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과 뒤셀도르프, 본 그리고 퀼른
클래식 작곡가 중 가장 격정적인 사랑을 한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이다. 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에 다니던 18살 때 처음 클라라를 만났다. 당시 클라라는 9살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싹 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슈만은 클라라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법학도였던 그의 꿈도 원래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어려서 부터 피아노 교수였던 아버지 비크에게 피아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슈만은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슈만은 끈질기게 어머니를 설득한다. 2년 후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슈만은 비크 교수의 지도 아래 피아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지나치게 혹사하던 그는 그만 손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까지 놓이게 된 것이다. 고뇌하던 슈만은 피아니스트 대신 평론가 겸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전 그는 음악평론가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같은 동년배인 쇼팽은 물론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브람스 등 동시대의 작곡가들을 음악신보를 통해 널리 알린 것이다. 슈만은 25살 되던 해 클라라와 첫키스를 하고 청혼했다. 하지만 비크 교수는 강렬하게 반대한다. 당시 훌륭한 연주자인 딸을 미래가 불투명한 가난한 청년에게 내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클라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연주회에서 독단적으로 슈만의 곡을 넣어 연주했다. 무언의 반항이었던 것이다. 1839년 29세의 슈만과 성년이 된 클라라는 비크의 부당한 처사를 법정에 호소한다. 클라라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크의 결혼 방해가 점점 더 커갔기 때문이다. 운명적인 사랑은 국가나 부모도 갈라 놓을 수 없다. 결국 두 사람은 다음해 법정으로 부터 결혼 허가를 받았다.
뒤셀도르프는 여러 개의 수로와 연못, 그리고 라인강으로 둘러싸인 물의 도시다.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과 로베르트 슈만 음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도 바로 뒤셀도르프. 하이네는 1797년 이곳에서 태어났고 슈만은 1850년 부터 4년 간 시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뒤셀도르프는 파리, 런던, 뉴욕과 함께 세계 패션 산업의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다. 1949년 부터 시작한 퀴니히 거리의 야외 패션쇼도 유명하다. 퀴니히 거리는 가로수가 아름다운 운치있는 길이다. 뒤셀도르프에서는 최고의 중심 거리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프라다, 불가리, 샤넬, 페라가모, 루이 뷔통, 에스까다 등 약 50개의 브랜드점이 성업중이다. 구시가 광장에는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마상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요한 빌헬름 2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빌헬름 2세는 1690년 부터1716년 사이 뒤셀도르프를 통치했던 선제후다. 그는 도시 발전과 미술관 설립 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아내는 메디치가의 딸인 안나 마리아였다. 구시가의 성 광장에는 해골, 기사, 방패, 술통, 동물 등으로 꾸며진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이것은 1288년에 있었던 부링겐 전투 장면들을 묘사한 것이다.
볼커 거리는 독일에서 가장 긴 카운터라는 별명을 가진 식당과 선술집이 모여 있다. 이 거리에 위치해 있는 생맥주집들은 거의 모두 200년 이상 된 유서깊은 술집들이다. 한 맥주집에 들렸더니 라이브 밴드 연주에 손님들 모두 들뜨고 흥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라이벌 도시인 퀼른에 대해서는 절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응원하는 축구팀과 마시는 맥주까지 두 도시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프로풋볼리그의 워싱톤 레드스킨스와 달라스 카우보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은 로베르트 슈만이 뒤셀도르프시의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만 해도 없었다. 슈만은 1850년 9월 뒤셀도르프로 이사한 후 10월에는 ‘첼로협주곡 a단조 Op. 129’를 완성했다. 그리고 11월초 퀼른시를 방문하여 웅장한 퀼른 대성당의 모습과 예배의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감동을 받았다. 대성당을 보고 받은 감동은 그의 교향곡에서 ‘장엄하게’라는 지시로 제3교향곡 4악장에 반영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슈만의 대표작이다. 특히 퀼른 대성당을 본 후 감상하는 3교향곡 4악장의 웅장함은 듣는이들의 가슴을 친다.
