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는 모른다. 그는 이제 끝에 와 버렸다. 그는 자기 발밖에 보지 않았다.
발 앞에 발…….
그는 쳐다보았다. 눈앞에 불빛이. 그리고 글씨가…….
경찰서.
캐스트 씨는 말했다.
“이상한데.”
그는 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리고 안으로 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 포아로의 질문 >
활짝 갠 11월 어느 날이었다. 솜프슨 박사와 재픔 경감이 앨릭잰더 보너퍼트 캐스터 씨 사건에 대한 경찰 심문 결과를 알려주러 포아로를 찾아왔다.
포아로는 가벼운 기관지염 때문에 거기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나에게 참석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제프 경감이 말했다.
“심문을 하고, 마침내 끝났습니다.”
내가 말했다.
“이 단계에서 변호사를 붙이다니 드문 일 아닙니까? 나는 죄수란 끝까지 변호를 미뤄 두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제프 경감이 말했다.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닙니다. 그 루커스라는 젊은 사람이 마구 끌고 나가려는 거겠지요. 그는 기회라고 여기는 겁니다. 광기라는 것이 변호의 단 하나뿐인 핵심이지만 말입니다.“
포아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치광이를 풀어 내보낼 수는 없지요. 폐하의 뜻이 사형에 반대이신 한 감금이겠지만요.”
제프 경감이 말했다.
“루커스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벡스힐 살인에 제 1급 알리바이라도 있으면 사건 전체가 약화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이 사건이 얼마나 뚜렷한 것인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루커스는 색다른 짓을 할 겁니다. 아직 젊고 사람들 앞에서 히트를 치고 싶어하니까요.”
포아로는 솜프슨 박사 쪽을 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박사님?”
“캐스트 씨에 대해서 말입니까? 글쎄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는 여느 사람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간질병 환자입니다.”
내가 말했다.
“놀라운 클라이맥스였습니다.”
“그 남자가 앤도버 경찰서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 일 말입니까? 그렇지요, 그것은 그 드라마에 알맞은 극적인 종말이었습니다. ABC는 언제나 꼭 효과를 노리고 있었지요.”
나는 물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남자의 부정에는 어던 진실의 울림이 있으니 말입니다.”
솜프슨 박사는 조금 미소 지었다.
“그 연극적인 <신에 맹세코>라는 태도에 속아선 안 되지요. 캐스트 씨는 살인을 저지른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제프 경감이 말했다.
“열중해서 한 일은 대개 기억하고들 있지요.”
솜프슨 박사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간질병 환자가 몽유 상태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서 그것을 전혀 모르는 경우는 확실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위라도 깨어있는 상태 때의 그 자신의 의사에 반대되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리고 그의 큰 악과 작은 악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사실을 말하면 학식있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주제에 열중할 때 듣고 있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게 혼란만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저는 캐스트가 자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이들 범죄를 저질렀다는 데 반대입니다. 편지 일만 없다면 그 의견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편지가 그 의견을 완전히 때려부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의 예비성과 용의 주도한 계획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포아로가 말했다.
“뿐만 아니라 편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아직 없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흥미를 갖게 하는군요?”
“물론 그렇지요. 그 편지는 저에게 보내져 온 것이니까요. 그리고 편지 이야기만 나오면 캐스트는 끈질기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들 편지가 저한테 씌어진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한 저는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당신 생각은 알겠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왜 맞섰느냐는 것에 대해 짐작되는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지요?”
“전혀 없습니다.”
“한 가지 짚이는 것을 이야기하겠는데, 당신 이름입니다!”
“제 이름이?”
“그렇습니다. 캐스트는 - 분명 그 어머니의 기호로 말미암아 - 거기에는 확실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 두 개의 극단적으로 과장된 이름, 즉 앨릭잰더(알렉산더)와 보너퍼트(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제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알렉산더, 즉 끝없이 세계를 정복하기 갈망했던, 패배라는 것을 생각한 일이 없었던 인물. 보나파르트,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지요. 그는 상대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기 수준에 걸맞는 상대를.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 강대한 헤라클레스(에르큘)인 겁니다.”
