통 하얗다.
고덕산장 갈림길에서 정상은 600여미터 남짓
고도를 높혀가며...
눈에 파묻힌 계단을 밟아 오르다...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니 경각산이...
당겨본 모습.
눈길 체력소모는 배가되어 자주 쉼할 수밖에...
남고산성 갈림길 이정표에서...
고덕산 정상은 지척이다.
정상의 이정표엔 호남정맥으로 가는 왜목재가 2.7km이고, 경각산이 8.8km
정상의 고덕산 안내판.
정상의 안내판
정상의 또다른 완주군 이정표가 눈속에 파묻혀 있다.
정상의 또다른 이정목에는 왜목재와 경각산,화원마을,상관면 신리,한일 장신대학교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단체 사진을 찍고 눈밭에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마침 날씨가 포근하여 장갑을 벗어도 손이 시리지 않는다.
남고산성으로 내려서는 길은 정상에서 U턴을 하여 잘 놓인 데크계단을 내려서야만 한다.
사진은 데크계단 입구에서의 조망으로 뚜렷한 능선길이 남고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고, 산자락 아래에 전주시가 있다.
이정표 # 1
이정표 # 2
돌아본 고덕산 정상
살짝 당겨보니 가파른 능선을 지그재그로 내려서는 데크계단이 보인다.
무명 봉우리는...
학산 이정표를 따라...
능선 송림숲을 이어가다...
우측 사면으로 비스듬히 감아 돈다.
뒤이어 만난 이정표엔...
두 날개 평행의 이정표에 보광재와...
평행한 안쪽 날개에 북장대(남고사) 표식이 있다.
다시 만난 이정목에선...
천경대 방향.
메뚜기를 닮은 바위를 지나...
도란도란 시나브로길 안내판이 상세하다.
보수공사 중인 성곽을 올라선다.
그리곤 성곽을 따라 걷다...
돌아본 고덕산이...
그리고 중간에 눈길에 지친 일행들이 탈출을 감행한다.
성곽을 따라 걷다...
자꾸만 돌아본 고덕산.
성곽 옆에 남고산성 '잔존여장보존구간'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뭔 말이고?
'잔존여장보존구간(殘存女牆保存區間)'이라 함은 남아 있는 성곽을 보존하라는 말.
* 여장(女牆)':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
남고산 표지판이 붙어 있다. 남고산은 고덕산의 기를 받은 위성산인 듯.
남고산성 안내판
남고산성은 고덕산성으로 불리기도 하고,견훤산성으로도 불린다.
산성방어의 지휘소로 남장대와 북장대를 두었고,남고사의 승려들이 승병으로 활동했다고... 관성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장수 관우의 사당이다.
성곽을 한바퀴 빙돌아....
억경대를 오른다.
억경대에서의 조망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조망은 그리 흔치 않을 터...
조감도가 펼쳐져 있다.
억경대의 안내판. 남고산성을 살펴보는 데도 공부를 한 후 성곽을 돌며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듯.
남고산성 안내판
억경대에서 만경대를 찾아가는 데 헷갈린다. 그래서 아예 성곽을 따라 서문을 내려서가로 하였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눈이 많이 쌓여 다소 위험한 편.
보수공사를 하면서 성곽을 단단히 쌓은 덕택으로 별 어려움 없이...
가파르게 돌계단을 내려서듯 서문을 내려선다.
돌아본 성곽.
비각을 만난다.
위로는 남고사.
비각 안으로 눈길을 주어 살핀다.
남고산성 서문지에 있는 남고진사적비엔 남고산성의 수축과 남고진 설치의 전말을 기록한 비석으로 헌종12년(1846)에 세워진 것이다.