퀼른 대성당은 퀼른 중앙역을 나오면 바로 왼편에 위치해 있다. 시커먼 두 개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157m 나 뻗어 있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는 대성당 전체를 촬영할 수도 없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대성당은 1248년 착공하여 1880년에 완공됐다. 무려 632년의 긴세월 동안 건축한 것이다. 완공식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안으로 들어 가면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성 키아라의 제단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 국왕이 기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발하고 있다. 동방박사의 유골이 안치돼 있는 유골함도 많은 사람들이 멈추는 장소다. 대성당 내부에는 수많은 보물이 있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금지다. 대성당 광장은 퀼른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장소다. 대성당 바로 앞에는 작은 휴식처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뒤에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활기찬 광장에는 거리예술가들의 공연도 여기저기서 펼쳐진다. 황금 도포를 걸친 로마장군이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빨간 장미를 든 은빛 망또의 사나이도 있다. 옆을 보니4명의 젊은이들이 바이올린과 첼로 그리고 기타를 들고 흥에 겨워 연주를 한다. 대성당 옆으로는 큰 광장이 있다. 이곳은 스케이트 보드 타는 젊은이들의 장소다. 한 젊은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달리다 보드와 함께 공중으로 뜨더니 멋지게 안착하여 다시 달린다. 그 앞쪽으로는 로마 게르만 박물관이 있다. 쾰른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기원 2세기경에 만들어진 ‘디오니소스 모자이크’도 있다. 그 밖에 철학자 모자이크, 로마시대의 유적, 유리 세공 예술품 등이 있다. 퀼른은 로마 시대 때 부터 유리 세공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슈만은 사춘기 시절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16세 되던 해 여름, 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사망하고 누나 에밀리에도 강물에 투신자살하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슈만은 18세때 부터 조금씩 정신질환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혼 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정신병으로 고생하다가도 회복이 좀 되면 빠른 속도로 작품을 써내려 갔다. 1854년 부터 건강이 더욱 악화된 슈만은 2월 27일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차가운 라인강에 몸을 던진다. 다행히 어부들에 의해 구출되어 집으로 실려왔다. 하지만 그는 정신병원에 보내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베토벤의 고향 본(Bonn)에는 베토벤 생가와 그의 동상이 있는 뮌스터 광장이 있다. 베토벤의 동상을 세우는 데는 음악신보의 주필이었던 슈만의 힘이 컸다. 슈만이 1836년에 베토벤 동상을 세우자고 음악신보에 열광적인 기부금 모집을 알린 것이다. 만년에 슈만은 브람스와 함께 베토벤 동상을 찾아 대선배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나타냈다. 본에는 베토벤 생가와 베토벤 동상 외에도 슈만이 마지막 2년을 보낸 슈만의 집이 있다. 슈만의 집은 원래 슈만의 정신병을 치료한 정신과 의사 리챠즈 박사의 정신요양원 건물이었다. 후에 슈만과 클라라의 유물을 정리해 놓은 슈만의 집 즉 박물관이 된 것이다. 박물관에는 1층은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4만 6천권의 장서 그리고 많은 악보와 LP 레코드등을 소장하고 있다. 2층에는 작은 연주실이 있고 슈만과 클라라의 사진과 편지, 슈만이 발행하던 음악신보 등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의사의 지시로 슈만을 직접 볼 수 없었던 클라라는 가끔씩 창문을 통해 그를 바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랴야만 했다. 결국 슈만은 1856년 7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본에 있는 프라이도프 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클라라는 8명의 자식을 키우며 슈만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슈만이 세상을 떠난지 40년 후 클라라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같은 묘지에 묻혔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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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mann "Rhenish" Symphony, 4th mvmt
https://www.youtube.com/watch?v=r5DQVFW1s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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