“당신 이야기는 꽤 암시적이군요, 박사님.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니, 그냥 떠오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솜프슨 박사는 돌아가고 재프 경감은 남았다.
포아로가 물었다.
“그 알리바이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뒤집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스트레인지라는 사나이가 고집이 굉장히 세어서요.”
“그 인물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40살쯤 된 남자로 고집이 세고 자신만만하여 자기주장을 꺾으려 하지 않는 광산 기사입니다. 이 남자는 증인으로 나서겠다며, 조만간 칠레에 가야하기 때문에 빨리 끝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단호하군요.”
포아로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타입의 사람이지.”
“자기 말을 고집하여 적당히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는 7월 24일 밤 이스트본의 화이트크로스 호텔에서 캐스트를 만났다고 단호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서 심심하여 말상대를 찾고 있었고, 캐스트는 확실히 이상적인 말상대였겠지요. 그는 조금도 상대방의 방해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저녁 식사 뒤 그와 캐스트는 도미노를 했습니다. 스트레인지라는 남자는 도미노 솜씨가 뛰어난데, 그런 그가 놀랄 정도로 캐스트 역시 제법 솜씨가 좋았다는 겁니다. 이상한 게임이지요. 이 도미노라는 것은.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주 정신없이 몇 시간이고 계속합니다. 스트레인지와 캐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캐스트가 그만 자자고 해도 스트레인지가 놓아주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냥 밤중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새벽 0시 10분이 지나서야 헤어졌다더군요. 그러니까 만일 캐스트가 25일 새벽 0시 10분이 지나서 이스트본의 화이트 크로스 호텔에 있었다면, 새벽 0시에서 2시 사이에 벡스힐 바닷가에서 베티 버너드의 목을 조를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포아로가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이 문제는 확실히 다루기 어렵군요. 좀더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크롬 형사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스트레인지라는 남자는 아주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마치 악마처럼 고집불통입니다. 그런데다 어디에 약점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스트레인지가 잘못 알고 있다 하더라고, 그 사람이 캐스트가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캐스트라고 우기는지. 호텔 숙박계의 서명도 확실히 캐스트의 것입니다. 공범이 한 짓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살인광의 광기에는 공범이 없는 법이지요! 아가씨 쪽이 더 늦게 죽은 건지도 모르지만 의사는 증언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튼 캐스트가 이스트본의 호텔을 나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벡스힐에 가 닿으려면 시간이 걸릴 게 아닙니까. 14마일이나 떨어져 있으니까요.”
“문제로군요, 확실히.”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던캐스터의 살인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니까요. 피 묻은 외투, 칼, 여기에는 빠져 나갈 길이 없습니다. 어떤 배심원도 그를 무죄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점이 얼마쯤 방해가 됩니다. 그는 던캐스터에서 살인을 했습니다. 처스턴의 살인도 그의 짓입니다. 그리고 앤도버의 살인도 했습니다. 따라서 벡스힐의 살이도 그의 짓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다음은 당신이 나설 차례입니다. 크롬 형사는 오리무중입니다. 당신의 그 유명한 회색 뇌세포를 움직여 주십시오. 그가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밝혀내 주십시오.”
제프 경감은 돌아갔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포아로? 그 조그만 회색 뇌세포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포아로는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헤이스팅즈, 자네는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실제적인 이야기로는 끝났다고 여기네. 범인을 잡았고, 증거도 대부분 나왔으니까. 다만 좀더 보태기만 하면 되겠지.”
포아로가 고개를 저었다.
“사건이 끝났다고? 이 사건이? 사건은 헤이스팅즈, 이 남자일세. 이 남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기까지는 수수께끼가 마냥 깊은 걸세. 그를 잡았다고 해서 승리는 아니야!”
