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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무․세습무 유형론에 따른 무속연구 검토
-김태곤․최길성론을 중심으로-
1)양종승*
[요약]
본 글은 한국 무속의 연구사적 맥락 속에서 강신무․세습무 용어 대두 및 유형론 발단에 대한 것으로서, 김태곤과 최길성의 논지를 다룬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무속 개시에 대해 불가피하게 설명되고 있는 무당의 형식과 기능 그리고 지역적 특성에 따른 접근방식과 얽혀있는 논의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분석적 내용이 검토되어져야 한다.
김태곤에 따르면, 한국 무당은 원래부터 모두가 강신무였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류였던 강신무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지역적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일부가 세습무로 변화되었고, 그것이 남부지역에 몰려있는 세습무다. 최길성은 북쪽지역에 강신무가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남쪽지역에는 세습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두 연구자 주장에서의 강신무․세습무 상정은 강신성과 세습성이라는 이른바 무당이 갖는 아주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습성을 구체화하여 이를 기초로 현상학적으로 파악되어지는 지역적 특성에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용어 쓰임에는 한국무속의 개시에 관한 자연발생설 내지는 북방유입설과 북방유입설 및 남방문화 교차설에 대한 논의에 깊숙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묵인한 상황 속에서의 강신무․세습무 용어 쓰임과 개념 설명은 혼돈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Ⅰ. 강신무․세습무 용어 재검토의 필요성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무속에서의 강신무․세습무 용어는 단순히 무당 유형을 설명하는 데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 무속의 특성을 설명하는 기준으로 삼아지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한국 무속의 개시 및 원초적 양상을 논의하는 데까지 관련되어져 있다. 두 용어 출현 이후, 사용에 따른 적절성 또는 타당성은 학술적으로 검증된 바가 없으며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 설정도 되어 있지 않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한국 무속을 설명하는데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음이다. 두 용어의 지속적인 사용 내지는 분류에 대한 정당성 부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두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나 자료의 실체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또한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두 용어는 따지고 보면 한국에 관한 문헌적 무속자료가 척박한 상황 속에서 공시적 통시적 접근방식에 의한 역사적 흐름을 살피려는 연구자들의 필연적인 설명 용어로 쓰여지면서 돌출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용어는 작금의 연구자들 주의에 수식어처럼 따라 다니면서 문자화되고 활자화되어져 한국 무속의 전체적인 지역적 구분 내지는 무당의 기능 형태 의미 등을 구분하거나 개념화하는데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두 용어가 타 연구 영역에까지도 파급되어져, 예컨대 강신무 계통의 춤이라든지 세습무 계통의 음악이라든지 하는 식의 막연하고도 실체 없는 형식을 꾸며내는데 일조하고 있음이다. 따라서 강신무․세습무 구분은 한국 무속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데 오히려 적지 않은 방해 요인으로 간주됨으로서 이에 대한 논의는 시급하다.
그렇다 치더라도, 강신무․세습무 용어는 한국 무속연구사를 다루는 한 면에 의미 있게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두 용어가 여타의 학문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차치하더라도 근대 한국 무속연구에 있어서의 현장조사와 이를 학문적으로 발돋움 시키고자 하는 무속 연구자들의 애착에 힘입어 연구 성과의 한 측면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용어 사용의 불가피성은 이른바 한국 무속의 학문적 초석을 다듬게 한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앞으로 한국 무속 연구 전진에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 할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강신무․세습무 유형 및 용어 사용에 따른 문제의식의 표면화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몇해 전부터 무속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직간접으로 야기되어 왔으며, 이에 따른 부적절성이 점차적으로 부각되어져 온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이에 대한 의문점을 간략하게나마 이곳저곳의 지면을 통해 언급하여 왔다.
그러던 중 구체적인 연구 시도가 이용범에 의해 이루어 졌고, 따라서 학계를 통한 공론화가 시작된 것이다.1) 때를 같이하여, 이 사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해 한국무속학회 임원회에서 구체적인 조명 기회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이를 3차에 걸쳐 정기학술발표회 공동연구주제로 다루기로 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2003년 11월 22일 인하대 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한 한국무속학회 제11차 학술대회에서 세 명의 연구자가 발표하였고 그 결과물이 ꡔ한국무속학ꡕ 제7집에 실렸다.2) 학술대회에서 토론 및 총평이 심도 있게 이루어 졌으며, 당시 논의에 참여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강신무․세습무 구분에 대한 개념 그리고 내용 및 구조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내놓기도 하였다.3) 이 학술대회에서 표면화된 본 논제에 따른 인식과 해석은 각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두 개의 유형론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거의가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논제와 관련된 연구는 한국무속 연구사의 흐름과 함께 요구되는 시대적 이슈이기도 하다. 그러한 것은 1차 학술대회 토론회에서도 그렇듯이, 현재 한국무속학회 소속의 주요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논제가 갖는 문제점을 공통적으로 직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한국 무당 또는 무속을 설명하는 학술적 용어로서의 강신무․세습무 이원적 유형 또는 용어의 개념 논의는 사실상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구체적으로 이에 대한 규명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이 분야를 다루는 연구자들의 목소리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과거 시대, 즉 한국무속이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이전의 시대에는 무당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무속계에 몸담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헌적 구전적 자료가 전무하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무당의 성격 즉 강신성이라던지 세습성이라던지 하는 입장에서도 문헌적 자료든 구전적 자료든 아니면 이와 관련되는 여타의 자료든 궁핍하기 이룰 때 없다. 이것들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가장 오래된 자료는 무속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진 20세기 초중엽, 현장에서 채집된 자료가 전부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 무속에 대한 연구에는 주의에 복잡 다양하게 얽혀져 있는 잡다한 사건들까지도 포함해 살펴야하는 난이점이 있는가 하며, 또한 간략하거나 부정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내용들이라 할지라도 포용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실정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적 문헌자료 속에는 강신무․세습무에 대한 실체는 없다.
그동안의 한국 무속학은 기반을 다지기 위한 현장 자료 채집에 몰두하였고 이를 지역간 비교를 통한 특징 밝히기에 많은 힘을 쏟아 왔다. 전통문화의 복원과 관련하여 무속자료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학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힘 쏟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젊은 연구자들이 비교적 많아지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지역적 자료가 쌓이면서 분석에 대한 접근방식도 다양해져 그동안의 언급 내지는 논의에 대한 성찰을 갖게 하는 학문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학계의 흐름을 인식하면서, 본 글은 앞서 언급한 한국 무속의 연구사적 맥락 속에서 강신무 세습무 용어 대두 및 유형론 발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출현 과정과 맞물려 있는 무속연구사의 한 면을 논의하려 한다. 이것은 이 논제에 가장 많은 애착을 갖고 한국 무속학의 초석을 이루어낸 무속학자 김태곤과 최길성의 논지에 대한 것이다.