최영일(崔英一) 찬, 이삼만(李三晩) 서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132 cm, 폭 54cm, 두께 26cm의 오석제인데, 옥개석을 얹고, 화강석 기단석은 폭 111cm, 두께 72cm이다.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
임진왜란 때 이정란이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여 전주부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만들어준 험준함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영조 10년(1734) 갑인년 관찰사 조현명이 완산부성을 증축하고 나서 이곳에 성을 다시 쌓을 것을 꾀하였다가 임기가 차 그 뚯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순조 11년(1811) 에 이르러 관찰사 이상황이 부성내의 장보와 삼영 장군과 부성의 유지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가 이 또한
도중에 전임하게 되자 그 후임으로 관찰사 박윤수에 의하여 비로소 남고진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전주역사박물관>
서문
서문을 나서 바로 좌측 산자락으로 길을 잡고 만경대를 찾아갔지만...
찾지 못하고 빙빙돌다 길로 나오고 말았다.
이정표엔 우측으로 불과 200m지점에 만경대가 있다고 하여서 재시도를 하였지만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준비부족인 줄 알았는데, 훗날 확인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이정표가 잘못 되었다.
만경대는 서문에서 남고사 방향 20m전방에서 우측으로 이정표가 있고, 50m만 오르면 닿는다. <☞ http://cafe.daum.net/phanmaum/FXy6/580>
남고산에는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세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만경대는 산성의 서문을 향하여 우편으로 높게 솟아 있는 바위위 봉우리로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이곳의 남쪽 바위 벼랑에는 포은 정몽주가 지었다고 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千刃崗頭石徑橫 /登臨使我不勝情
靑山隱約扶餘國 /黃葉賓紛百濟城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천길 바위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서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
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포은 정몽주가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운봉에서 황산대첩을 거두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이 올라 고려를 걱정하며 지은 우국시(憂國詩)다.
이성계가 오목대 잔치에서 한고조 유방이 불렀던 「대풍가」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마치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비웃는 듯, 또 자기의 웅대한 포부를
말하는 듯하였다고 한다.
이를 듣고 있던 포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천을 건너 고덕산성 만경대에 올라 멀리 북쪽하늘을 쳐다보면서 고려 왕조를 걱정하는 우국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포은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 산천조에도 실려 있다.
한편 만경대의 봉우리 위에는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만인송이라는 낙낙장송 한그루가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베어지고 그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전주역사박물관>
하산길은 도로를 따라 샘터교회로 나왔다.
아직 산행 종료시간이 남아 풍남문과 한옥마을 그리고 전동성당만이라도 찾아보려고 나서다...
도로변에 충경사를 만나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
충경사는 조선 선조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전주성을 지키고 국난 극복에 이바지한 공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정란(李廷鸞)을 모신 사당이이다.
현판에 남고재(南固齋)
이정난 선생 사당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봄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있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4세의 노령이었다.
임란이 일어난 직후 조선은 일방적인 패배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적의 육군이 호남을 향하여 공격하여 왔고, 6월 23일 마침내 금산성이 적에게 함락되는 등 전라도도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 때 이정란은 장정 7백여명을 모집하여 정협(鄭車夾)․윤개(尹槩) 등을 종사로 삼아 낮에는 기치를,밤에는 횃불을 나열하여 부중의 경계태세가 엄중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두 종사로 하여금 남고산의 억경대의 위아래에 매복하게 하여 왜적 4명을 생포하는 등 왜적이 전주 부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선조 33년(1600)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전주 한계서원에 제향되었고, 순조 7년(1807)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안내판
충경사를 나와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차로 귀환하였다. GPX는 여기까지다.
우리 버스는 더 위쪽에 주차하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의 일정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
그래서 고덕산 산행은 여기까지다.
견훤성의 경물이 나를 오르라 권하기에
옛것을 어루만지며 길게 한바탕 웃었네.
사대부를 탐방하려니 지난 날이 슬프고
부질없이 도참설로 남긴 터를 얘기하네.
국화꽃에 흰 서리 내린 후에야 술맛이 무르녹고
청산에 해 질 무렵에사 발을 걷는다.
고금의 영웅들 지나가는 새와 같아서
반드시 지친 뒤에사 돌아올 줄 아는 건 아니네.
<이색의 고덕산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