“그 사나이에 대해 꽤 알고 있잖은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우리는 그가 태어난 곳을 알고 있지. 전쟁에 나가 머리에 상처를 좀 입고, 간질병 때문에 제대 했으며, 머벌리 부인 집에 2년 가까이 하숙했던 것도 알고 있어.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네. 아주 현명하게 계획세운 살인을 실행했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가 어떤 믿기 어려운 바보스러운 실책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가 무자비하게 참혹한 살인 방법을 섰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리고 또 그가 자기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명이 돌아가지 않도록 배려할 만큼 친절한 사나이라는 것도 알고 있네. 만일 그가 거침없이 죽이려고 생각했다면, 그 자신의 범죄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쉬웠겠는가. 모르겠나, 헤이스팅즈, 그가 얼마나 모순 덩어리의 남자인지를? 어리석으면서 교활하고, 가혹하면서도 너그럽네. 그의 이 두 가지 성격을 융합시킬 수 있는 어떤 지배적인 인자(因子)가 없으면 안 되는 걸세.”
“그야 물론 그를 심리학적인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그렇지.”
“이 사건은 처음부터 어땠는가? 나는 줄곧 이 살인자를 알려고 애쓰고 탐색해 왔네. 그런데 보게. 지금껏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지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고 있네.”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그래, 그렇게도 설명되겠지. 하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어. 내가 알고 싶다고 여기는 게 있네. 왜 그는 이런 범죄를 저질렀는가? 왜 특히 이런 사람들을 골랐는가?”
“ABC 순서로……”
“베티 버너드는 벡스힐에서 B로 시작되는 단 한사람이었는가? 베티 버너드……나는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네. 그것은 진실이어야 해. 진실이 아니면 안돼.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느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포아로의 손이 내 어깨에 와 닿아 눈을 떴다.
포아로가 정답게 말했다.
“친애하는 헤이스팅즈, 나의 천재인 헤이스팅즈.”
이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나는 당황했다.
포아로가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렇네. 언제든지……언제든지 자네는 나의 구세주일세. 행운을 갖다 주네. 영감을 안겨 준단 말일세.”
“내가 어떻게 영감을 준다는 건가?”
“내가 자문자답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자네의 말, 아주 뚜렷하게 빛나는 듯한 말을 생각해 낸 걸세. 자네는 명백한 일을 말하는 재능이 있다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지. 내가 잊었던 것은 이 뚜렷한 것일세.”
“나의 빛나는 듯한 말이라는 것은?”
“그것은 결정체처럼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해주네.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거기에 있어. 애셔 부인에 대한 이유, 이것은 전에 언뜻 생각해 본 일이 있었지만, 카마이클 클라크 경에 대한 이유, 던캐스터의 살인에 대한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에르큘 포아로에 대한 이유…….”
“설명해 주지 않겠나?”
“지금은 안돼. 좀더 알아낼 필요가 있어. 그것은 우리 특별 수사대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을 테지. 그렇게 되면……그리하여 어떤 질문의 해답을 얻으면 나는 ABC를 만나러 갈 걸세. 우리는 마침내 대결하는 거야. ABC와 에르큘 포아로, 적과 적이.”
“그리고?”
“그리고 이야기하는 거지! 헤이스팅즈, 대화에 있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네. 프랑스의 어느 나이든 현인(賢人)이 나에게 말한 일이 있지. 말이란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발명이라고. 그리고 또 사람이 숨기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정확한 방법이기도 하네. 헤이스팅즈,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그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대화가 주는 기회에 어쩔 수 없이 털어놓게 마련이라네.”
“캐스트가 무엇을 말하리라고 생각하나?”
에르큘 포아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짓을. 그리고 그것에 의해 진실을 아는 걸세!”