한편, 강신무․세습무 구분은 한국 무속 연구의 학문적 접근과 관련되어 우리나라 무속 개시에 대해 불가피하게 설명되는 무당의 형식과 기능 등이 지역적으로 얽혀있는 논의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분석적 내용이 검토돼야 할 것이다. 이는 두 연구자의 논리 전개 상황에 따라 그 흐름과 관련된 자료인용 및 추측 내용 등을 검토하는 것이니 만큼 그에 따른 초점이 구체화됨이 마땅하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무속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것이거나 또는 과거의 주장들이 터무니없다고 하는 비판적 또는 또 다른 대안에서의 대응적 논의가 아니며 이는 결코 한국 무속을 올바르게 인식 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Ⅱ. 강신무․세습무 분류형식에 따른 문제점
강신무․세습무 두 개의 용어는 각기 독립적으로 논의되는 것 보다는 함께 어울림에 의해 비교된다. 이를테면, 어떠한 특정 요소 여부에 따라 각자의 현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이중 구도적 틀을 상정하여 놓고 마치 상대성 원칙을 갖는 것처럼 설명되어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쪽이 이러하면 다른 한쪽은 저러하여야 하는 공존하되 서로 이질적 존재로 논의되어야 각각의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가 비교되었을 때에 각 요소에서 이질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란 대체적으로 신앙적 측면에서 신내림 경험, 신당 소유, 공수, 단골제도 등의 존재여부와 그리고 의례적 측면에서 춤, 음악, 복식 등의 차이점 등이다. 즉 신앙적 측면에서 볼 때, 신병 경험을 통해 신내림 하였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고 집안 대물림에 의한 것인지, 무당으로 활동하는 동안 신당을 소유하는가의 여부, 무속의례를 거행하면서 신령에 의한 영적인 공수를 내리는가의 여부 그리고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단골 제도의 여부 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또 한편으로 춤에 있어서는 마구잡이로 뛰는 광적인 춤과 예술적으로 다듬어진 세련된 춤, 음악에 있어서는 타악기 구성의 빠르고 단순한 광적인 음악과 삼현육각으로 구성된 예술적인 미적 감각을 갖춘 고차원의 음악, 복식에 있어서는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로 꾸며지는 신복과 단순하고 소박한 차림새의 평복 차림새 등의 차이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신앙적 측면과 의례적 측면의 차이점을 내세워 두 개 집단에서 보이는 이질적 요소들을 강조하여 양자의 본질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강신무․세습무 양분에 기준 되고 있는 요소들이란 무속의 본질 이해를 위한 핵심적 요소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무속의 전체적 현상 내지는 근본을 규명하여 주는 데에는 한계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곧 미시적 시각으로 편하게 논의 될 수 있는 편이성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해의 폭을 한정적으로 만들어 피상적 결과만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파악되어 지고 있는 강신무․세습무의 기준 내지는 그 결과에 의한 두 개 집단의 이해에는 문제점이 분명 있음이다.
우리나라 무당은 강신성과 세습성 모두를 갖춘다. 앞서 논한 데로 기존에 강신무․세습무 집단으로 이원화하고 있는 기반은 신앙적 및 의례적 측면에서의 신내림 경험, 신당 소유, 공수, 단골제도 등의 여부 그리고 춤, 음악, 복식 등의 차이점 등인데, 이것들을 대상으로 그 부당성을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쉽게 거론될 수 있다.
첫째, 현재 강신무에서 말하는 신내림 현상이란 무당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생기는 신병을 경험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세습무에서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런데 신병이란 신앙적 경험을 바탕으로 후일 무업을 하면서 펼치게 되는 신과의 소통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들은 대체적으로 작두타기, 공수 등의 영험적인 요소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크게 보아 강신무에서 말하는 신병체험을 통한 영적 체험은 무당으로써 의례를 베풀기 위한 하나의 신령과의 관계에서 펼쳐야하는 기술적인 면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세습무에서도 신과의 연관성으로 이루어지는 기술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세습무로 분류되고 있는 동해안 별신굿의 놋동이굿에서 무당이 무거운 놋동이를 입에 무는 것이나 진도 씻김굿에서 당골이 물에 빠져죽은 자의 머리카락을 건지는 것 등은 신과의 연관성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기술이다. 이러한 것은 그 내용이 많이 축소되어 있고 의식절차가 간략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령의 의지와 관련되는 것으로 당연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신당 소유 유무에 있어서, 세습무는 강신무가 소유하고 있는 신당처럼 집안에 모시지는 않지만 신령을 모셔놓고 있는 마을 곳곳의 당집들을 세습무가 관할하면서 정기적인 의례를 베푼다. 마을의 이러한 신당들은 강신무들이 종교적 체험에 의해 개인적으로 모시고 있는 신당 못지않은 성스러운 곳으로서 마을민들 조차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신령 공간으로 인식되는 특정한 곳이다. 이것이 개인적 단위의 강신무 신당 소유 현상과는 색다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근본은 같다. 한편, 전라도 지역의 세습무들이 모시고 있는 만신단지라든지 동해안 지역의 신장모시기 등은 강신무당의 신당과 다를 바가 없다.
