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눈의 티, 내 눈의 들보
눅6장 36절 ~ 45절
예수님께서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35절을 보면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 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해서 살면 복잡한 문제가 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 가운데는 원수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원수까지 포함하여 사람을 선대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려면 두 가지 방면 즉, 타인과 자신을 향해 생각해야 합니다.
1. 다른 사람에게 자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먼저 다른 사람을 향해 자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긍휼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한 번 생각해 보고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영혼 속에 체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자비를 베풀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용서를 받아본 사람만이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벌써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수십 번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진실로 거듭난 자녀라고 한다면 자신에 대해서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각각다른 잣대를 가지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행하기 위한 세 가지 실천 그렇다면 자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합니까? 자비라는 것인 배고픈 사람 밥 그릇 사 주고, 거지에게 조금 적선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자비를 구체적으로 행해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분별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개나 돼지나 이리로 상징되는 사람인지 마땅히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비판이 아닌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옳지 못한 것도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리적인 비진리에 관해 매우 강한 언어로 정죄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복음은 사람이 하나님께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분별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37절에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 뒤에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즉 비판하지 않는 것은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판사인 것처럼, 다른 사람은 마치 죄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재판관의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비판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곧 법이요, 다른 사람은 내 법에 복종하며 살아야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비판인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교만이요, 이런 정신이 자기 의를 내세워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14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면서 자화자찬을 실컷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죄인인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고 회개하는 세리를 의롭다 하시고, 자화자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물리쳐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비판과 하나님의 판단은 얼마나 다릅니까. 따라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하나님처럼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일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비판이 옳지 않은 경우가 대단히 많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따르는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신다면 그것이 무슨 용서입니까?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지옥에 보내시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받아주셔야 그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용서를 해야 합니다. 죄책을 면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마태복음 18장 23절에서 3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종이 주인에게 빚을 졌습니다. 오늘날 돈으로 120억원에 해당하는 빚입니다. 자신과 아내를 노예로 팔고, 자식들을 다 노예로 팔아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빕니다. “주인이여! 내가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떡합니까? 내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 주인은 돈이 많은 부자이기 때문에 주인에게 120억원은 대수롭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래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이 종이 빚을 탕감 받고 나오다가 자신의 친구를 만납니다. 이 친구는 자신에게 돈 500만원을 빚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붙들고 돈을 갚으라고, 갚지 않으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다 결국 이 친구를 감옥에 집어넣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다시 이 종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합니다. “너는 너의 빚을 다 갚도록 이 옥졸에게 붙이겠다!” 그래서 이 종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고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치신 후에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자비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에게 관대한 정신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곡물 상인 가운데서 선한 상인이 있었고 악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선한 상인은 곡물을 줄 때 됫박에 후히 담아서 빈 공간이 없도록 흔들어 눌러서 넘치도록 줍니다. 그러나 악한 상인은 됫박도 작게 만듭니다. 그리고 곡물도 살짝 담아서 공간도 많이 생기게 해서 줍니다. 누가 손해 보는 상인일까요? 악한 상인이 손해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 번은 거래해도 다음번엔 거래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늘 관대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처럼 관대하고, 손해 보면서 살아야 될까요?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영계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자연계의 법칙에 대해 본문 4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영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는 대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만 하는 사람은 자기도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만 하는 사람은 자기도 정죄받을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남에게 관대한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대접을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관대한 사람에게 관대한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이 법칙에 따라 행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첫째로 다른 사람을 향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나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러면 두 번째로 나 자신을 향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의 허물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끌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경은 시각 장애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을 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9절에 유대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소경이요 자신들은 눈을 뜬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네 자신의 허물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희도 소경이다. 고로 너희가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 자신의 많은 허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을 책망한다고 하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죄의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죄의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의 죄를 돕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의 죄에 문제가 있으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의 눈에 티가 있으면 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 주기 전에 내 눈에 대들보가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있다면 먼저 빼 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티는 잘 보여도 자기 눈에 대들보는 잘 안보이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외식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늘 반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대들보를 적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들보를 빼 낸 후에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허물을 다룰 때에는 겉에 드러난 외부적인 행위만을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외부적인 악이 나온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악이 쌓여 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들보를 뺄 때에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다루어야 됩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나무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나무 자체가 좋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행위 차원으로 이 행동, 저 행동을 회개한다고 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을 빼 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악한 것이 쌓여 있지는 않은지, 죄악이 쌓여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만일 악한 것이 발견된다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시고, 우리 마음속에 쌓인 악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 우리 마음속에 선을 쌓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선을 쌓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마음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인간 스스로 세운 내 기준, 내 법도에 따르면 의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기 의는 도토리 키 재기만큼 차이가 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다 죄인이요,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시면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 믿어 용서 받은 죄인이 있고, 예수 안 믿고 자기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두 종류의 죄인 밖에는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이 땅 살다가 죽은 후 지옥에 가서 자기 형벌을 받을 것이고, 전자인 경우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심판이 면제 되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부활의 몸을 입고 영생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용서 받았던, 받지 않았던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앞에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허물을 정죄하기 전에 나 자신의 대들보 같은 죄악을 먼저 생각하고 반성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선이 쌓여 있느냐, 악이 쌓여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악을 제하고 날마다 선을 쌓아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