< 여우를 잡아라 >
그로부터 2.3일 동안 포아로는 몹시 바빴다. 어디론지 사라지는가 하면,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거의 말을 하지 않고, 혼자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내가 과거에 발휘했다고 그가 이야기한 빛나는 말에 대한 나의 당연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들락날락거리는 그의 비밀스러운 출입에 함께 다니기를 권유받지 못했다. 이 사실은 나에게 얼마쯤 서운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 주일이 끝날 무렵 그는 나와 함께 벡스힐을 찾아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초대는 나에게만 한 게 아니었다. 우리 특별 수사대의 대원들도 모두 초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포아로의 음모에 걸려든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끝날 무렵에는 아무튼 포아로의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우선 버너드 부부를 찾아가, 그 부인으로부터 캐스트 씨가 그녀를 찾아왔던 시간과 그가 말한 대화의 정확한 내용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캐스트 씨가 묵은 호텔로 가서 그의 출발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그 질문으로 어떤 새로운 사실을 끄집어낼 수는 없었으나, 그 자신은 아주 만족해 있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바닷가로, 베티 버너드의 시체가 발견된 곳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잠시 주의깊게 모래를 살피고 동그라미를 그려 가며 돌아보았다. 그곳은 하루에 두 번씩 조수가 밀려와 씻기기 때문에 무엇을 찾아내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해 포아로의 행동은 아무리 무의미하게 보여도 언제나 분명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닷가에서 자동차를 세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걸어서 갔다. 그리고 또 이스트본으로 가는 버스가 벡스힐에서 떠는 곳까지 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모두를 <진저 캣> 카페로 데려갔다. 우리는 거기서 그 뚱뚱한 여급사 히글리 양이 날라 오는 좀 곰팡이내나는 차를 대접받았다. 포아로는 그녀의 동그스름한 복사뼈가 프랑스 인형을 닮았다고 칭찬했다.
“영국 사람의 다리는 일반적으로 모두 너무 가늘지요! 그런데 아가씨는 완벽한 다리를 갖고 있군요!”
히글리 양은 요란스레 웃으면서 그런 소리 말라고 했다. 프랑스 신사분들이 어떤지 잘 안다는 것이었다. 포아로는 그의 국적에 대한 그녀의 잘못을 지적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내가 깜짝 놀랄 만한 몸짓으로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을 뿐이었다. 포아로가 말했다.
“자, 이것으로 됐습니다. 벡스힐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이스트본으로 떠납니다. 거기서 조금 조사하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여러분이 함께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까지 호텔로 돌아가 칵테일이라도 드십시다. 그 컬튼 차는 너무 지독했으니까요!”
모두 함께 칵테일을 마시고 있을 때 프랭클린 클라크가 이상한 듯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듯합니다. 당신은 그 알리바이를 깨뜨리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가?”
“글쎄요, 참아야 합니다. 이제 잘될 겁니다. 시간만 있으면.‘
“아무튼 만족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지금으로선 제 판단에 그리 어긋난 게 없으니까요.”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제 친구 헤이스팅즈가 젊은 시절에 <진실놀이>라는 게임을 한 이야기를 해준 적 있습니다. 그것은 번갈아 가며 세 번씩 질문하는 게임인데, 그 가운데 두 개만 진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질문은 당연히 노골적이 됩니다. 그러니 처음에 반드시 진실을, 모두 진실만을 이야기한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안 됩 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미건이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실은 그 게임을 하고 싶습니다. 세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나씩만.”
클라크가 초조해 하며 말했다.
“물론 무엇이든 대답하지요.”
“네, 그러나 좀더 진지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진실을 말한다고 맹세하시겠습니까?”
그가 너무나 엄숙하게 말했으므로 어리둥절했던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정색을 했다. 그들은 모두 요구받은 대로 맹세했다.
포아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소러 그레이가 말했다.
“좋아요.‘
“어, 여성이 먼저면, 이 경우 오히려 예의바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분부터 시작합시다.”
그는 프랭클린 클라크 쪽을 향했다.
“클라크 씨, 올해 애스컷 경마에서 여성들이 쓴 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프랭클린 클라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농담입니까?”
“아니오, 결코.”
“정말로 진지한 진실입니까?”
“그렇습니다.”
클라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포아로 씨. 저는 애스컷에 가지 않았습니다만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본 인상을 말한다면, 애스컷 여성들의 모자는 여느 모자들보다 훨씬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꼴불견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주 꼴불견입니다.”
포아로는 미소를 지으며 도널드 프레이저 쪽을 보았다.
“당신은 올해 언제 휴가를 얻었습니까?”
이번에는 프레이저가 눈을 크게 떴다.