셋째, 강신무가 내리는 공수처럼 세습무도 공수를 내린다. 세습무도 신령에 대한 의식 없이는 의례를 주재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다. 세습무권에서 신과 관련되어져 행해지는 언어의 형식이나 내용이 강신무권의 공수와 같은 맥락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흔적을 더듬고 미래적 교훈을 중점으로 표명하는 현세적 삶에 대한 내용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세습무가 갖추고 있는 단골제도는 지역적 특수성과 전통성에 비추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이에 못지않게 강신무의 단골제도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어서 2대, 3대에 걸쳐 동일 무당에게 매여 있는 단골들을 아직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당주가 주관하는 마을굿의 지역민 참여는 정기적인 것이고 소속 마을민은 연초가 되면 홍수맥이를 비롯하여 당주의 신당에 정기적으로 기원을 드리기 위한 정성이 보편화되어 있다. 특히 강신무당의 신당에 보관되어 있는 명다리의 수를 보면 그 단골제도의 활성화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세습무당의 신구들이 강신무당들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긴 하지만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신구들도 의례에서 신령과의 매개체 역할을 하기 위해 쓰이며,4) 이는 무속세계의 중요한 귀물(鬼物)들로 분류된다.5)
위와는 달리, 의례적인 측면에서의 춤, 음악 그리고 복식의 차이점이란 이미 강신무․세습무 양분으로 굳어진 도식에 근거하여 나타난 현상적 내용을 종합하여 고찰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치더라도, 강신무에도 세습무 못지않게 진지하고 예술적으로 다듬어진 굿춤이 추어지는 것은 이미 밝혀진 것이다.6) 오히려 강신무 굿춤에 있어서의 기교적인 예술적 춤형식은 전문적으로 학습을 받지 않고서는 춤사위의 형태를 구사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다. 음악 역시도 예술성을 동반하지 않으면 고단위의 음악을 연주할 수 가 없으며 그들의 음악 수준은 전문 예능인집단에서 보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7) 따라서 강신무권의 잽이들 역시 집안 대물림에 의해 그 맥을 잇는다.
마지막으로 복식에 있어서는 강신무가 갖는 화려함의 신복은 아무래도 지역적 특성에 의해 서울 중심의 궁중 문화와 북방문화의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것은 서울 중부지역의 신복이 조선시대 궁중복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요 이북지역의 신복이 북방의 것과 흡사한 것이 적지 않음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세습이란 전문적 직업을 자손들이 물려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강신무권에서도 무업이 신부모로부터 신자녀에게로 대물림되는 것이 그들의 오래된 전통이다. 여기서의 신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혈육으로 성립되는 것보다는 신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로 논의 되어온 세습무의 대물림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제도적 틀 하에서 문화적인 전통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의 인식체계를 갖는 세습무들의 전통은 한국 역사와 문화 속에서 정당한 것으로 묘사되어져 무당의 유형(강신무, 세습무)을 논할 때 우선적으로 기준되어 지고 있는 것이 상례이다.
이에 비해, 강신무에 대한 세습성 논의는 세습무에 비교되어져 특정 요소의 여부 내지는 고저 등으로 대비된다. 이러한 부적절한 조사와 연구의 접근방식을 차치하더라도, 강신무는 특정한 문화적 틀을 갖지 못하여 전통의 이어짐이 형성되지 못하는 집단으로 매도되어 조사와 연구 대상에서 멸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바와 같이 지금까지 현장 조사에서도 밝혀졌지만 강신무들 역시도 조상의 대를 이어받아 무업을 한다. 그리고 입무 후에는 신부모ㆍ신자식 관계가 성립되어 기예능을 적극적으로 세습하고 그들의 전통을 대대로 이어간다. 무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부모로부터 철저한 굿 문서 학습을 거쳐야 함이 당연시 되어 있는 것이다.8)
그러한 단편적인 증거로서, 무당(강신무)들은 무당 부리(뿌리)에서 난다고 하는 데서도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강신 무당들을 조사해보면 집안에 누군가는 윗대에서부터 무당으로 활동하였던 것이 보편적이다. 이 때의 윗대 조상이 심지어는 현존의 후손에게 신으로 강림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이들의 전통은 강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대물림은 대를 건너뛰어서 이어지는 것이지만 당대에서 곧 다음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한편, 강신무당 중에서도 집안에 무당 내력이 없었던 경우도 있는 것이되 이는 비주류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이렇듯 강신무․세습무 분류 기준으로 삼아지고 있는 여타의 요소들은 사실상 양쪽 모두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써 무당으로 입무하는 과정에서부터 이 후 활동기간에 나타나는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다. 다만 이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이 지역적 무당계열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이미 제1차 강신무․세습무 공동연구발표의 이용범9) 발표에서 이루어진바 있다.
Ⅲ. 김태곤․최길성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 검토
오늘날 한국무당의 분류에서 강신무․세습무 구도는 김태곤․최길성의 연구결과에 의해 굳어진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같은 시기의 연구자들인 장주근, 현용준, 임석제, 김인회 등이나 이보다 앞선 언급자들의 연구에서는 그다지 크게 부상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용어의 활용에 있어서도 김태곤․최길성 연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제와 관련하여 여러 연구자들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김태곤․최길성 두 연구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만 다음 연구자들의 입장 표명이 설득력을 갖는 구도이다. 김태곤․최길성 시대 이전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서양인 언더우드, 클라크와 손진태 그리고 일본인 아끼바 등도 거론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강신무․세습무에 관한한 구체화되지 못하고 용어 또는 개념 정립도 역시도 미약하다.
김태곤․최길성은 우리나라 무속신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할 정도로 깊이 있는 연구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이 오늘날까지 큰 비판 없이 여러 학자들에게 수용될 정도의 위력을 가질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아도 입증되는 것이다.
두 연구자는 강신무․세습무 두 유형론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개의 유형의 시원이 다르다는 것에 큰 차이점을 갖는다. 이 때의 차이점이란 단순히 강신무․세습무의 개념이나 분류형식에 있어서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나라 무당 기원설에 관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한국 무속의 전파설이나 자연발생설 또는 지역이동설, 교차설 등 굵직한 쟁점들이 걸려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본질 접근에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불어 강신무․세습무와 관련된 두 연구자의 논의는 사실상 우리나라 무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전체적인 맥락의 해석과도 직접적으로 얽혀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이런 이유에서 본 논제의 진전을 위해서는 두 연구자의 학설이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추려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김태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무당은 원래부터 모두가 강신무 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류였던 강신무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지역적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일부가 세습무로 변화되었는데, 그것들이 오늘날 남부지역으로 몰려있는 세습무다.” 이러한 주장의 한 면에는 소위 한국 무속의 발원이 한민족의 시원과 함께 하고 있을지라도 그 맥락은 북방계열과 같이한다고 보는 것인데, 이는 곧 시베리아 샤머니즘과의 연관성을 줄곧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골격은 바로 우리나라 무속과 북방지역 샤머니즘과의 연관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따라서 한국 무속은 곧 북방 샤머니즘이라는 카테고리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김태곤의 주장에는 한국 무속의 북방유입설을 굳이 주장하기 보다는, 북방유입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한반도 내에서의 자연발생적 측면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며, 그러함에도 그 양상은 북방 샤머니즘과 같은 맥락으로 본다는 것이다.