“휴가 말입니까? 8월 첫 무렵의 2주일 동안입니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경련이 일어났다. 나는 그 질문이 그의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한 일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러나 포아로는 그 대답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소러 그레이 쪽을 보았는데, 그 목소리에 조그만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긴장한 느낌으로 질문이 날카롭고 뚜렷했다.
“소러 양, 만일 클라크 부인이 돌아가셨을 경우 구혼을 받았다면 당신은 카마이클 경과 결혼했겠습니까?”
그녀는 펄쩍 뛰었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시지요? 실례예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네>입니까, <아니오>입니까?”
“카마이클 경은 저에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셨어요. 그분은 마치 딸에게 하듯 해주셨지요. 그래서 저도 그분에게 애정을 갖고 감사하고 있어요.”
“실례지만 그것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소러 양, <네>입니까, <아니오>입니까?”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오예요.”
“고맙습니다, 그레이 양.”
그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미건 버너드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핼쑥했다. 무서운 시련과 맞서고 있는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포아로의 목소리가 채찍같이 울렸다.
“미건 양, 내 수사 결과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진실을 발견하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까?”
그의 고개가 뽐내듯 뒤로 젖혀졌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미건은 진실에 대한 광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또렷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해서 나는 놀라 버렸다.
“바라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놀랐다. 포아로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미건 양, 아가씨는 진실을 바라지 않는 셈입니다만, 그러나 그것을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생각난 듯 드로워 양에게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좋아하는 남자가 있습니까?”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메리는 놀란 듯 얼굴을 붉혔다.
“오, 포아로 씨, 전……전……모르겠어요.”
그는 미소지었다.
“그것으로 좋습니다, 아가씨.”
이번에는 내 쪽을 향했다.
“자, 헤이스팅즈, 이스트본으로 가봐야겠네.”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얼마 뒤 페번시를 지나 이스트본으로 가는 바닷가를 달리고 있었다.
“자네에게 물어도 되겠나, 포아로?”
“지금은 안돼.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나서 자네는 결론을 내려주게.”
나는 다시 침묵에 빠져 들었다.
포아로는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페번시를 지날 때 그는 자동차를 세우고 성을 보고 가지고 말했다.
자동차 있는 쪽으로 돌아올 때 아이들이 둥글게 서서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옷차림으로 소년소녀단 아이들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들은 높이 목소리로 박자가 엉망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우를 잡아라
상자 속에 넣어라
놓쳐선 안 된다.
포아로가 되풀이했다.
“여우를 잡아라, 상자 속에 넣어라, 놓쳐선 안 된다!”
그리고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엄숙해졌다.
“무섭군, 헤이스팅즈.”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여기서 여우 사냥을 할까?”
“아니, 사냥할 여유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런 데서는 그리 잡힐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아니, 일반적인 영국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네. 우스운 놀이가 아닌가. 덤불 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휘이 소리치고, 그렇지? 그리고 사냥이 시작되네. 야산을 가로질러 울타리며 도랑을 넘어서. 그러면 여우도 달리지. 때로는 되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나 개가……”
“사냥개일세.”
“사냥개가 뒤쫓아 마침내 여우를 잡네. 그리하여 여우는 죽지. 아주 재빠르고 가혹해.”
“가혹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우가 즐기고 있다는 건가? 바보 같은 소리 말게. 그러나 그쪽이 좋아, 재빠르고 가혹한 죽음 쪽이. 저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는 것보다는……상자 속에 갇혀서 영원히……아니, 그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야.”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투를 바꾸어 말했다.
“내일 나는 캐스트라는 남자를 만나 보겠네.”
그리고 운전수에게 말했다.
“런던으로 돌아가 주게.”
나는 소리쳤다.
“이스트본에는 가지 않는 건가?”
“무엇 때문에? 이젠 충분할 만큼 다 알았네.”
< 포아로냐 ABC냐 > < 포아로냐 ABC냐 >
포아로와 이상한 인물, 앨릭잰더 보너퍼트 캐스트 씨의 대면에 나는 입회하지 않았다.