김태곤의 주장과는 달리, 최길성은 북쪽지역에 강신무가 있었지만 동시적으로 남쪽지역에도 세습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북방의 것이 북방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남방의 것은 남방문화의 교차에 의한 것이며, 남방의 것은 한국 고유의 것이되 또 한편으로 북쪽지역의 강신무의 것보다 고풍스러운 것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 강신무로 분류되고 있는 중북부의 것은 샤머니즘 현상으로 이는 곧 북방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같은 맥락이고, 이와는 달리 남부의 것은 북부의 것과는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부의 것은 무속으로 보았고 북부의 것은 샤머니즘으로 보는 것인데, 이것들은 애초부터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원에서 발단되었던 것으로서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공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김태곤의 논의에서는 한국 무속이 자연발생이든 북방유입이든 시원의 지역성을 확실하게 표명되지 않고 있는 것에 반해, 최길성은 중북부지역의 강신무는 북쪽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고 남부지역의 세습무는 남방문화와의 교차에 의해서 성립된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김태곤의 반박에서와 같이, 최길성은 이러한 지역거론에 있어서 즉 세습무의 남방교차설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또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강신무․세습무 논의는 김태곤․최길성 두 연구자에 의한 한국 무속 기원설과 얽혀 있기 때문에 본 주제의 본질 규명을 위해서는 두 연구자의 견해에 입각한 한국 무속 시원 문제를 들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 무속 기원과 관련된 두 연구자의 논문은 같은 해 같은 학술지에 발표되어 눈길을 끈다. 한편, 한국 무속 기원에 관한 학문적 접근은 사실상 두 연구자가 시초이며 그들의 논리 전개가 학계에 피력되는 시기는 한국 무속 연구의 학문적 기틀을 잡아가는 중대한 때이다. 또한, 두 연구자는 한국 무속학을 철저한 현지조사를 곁들여 무속학의 조사․연구방법의 체계의 기틀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분야의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던 선구자적인 점에서도 더욱 주목되는 바이다.
1. 김태곤의 주장 검토
김태곤의 무속 연구는 세습무쪽의 조사 연구가 있긴 하지만 주로 강신무쪽이 보다 돋보인다. 이는 최길성의 조사와 연구가 주로 세습무쪽에 치중하고 있는 것에 비해 재미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태곤의 무속 조사와 연구는 해방 직후인 60대에 본격화되었고 그의 강신무․세습무 언급은 60년대를 시작으로 줄곧 이어져 왔다. 특히 1969년 ꡔ한국민속학ꡕ 창간호에 발표한 「한국 무계의 분화변천:강신영감무계와 세습사제무계의 분화 원인을 중심으로」에서 본 논제가 구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는데, 이것에 기반을 둔 이후의 글들에서 그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하여 온 것이다. 한편, 김태곤의 주장에는 장주근, 현용준 등이 가세함으로써 보다 설득력을 갖게 하고 있다. 김태곤의 논저 중 다음의 글들이 본 논제와 관련된다.
「한국 무계의 분화변천:강신 영감무계와 세습 사제무계의 분화 원인을 중심으로」, ꡔ한국민속학ꡕ 창간호, 1969.
「동해안지방 무속」, ꡔ고문화ꡕ 5․6합집, 1969.
ꡔ한국무속연구ꡕ, 집문당, 1981.
ꡔ한국의 무속문화ꡕ, 도서출판 박이정, 1988.
ꡔ무속과 영의 세계ꡕ, 도서출판 한울, 1993.
강신무․세습무와 관련된 김태곤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적 기능의 계통을 신의 영력에 의한 영감을 주로 하는 계통과 신의 영감이 없이 사제적 의례집행만을 하는 계통이 병존하고 있으며 양 계통의 무적 기능은 입무의 계기에 따라 숙명적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전자는 강신에 의한 무병 과정을 체험하여 무(巫)가 되는 것인데 이는 무의 출발이 신의 영력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혈연적 세습에 의해 무가 계승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무의 출발이 사제의 혈연적 계승권에 있다.
② 양자 간에는 강신(降神) 영감무계(靈感巫系)와 세습(世襲) 사제무계(司祭巫系)의 이질성을 갖게 되며 이 이질성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의 규명이 한국 무의 성격 규명상 불가피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양자 중 어느 하나가 원무계로부터 분파되어 변화하였거나 또는 어느 하나가 타 지역으로부터 전파되어 왔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 타 지역에서 전파되어 왔기 때문인 것이다.
③ 최길성이 말한, 엑스타시가 있는 무는 북방의 시베리아 계통의 샤먼이며 엑스타시가 없는 전남의 당골은 남방적인 비샤먼이라는 설은 통시성이 결여되어 있는 견해이고, 전남의 당골이 남방계라면 남방에 대한 지역적 구체성과 아울러 상호비교 결과를 가지고 그 전번 경위가 지역적 계통을 찾아 밝혀졌어야 할 것이다.
④ 무의 계통을 영력의 유무에 의한 직능적 기능에 따라 그 성격상의 기준을 두게 될 때 강신에 의해 영감을 갖는 무 즉, 중부 및 북부를 포함해 분포되어 있는 무당 박수 및 전국적 분포를 보이고 있는 선무당류, 점쟁이로의 무가 강신영감계의 무계에 해당되고, 호남지방의 당골, 영남 영동지방의 무당 제주도의 심방이 세습 사제무의 계통에 해당된다. 단 무당(박수) 선무당 점쟁이류는 무 의식(儀式)상에 따르는 종교적 테크닉의 문제에 그 원인이 있을 뿐 영적 기능면에서는 동일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강신 영감무계에서 필이 엑스타시가 무의식 진행상 수반되어 영계와 교통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영계와 교통하여 영감을 갖기 위한 것으로서 영계로 몰입되어 가는 영적 인격의 전환에 따르는 종교 심리적 테크닉의 현상이기 때문에 엑스타시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무의 영감에 부수되는 테크닉일 뿐 이와 같은 엑스타시가 무의 본질적 성격문제를 결정 지를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는 없다. 즉, 엑스타시는 타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종교심리상의 한 테크닉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엑스타시가 샤마니즘의 본질을 규정지을 수 있는 본질적 기준점이 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엘리아데(M. Eliade)도 엑스타시를 샤머니즘의 본질로 보지 않고 테크닉의 현상(shamanism=technique of ecstasy)으로 보았다.
⑤ 세습 사제무의 기능이 사제에 국한되는데 반해 강신 영감무는 사제를 겸하면서 동시에 영감에 의한 예언과 점복의 기능을 갖는다. 강신 영감무의 영력 소유 모티브는 입무 계기로서의 강신체험 과정,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신과의 접촉관계, 신과의 매개를 위한 신복 신구, 의례과정에서 인격전환에 소요되는 종교 심리적 테크닉에 따르는 엑스타시와 그에 따르는 의식적 여건 등이다. 이와는 달리, 세습사제무는 영감 없이 굿 의례상의 사제적 권한에 국한한다. 그러면서도 무가 계승되는 것은 이 계통의 무가 갖고 있는 사제의 세습적 계승권에 있다. 따라서 영감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점은 일종의 점바치에게 의존한다.
⑥ 무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 ꡔ삼국지ꡕ, ꡔ후한서ꡕ 등의 동이전에 전하는 자료인 제천의식과 소도이지만 여기서는 오늘날과 같은 강신 영감무와 같은 영감에 대한 요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삼한시대 제천에 종사한 천군 칭의 사제자는 무가 아니고, 무는 오직 3세기 이후에 전래된다. 그러나 제천에 관한 기록은 무가 이미 부족의 공공적 사제자로 정착되어 사제무로서 ‘charismatic shaman’ 내지 ‘charismatic leader’의 과도기를 거쳐 카리스마적 요소가 도태된 후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무속사 연구상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이 천군은 오늘날의 세습사제무와 동계의 성격을 가지며 삼한지역의 오늘날 세습 사제무계가 분포되어 있는 남한지역이라는 지역상의 일치점에서도 주목된다. 따라서 삼한시대 천군이 이미 공공적 사제무로 정착된 것이라면 그 이전부터 무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민족의 이동 접촉관계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무의 북방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인간의 심리적 문제로서 에반스 프리챠드의(E. E. Evans Pritchard) ꡔ원시종교론ꡕ(Theories of Primitive Religion, 1965)의 이론에 따라, 인류의 생활이 있으면 어디서나 어떠한 양상이든 종교형태가 발행하게 된다. 인류의 공동생활에서 종교적 지도자로의 무(巫)의 발생을 볼 수 있다. 이는 지역적 문화환경 조건에 따라 같은 지역 내의 민족들 사이에서 유사한 독립발생으로부터 유사한 진화과정을 가져올 수 있다. 이차적으로 현상적 과정을 거쳐 통시적 기원문제에 따른다. 즉 무가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공인될 수 있는 조건은 무를 필요로 해야만 하였던 인간 심적 태토에 있다.
⑦ 무의 시작은 영험력을 가진 사적 무 단계에서 시작하였으며 신과 관계를 갖는 특별한 의식과 그에 따르는 복장, 도구, 춤, 몸짓, 음악, 가사 등이 동반되어 신과 통하는 전문적 기술로 발달하게 되었다. 즉 원시적 사회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심적 태도에 적응해 영험력을 발전시켜 종교력에 의한 특수 초인적 신권의 존재자가 되어 사회적 권한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무 발전의 단계적 구분은 그 진화상의 성격적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무 전체가 반드시 이와 같은 획일적 단계를 거쳐 왔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단계무의 주요 기능과 생명력은 영험력이 주가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의 강신영감무계가 이 단계의 무 계열에 해당된다.
⑧ 무의 사회적 정착과 영험력의 도태와 분화 변천에서 1단계 무를 ‘charismatic shaman’ 그리고 2단계 무는 ‘priestly shaman’이다. 2단계 진화과정은 1단계(초단계) 진행과정에 있는 강신 영감무계를 무의 원류로 본다. 2단계 진화과정은 즉, 무의 주요 기능(영험력)이 점차 사회전반의 공공성을 띤 집단체의 사제로 집약되면서 직능상의 전문화 내지 초인격적 존재의 신권적 통사권으로 인해 사제권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어 세습화의 단계로 들어간다. 이 단계의 무가 현재 호남, 영남, 제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세습 사제무계이다. 예로써 기독교가 1세기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교회에서 2세기의 사제권(priestly) 지도자에 의해 사도권이 계승된 점과 같다. 그리고 시베리아 북부의 에스키모족, 브리야트족, 남부시베리아 등의 세습 샤만, 남부수단, 말레시아, 수마트라 등지의 주의(呪醫, medicine man), 동부 아프리카 왐부궤(Wambugwe)족의 마법사가 세습적으로 전승되어 사회적 지지를 갖게 된 점도 같은 맥락이다.
⑨ 강신무의 영험력 쇠퇴 원인은 곧 무가 사적 유동적 상태에서는 영험력이 주가 되지만, 사회적 배경을 기반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세습적으로 정착되어 무의 기능이 공적 사제로 바뀐다. 이는 신권적 사제권이 세습되면서 점차 영험력의 주술 기술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⑩ 세습무의 분포지역에 따른 차이점은 곧 문화진화 단계가 지역성에서는 공간적 시간적 차로 불균등하게 발전을 가져온 현상으로서, 즉 남부에서는 농경에 의한 정착적 생활, 북부에서는 수렵채취에 의한 유동적 생활, 남부에서는 전쟁이 없을 때 북부는 지리상으로 북방민족과의 전쟁이 잦았기 때문으로 사회가 무력적 통치권 밑에서 통솔되면서 무의 종교력에 의한 사회적 통솔과 정착이 일찍이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이와 같은 여권 밑에서 당초 무의 종교적 기능이 사회적으로 발전되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김태곤이 주장하는 주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무당을 기능적으로 파악하여 신의 영력에 의한 영감계 무와 신의 영감이 없이 사제적 의례집행만을 하는 사제계 무로 나눈다. 전자의 것은 중부 및 북부에 분포되어 있는 무당 박수 및 전국적 분포를 보이고 있는 선무당류, 점쟁이들이며 후자의 것은 호남지방의 당골, 영남 영동지방의 무당, 제주도 지방의 심방 등을 말한다. 영감계 무와 사제계 무의 두 계통은 그들의 입무과정에부터 나누어지는 것인데, 전자는 무병체험이며 후자는 혈연적 세습에 의한 것으로써 곧 강신과 세습에 따라 이른바 강신(降神) 영감무계(靈感巫系)와 세습(世襲) 사제무계(司祭巫系)이다.10) 양자는 원래 같은 계통의 무당이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쪽이 이질성을 갖는 것으로 변화되었고 그것이 곧 강신 영감무로서 원무계이며 세습 사제무는 여기에서 분파된 것이다.