그는 경찰의 관계며 사건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포아로는 내무부 허가를 쉽게 얻었지만 허가가 나에게까지 미치지 못했고, 더욱이 포아로의 생각에 따르면 대면은 아주 내밀히, 두 사람만이 서로 마주앉아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아로가 그 대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해 주었기 때문에, 마치 내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그 상황을 쓸 수 있다.
캐스트 씨는 오그라들어 버린 것같이 보였다. 그 굽은 등은 한층 더 굽어 있었고, 그 손가락은 공연히 외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잠시 동안 포아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앉아서 자기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때의 공기는 부드럽고 가라앉은 듯하며 무한한 평안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긴 드라마 속의 두 적수의 회견은 확실히 극적인 순간임에 틀림없었으리라. 내가 포아로였다면 극적인 스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포아로는 현실 바로 그 자체였다. 그는 상대방 남자에게서 어떤 것을 끄집어내려고 몰두해 있었다.
마침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아니오……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루커스 씨의 뭐라던가요……아무튼 젊은 쪽 분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으면 메너드 씨 쪽에서 오신 겁니까?”
매너드 앤드 콜인은 변호사 사무소 이름이었다.
그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리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의 어떤 생각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에르큘 포아로입니다.”
포아로는 그 말을 아주 부드럽게 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지켜 보았다.
캐스트 씨는 조금 얼굴을 들고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는 크롬 형사도 말했듯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리 거만스러운 데는 없었다.
그리고 1분쯤 있다가 다시 말했다.
“네,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말투가 달라져 있었다. 흥미가 끌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포아로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편지를 주신 바로 그 사람입니다.”
곧 대화가 이어졌다. 캐스트 씨는 눈길을 떨어뜨리고 신경질적이 되어 초조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편지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 말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쓴 게 아니라면 누가 썼을까요?”
“적입니다. 나한테는 적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모두들 나한테 적의를 갖고 있지요. 경찰은……모두들……나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무서운 음모입니다.”
포아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캐스트 씨는 말했다.
“모두들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습니다. 언제나.‘
“어릴 때부터입니까?”
“아니오……아니오, 그때는 그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야심가여서, 굉장한 야심가였지요. 그래서 나에게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붙여준 겁니다.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도록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의지의 힘에 대해 말해 주고,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곧 그것을 알 수 있었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바보스러운 짓을 해서 나 자신을 어리석어 보이게 했습니다. 나는 겁쟁이였습니다. 사람이 무서웠던 겁니다. 학교에서도 지독한 꼴을 당하곤 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이 내 이름을 가지고 마구 놀려댔지요. 나는 학교에서 형편없었습니다. 게임에서도 공부에서도 또 다른 것에서도…….”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가엾은 어머니는 돌아가시기를 잘했습니다. 완전히 실망해 버렸던 겁니다. 상업학교를 다닐 때도 나는 바보였습니다. 타이프나 속기를 배울 때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보임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내가 말하는 뜻을 아실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갑자기 상대방에서 호소하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
포아로가 말했다.
“말씀하시는 뜻을 알겠습니다. 자, 어서 계속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보로 여기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무능하다는 느낌입니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훨씬 뒤……전쟁에서는?”
캐스트 씨의 얼굴이 별안간 밝아졌다.
“전쟁 때는 기뻤습니다. 전쟁에서 느낀 것은 우선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비로소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쓸모있었지요.”
그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머리를 다쳤습니다. 내가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나로서도 모르는 때가 있음을 알았지요. 실신 상태인 겁니다. 한두 번 쓰러진 때도 있었고요. 그러나 그 때문에 제대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니, 그것이 좋은 일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점원 일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돈도 벌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뒤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적은 월급이었습니다만……. 그리고 나서 어쩐지 잘되어 나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진급에서 빠져버리고 만 겁니다. 잘되지 않았지요.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정말 어려워져서……불경기가 되자 더욱 그랬지요. 사실대로 말하면 내 마음과 몸을 의탁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점원으로서 정상으로 보여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도요. 마침 그때 이 양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월급 말고도 수수료가 있어서…….”
포아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고용된 회사에서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을 압니까?”
캐스트 씨는 다시 흥분했다.
“모두가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모를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나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서면으로 된 증거가 있지요. 나에게는 어디 어디로 가라는 지시를 주는 편지며, 내가 찾아갈 사람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서면으로 된 증거라기보다는 타이프로 친 증거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큰 회사에서는 문서를 타이프로 치니까요.”
“캐스트 씨, 타이프 라이터도 식별된다는 것을 압니까? 그 편지는 모두 하나의 특정한 기계로 타이프된 겁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그 기계는 당신 것, 당신 방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일을 시작할 때 회사에서 보내 준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 편지는 그 뒤에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 자신이 쳐서 보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나에 대한 음모입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덧붙여 말했다.
“서류도 같은 종류의 기계로 쳐진 것이겠지요?”
“같은 종류지만 같은 기계는 아닙니다.”
캐스트 씨는 완고하게 되풀이했다.
“음모입니다!”
“그리고 당신 벽장 속에서 발견된 ABC 철도 안내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모두 양말인 줄 알았습니다.”
“왜 당신은 앤도버의 사람들 리스트 속에서 애셔 부인 이름에 표시를 해뒀을까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딘가부터에서 시작해야 되니까요.”
“그렇지요, 그 말대로입니다. 어딘가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 같은 뜻으로 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알았군요.”
캐스트 씨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는 떨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나는 전혀 모릅니다. 모두 잘못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범죄를 생각해봐 주십시오. 그 벡스힐에서의 사건을. 나는 이스트본에서 도미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승리에 차 있는 것 같았다.
포아로가 말했다.
“그렇지요.“
그의 목소리는 신중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하루 틀리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스트레인지 씨처럼 고집스럽고 단호한 사람이라면 틀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지 않겠지요. 당신이 말한 것을 끝내 고집할 겁니다. 그 사람은 그런 타입의 사람이지요. 게다가 그 호텔 숙박부는 당신이 서명할 때 다른 날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겁디다.”
“그날 밤, 나는 도미노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도미노를 잘한다지요?”
캐스트 씨는 그 말에 좀 놀랐다
“나는……나는……글쎄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숙련을 요하며 열중해야 하는 게임이지요?”
“네, 꽤 솜씨가 있어야 하는 게임입니다. 아주 솜씨가 있어야 하지요! 도시에 있을 때 점심 식사 뒤면 곧잘 했었습니다. 도미노 게임을 하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알게 되는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는 소리죽여 웃었다.
“나는 한 남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나한테 한 말 때문에 잊을 수가 없지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도미노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로부터 20분쯤 지나자 나는 그 남자를 평생 알고 있었던 것같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습니까?”
캐스트 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일이 나에게 변동을 일으킨 겁니다. 나쁜 변동이지요. 손에 운명이 나타나 있다는 겁니다. 자기 손을 내보이며 두 번 물에 빠지고도 살아나는 금이 있다면서. 실제로 두 번 살아난 일이 있다더군요. 그리고 나서 내 손을 보고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죽기 전에 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다는 겁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캐스트 씨는 축 늘어져 버렸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래서요?”
포아로의 눈길에는 조용한 힘이 담겨 있었다. 캐스트 씨는 그를 보고 눈을 돌렸다가 붙잡히니 토끼처럼 또다시 보았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참혹한 죽음을 한다고. 그리고 나서 웃으면서 ‘아무래도 당신은 단두대에서 죽을 것같이 보이는군요’라고 말하더니, 또 웃으며 농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 눈이 포아로에게서 떠나……여기저기로 움직였다.
“머리가……머리가 아주 아픕니다. 가끔 두통이 몹시 심하지요. 그리고 정신이 없어지며 아무것도 모를 때가옵니다.”
그는 축 늘어져 있었다.
포아로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아주 조용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살인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지요?”
캐스트 씨는 쳐다보았다. 그 눈길은 아주 단순하고 솔직했다. 모든 저항이 없어졌다. 그는 이상할 만큼 평화로워 보였다.
“그렇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내가 하는 말은 틀리지 않지요? 당신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