ꡔ삼국지ꡕ, ꡔ후한서ꡕ 등의 동이전의 기록이 전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강신 영감무와 같은 영감에 대한 요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기록에 나오는 삼한시대의 천군은 무가 아니고 무는 오직 3세기 이후에 전래되어 온 것이다. 제천의 기록으로 볼 때 무가 이미 부족의 공공적 사제자로 정착되었는데 그것은 카리스마적 요소 즉 강신영감 기능이 도태된 후의 현상으로, 여기서의 천군은 오늘날의 세습 사제무와 같은 성격을 가짐으로써 이는 곧 세습무가 이 시기에 이미 분파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부터 무가 있었으며 그것은 북방문화 유입 내지는 자연발생이다.
따라서 무의 시작은 영험력을 가진 영감 강신무인데 이들은 신과 관계를 갖는 특별한 의식과 그에 따르는 복장, 도구, 춤, 몸짓, 음악, 가사 등이 동반되어 신과 통하는 전문적 기술로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무의 변화과정은 1단계의 ‘charismatic shaman’과 그리고 2단계를 ‘priestly shaman’이며 전자가 무의 원류이다. 강신 영감무(현재의 세습 사제무로 바뀐 것)의 영험력 쇠퇴는 사회적 배경을 기반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세습적으로 정착되어 무의 기능이 공적 사제로 바뀌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신권적 사제권이 세습되면서 점차 영험적인 주술 기술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2. 최길성의 주장 검토
최길성의 무속연구는 강신무쪽에 비해 세습무 쪽의 연구가 보다 강하다. 이는 김태곤의 무속연구가 주로 강신무에 치중해 있는 것에 비해 주목되는 바이다. 어찌되었든, 최길성이 주장하고 있는 강신무․세습무 유형론 배경도 김태곤과 같이 해방 직후부터 본격화된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조사는 주로 전남북 도서지방과 동해안 지역 등인데, 1968년 전국민속종합조사에서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세습무당들의 전승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게 되었다. 최길성은 특히 세습무당들의 활동과 전승 형식이 서울지방의 강신무와는 대립적인 양상을 갖는 것에 흥미를 갖으면서 특히 전남북도 도서지방과 서울지방의 무당들의 각기 다른 전승구조의 대립적 양상의 현상을 비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김태곤과 동일하게 1969년 ꡔ한국민속학ꡕ 창간호에 발표한 「무계전승고:전남 당골을 중심으로」에서 본 논제와 관련된 깊이 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최길성 논저들 중 강신무․세습무에 관한 내용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들이다.
「무계전승고:전남 당골을 중심으로」, ꡔ한국민속학ꡕ 창간호, 1969.
「한국무속의 엑스타시 변천고」, ꡔ아세아연구ꡕ, 고대아세아연구소, 1969.
「한국 민간신앙의 유형」, ꡔ석주선교수회갑기념논문집ꡕ, 1971.
ꡔ한국무속의 연구ꡕ, 아세아문화사, 1978.
ꡔ새로 쓴 한국무속ꡕ, 아세아문화사, 1999.
강신무․세습무와 관련된 최길성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 남부지방의 여무를 당골무당, 남무를 재인, 중부지방의 여무를 무당, 남무를 박수, 북부지방의 여무를 무녀, 남무를 점술이라고 하는 곳이 많다. 입무 동기를 세습과 영감(강신)별로 나누어 비교하여 볼 때 남부지방은 세습무가 지배적이고 북방으로 감에 따라 강신무 비중이 커진다.
② 남도지역의 당골은 서울지방의 무격 신앙과는 다르다. 이는 부계적 전승형의 제주지방의 심방과 함께 주목해야 한다. 또한 당골과 서울지방의 무당과는 별 차이가 있는 것 보다는 지역적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의례의 형식이나 무가 내용에 공통점이 많고 다만 신앙체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③ 무 유형의 기능에 있어서, 서울지방의 강신무에는 무당, 박수, 보살, 점쟁이 등이 있는데 이들은 비샤먼인 맹고(盲瞽), 독경, 지관(풍수)들과는 다른 것이다. 즉 강신무로서의 무당, 박수, 보살, 점쟁이를 샤먼으로 생각한다. 이중 의식적으로 형태가 발전된 것은 무당 박수이다. 이 둘은 성별 차이일 뿐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써 이 지방에서도 과거에는 당골 조직이 있었지만 점쟁이의 번성으로 강신무의 일색이 된 것이다.
④ 전남지방의 당골은 의례에 한하여 종사하고 점은 하지 않는다. 이 지방의 점은 영험스러운 점바치에 의하고 점바치는 점에만 한한다. 그러나 당골과 점바치는 서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갖는다.
⑤ 무계전승에 있어서 시어머로부터 며느리로 전승되는 고부 전승형(姑婦傳承型)이 부계 전승형,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전승되는 모녀 전승형(母女傳承型)이 모계 전승형이다. 전남지방은 고부 전승형으로 되어 있으며 서울지방의 강신무는 모녀 전승형으로서 이는 신딸 전승형으로도 부를 수 있다. 강신무의 전승 조건 원칙은 혈연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신의(神意)가 절대적인 조건이다. 무가(巫家)의 무계(巫系)를 따라 강신된다고 하지만 신병에 의한 신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부계, 친자, 부부관계 등의 혈연관계가 아니고 신모와 신딸 관계에서 형성되는 모계적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학습과정이 발달하지 못하여 결국 엑스타시(ecstasy)무로서 영험을 빙자하는 비중이 크다.
⑥ 당골의 의례는 서울지방의 무속(샤머니즘)보다 고풍적인 것으로 한국 고대 원시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당골은 비샤먼이며 무당은 샤먼(shaman)으로서 당골은 고풍스럽고 한국적이며 샤먼은 도시 중심으로부터 차차 농어촌 지방으로 침투해 가고 있다.
⑦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강신무라는 샤먼(shaman)의 유형을 무당이라 부르고 남부지방의 전라, 경상, 강원도지방에서는 세습무라는 것을 당골 또는 무당이라고 부른다. 또 중부 이북지방의 샤먼에 해당하는 것을 남부지방에서는 점장이라고 부른다. 일반인들은 때로 무당이란 유형을 구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술어로써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당골과 샤먼을 유형적으로 구분하여 정의할 필요가 있다.
⑧ 한국 민간신앙의 한 유형인 무속신앙을 샤머니즘이라는 용어로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인데 그는 한국에 기독교를 토착시키기 위해 한국민간신앙을 연구하여 1910년에 ꡔ동아시아의 종교ꡕ(The Religions of East Asia) 제3장에 「한국의 샤머니즘」이라는 주제를 논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의 무속신앙을 처음으로 샤머니즘으로 명명한 것이다. 언더우드의 샤머니즘 정의에는 경문을 구전으로 학습하여 악귀 잡귀를 축귀하는 판수(맹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정의는 이후에도 클라크(C. A. Clark)의 저서 ꡔ고대 한국의 종교ꡕ(Religions of Ols Korea)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후 손진태, 추엽륭 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⑨ 나는 언더우드의 광의의 정의와는 달리 협의의 정의를 통해 한국의 샤머니즘 특징으로 무병 도무 신탁을 기본적 요건으로 하고 있음을 밝혔는데 이는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슈미트, 슈레더, 흰다이센, 엘리아드, 굴일랑(堀一郞) 등에 의해 발전된 개념을 한국무속 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⑩ 당골은 사제(priest)로써 혈연에 의한 특수사회계층, 학습에 의한 무업의 계승, 굿의 사제자라고 규정되는데 이는 웨버(Max Weber)의 「카리스마와 제도형성에 대하여」(On Charisma and Institution Building) 그리고 훠스(R. Firth)의 ꡔ계급과 종교ꡕ(Rank and Religion)에 밝힌 논리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곧 남부지방에 당골이 사회 조직적으로 역할분화가 되어 있고 샤먼인 점장이가 사적인 무(巫)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곧 중부지방에서 샤먼(무당)이 민간신앙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지방에서는 점쟁이(샤먼)가 사제자의 부차적인 존재가 된다. 즉 남부에서는 샤머니즘의 약화 현상을 볼 수 있다. 남부지방의 점쟁이는 무병과 신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의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중부지방의 선무당과 같은 류이다. 이런 것은 본질적으로 상반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하나에서 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것은 예컨대, 일본 오키나와에 있어서 사제자(노로)가 주류를 이루고 샤먼(유다)이 부차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같은 현상이다. 그런고로 일본의 유다와 한국의 점장이(남부지방) 및 선무당(중부지방)은 사회적 조직 안에 존재한 다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무업을 하고 있다(사적)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남부지방의 점바치와 중부지방의 선무당이 오키나와까지 확대 분포되어 있다. 한편, 노로는 입무과정에서 무병 현상을 갖지 않으며 가계 계승으로 이어간다.
결론적으로 최길성의 주요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남부지방의 여무를 당골무당, 남무를 재인, 중부지방의 여무를 무당, 남무를 박수, 북부지방의 여무를 무녀, 남무를 점술이라고 하고 이들을 입무 동기상 세습과 영감(강신)별로 나누어 비교하여 볼 때, 남부지방은 세습무가 지배적이고 북방으로 감에 따라 강신무의 비중이 커진다. 따라서 남도지역의 당골은 서울지방의 무격 신상과는 다르며 이는 제주지방의 심방과 함께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부지방의 당골과 서울지방의 무당이 다른 것은 지역적 차이이다.
무 유형의 기능에 있어서는, 서울지방의 강신무에는 무당, 박수, 보살, 점쟁이 등이 있는데 이들은 비샤먼인 맹고(盲瞽), 독경, 지관(풍수)들과는 다른 것이다. 즉 강신무로서의 무당, 박수, 보살, 점쟁이를 샤먼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들 중 의식적으로 형태가 발전된 것은 무당 박수이다. 전남지방의 당골은 의례에 한하여 종사하고 점은 영험스러운 점바치가 한다.
전승 유형은 시어머로부터 며느리로 전승되는 고부(姑婦) 전승형(傳承型)이 부계전승형,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전승되는 모녀(母女) 전승형(傳承型)이 모계 전승형이다. 전남지방의 당골은 고부전승형이지만 서울지방의 강신무는 모녀 전승형(신딸전승형)이다. 후자는 혈연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신의가 절대적인 조건이며 신병에 의한 신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들은 학습과정이 발달하지 못하여 결국 엑스타시(ecstasy)무로서 영험에 비중을 둔다. 한편, 당골의 의례는 서울지방의 무속(샤머니즘)보다 고풍적인 것으로서 한국고대 원시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은 비샤먼들이다. 따라서 그 명칭에 있어서는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강신무라는 샤먼(shaman)이 있으며 남부지방의 전라 경상 강원도지방의에서는 세습무라는 당골 또는 무당이 있는 것이다. 또한 중부 이북지방의 샤먼에 해당하는 것을 남부지방에서는 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당골은 사제(priest)로서 혈연에 의한 특수 사회계층, 학습에 의한 무업의 계승, 굿의 사제자라고 규정된다. 곧 남부지방에 당골이 사회 조직적으로 역할분화가 되어 있고 샤먼인 점장이가 사적인 무(巫)로서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곧 중부지방에서 샤먼(무당)이 민간신앙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지방에서는 점쟁이(샤먼)가 사제자의 부차적인 존재가 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남부에서는 샤머니즘의 약화 현상을 볼 수 있다. 남부지방의 점쟁이는 무병과 신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의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중부지방의 선무당과 같은 류이다. 이런 것은 본질적으로 상반된 것으로써 역사적으로 하나에서 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나라 무속에서 강신무․세습무로 분류되고 있는 한국 무당 유형 설정에 관한 모순점 내지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을 피력한 후, 본제와 관련된 무속학자 김태곤과 최길성의 논문을 중심으로 한 논리 진상을 검토하였다. 두 연구자는 장기간에 걸친 세심한 무속 현장조사와 외국 사례 및 이론 등을 기반으로 한국 무속의 기원을 밝혀내는 접근방식의 한 조건으로서 무당의 유형을 기능, 형식, 또는 지역적으로 분류하면서 강신무․세습무 유형을 규정하였다. 따라서 두 연구자가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논리 전개에는 직접적으로 한국 무속의 기원설과 얽혀있는 매우 예민한 사안이다. 그러므로 강신무․세습무 유형론 검토는 불가피하게도 한국 무속의 시원 문제의 검토와 함께 논의 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강신무․세습무 상정은 강신성과 세습성이라는 이른바 무당이 갖추어야 하는 아주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습성을 구체화하여 이를 기초로 현상학적으로 파악되는 지역적 특성에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타민족 내지는 지역이 갖는 종교심성 및 민족지적 관련 자료들을 참고삼아 샤머니즘이 갖고 있는 엑스타시의 개념을 강신성과 함께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습무에 있어서는 사제자 역할이 많은 타민족 종교현상에서 알려진 대물림 또는 사제권 계승의 자료들을 인용하고 이러한 사례는 곧 한국의 것과 동일한 케이스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현재 통용되고 있는 강신무․세습무의 용어에는 타민족의 이러한 종교적 또는 신앙적 전승 발전의 사례들이 두 연구자의 논리를 착안하는데 힘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양 연구자 모두가 강신무의 성격규명에 대한 견해에서 엘리아데가 규정한 엑스타시의 현상을 샤머니즘과의 연관성에서 살피고 있어 어떠한 식으로든 오늘날 강신무의 개념 속에는 분명 세계 각국에 널리 보편화되어 있는 샤머니즘의 성질과 같은 맥락으로 쓰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김태곤은 무의 개시단계를 설명하면서 궁핍한 문헌자료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현지조사를 통한 공시적 그리고 문화사적 내지는 종교사적 입장의 통시적 접근방식을 기반으로 무의 발단과정을 기능상으로 관찰하였고, 그러한 현실 문제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불가피하게 강신 영감계통(강신영감무)과 세습 사제계통(세습사제무)의 분류로 처리하였던 것이다. 분리상의 기술을 토대로 한국 무당은 곧 샤먼(shaman)이며 이는 여타의 민족에서 보이는 샤머니즘과 같은 맥락의 선상에서 보는 것으로서, 특히 시베리아 북부의 에스키모족, 브리야트족, 남부시베리아 등의 세습 샤만, 남부수단, 말레시아, 수마트라 등지의 주의, 동부 아프리카 왐부궤족의 마법사 등과는 일맥상통한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중부 및 북부를 포함해 분포되어 있는 무당 박수 및 전국적 분포를 보이고 있는 선무당류, 점쟁이, 호남지방의 당골, 영남 영동지방의 무당 제주도의 심방 등도 모두 한 계통의 무라고 보는데 다다랐다.
이와는 달리, 최길성론의 남방문화 교차설에는 분명 일본인 추엽륭의 설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추엽륭이 당골을 세습무라고 부른 이래 많은 학자들이 그 말을 사용하고 있고 최길성 자신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세습무는 샤머니즘의 유형이 아니며 강신무는 샤머니즘 유형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추엽륭은 한국 무속의 의례, 무구, 무장(巫裝) 등으로 보아 분화 발전된 것인데 그것은 곧 남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합 그리고 습합한 것으로써 이른바 무속복합체를 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논지를 최길성이 구체화하여 곧 우리문화의 원형으로서 당골과 같은 사제를 중심으로 한 무속신앙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에 북방문화의 샤머니즘이 흘러들어와 복합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무속신앙의 원초적 양상은 단순히 샤머니즘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설득력 있게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부지역 당골의 세습성과 중북부 지역 무당의 강신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결국 최길성의 논지에서도 강신성과 세습성이라는 기능적 유형을 그의 지역이동에 기반을 둔 무속기원설을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따라서 최길성은 한국에는 두 개의 신앙형태가 공존하는데 그것은 무속과 샤머니즘이며 이것들은 같은 것이 아니라 하였다. 무속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한자어 무(巫)를 중심으로 하는 뜻이고, 샤머니즘은 서구인들이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원시신앙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정의는 엘리아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접신된 샤먼의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가 천상이나 지하세계의 영계를 여행하는 것으로 특징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학자들이 탈혼형(脫魂型)이라고 번역하였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형태의 샤먼은 엑스타시(ecstasy)를 갖는 것으로써 이를 수행하는 무당을 강신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최길성의 논지에서도 김태곤과 같이 한국 무당의 습성(강신성)이 결국은 세계적으로 펼쳐져 있는 샤머니즘의 본질인 샤먼의 엑스타시에 입각한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길성 논지에 따라, 샤먼(shaman)과 사제(priest)는 서로 공존하거나 습합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만 두 개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샤먼은 영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교통하여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사람이며 사제는 윗세대로부터 지위나 능력을 물려받거나 배워서 의례를 행한다고 한다. 즉 샤먼은 영험력을 소유한 강신무이고 사제는 이와는 다른 세습무라는 논리이다. 그러면서 강신무는 엑스타시를 동반하는 샤먼을 말하는데 이는 무병을 거쳐 신을 모시는 성소로서 신당을 갖추고 형식화된 의례로서의 굿을 주제하는 특징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더불어 여기에는 무복, 무악, 무무, 무가 등이 포함된다고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무병, 신당, 무의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무당의 유형에 포함되는 것인데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것이 결여되어 있는 무당을 선무당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곧 한국 뿐 아니라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샤머니즘권에 속하는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습무는 신병을 거치지 않고 다만 부모로부터 신분을 세습하는 사제로서 이러한 세습은 생물학적인 유전이 아니고 사회적 전통에 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최길성의 주장은 곧 남부지방의 유형인 사제 세습무 즉 전라도 당골, 경상도 무당, 제주도 심방은 샤먼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러한 해석은 한국의 무당(강신무)을 샤먼으로 보는 것이다.
강신무․세습무 용어는 무속 현장에서는 쓰이지 않는다.11) 그렇다고 역사적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무당에 관한 역사 문헌적 명칭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왔고 오늘날에도 다양한 용어들이 무속 현장에서 쓰이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기능상 또는 지역특성상의 분류 내지는 개념정리에 대한 것은 빈약할 뿐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한국 무속이 학문적으로 발돋움 할 즈음에 강신무․세습무 용어가 도입되어져 쓰이게 되었고, 이것들은 외국 사례들과 함께 한국 무속의 시원을 밝히는 연구에서 그에 대한 개념 내지는 정의가 이루지면서 명명되어진 것이다. 이 후, 두 개 용어는 오늘날까지 그 진의를 간과한 채 파급되어져 일반인들은 물론 학계 종사자들에게까지도 인용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두 용어 쓰임에는 단순히 무속 기원 논의 접근상 불가피하게 그 기능상 내지는 지역적 특성상 상황 설명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두 개의 용어가 범주하고 있는 여타의 명칭들에 대한 명확한 분류가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두 용어가 뒷받침하고 있는 한국 무속 개시에 대한 양론의 분석 내지는 검증도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두 용어는 결국 한국 무속의 개시에 관한 자연발생설 내지는 북방유입설과 북방유입설 및 남방문화 교차설에 대한 논의에 깊숙하게 얽혀 있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반 문제를 묵인한 상황 속에서의 강신무․세습무 용어의 쓰임과 개념 설명은 혼돈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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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속 용어 정립이 아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니 안타깝습니다,,,,,
읽는건 어제 읽었는데 댓글은 오늘 답니다^^
강신무와 세습무의 용어에 대해 잘 배우고 갑니다.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