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 후배 기자들 쫓겨나고, 비적격자 출세하고
리영희 평전/[8장] 필화와 강제해직의 수난 2010/06/02 08:00 김삼웅회사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외신부장 남재희(뒷날 장관·국회의원 역임)가 자기영역을 침범했다고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리영희의 뺨을 쳤다. 리영희도 격분해서 의자를 집어던졌다. 그러고 있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끌어갔다. 이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일본군의 비밀계획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졌다.
리영희가 외신부장을 재임한 첫 해인 1965년에 김학준·김대중·백기범·정태기·신홍범·박정자가 견습기자로 입사했다. 6명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었다. 견습기자는 편집국 외신부에서 수습 과정을 시작하는 관례대로 이들은 리영희 부장 밑에서 수습을 받았다.
그들은 머리가 좋았던 만큼, 외신부에 들어와서 접하게 되는 세계정세와 인류사적인 변혁과 사건들에 대응해 이해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어요. 그 세대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고 세뇌했던 병적인 반공주의 사상도 나의 시각 교정·의식 수정 노력에 의해서 놀랄 만큼 교정되어 곧 정상적 가치 판단을 하게 되었어.
그랬는데, 그 가운데 김대중 군은 사사건건 반공주의만 고집하는 거예요. 베트남 전쟁, 중국혁명, 제3세계 인민들의 진보적 운동에서 도도한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김대중 군만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그 낡은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자라는 의식의 틀을 깨질 못하더라고. 나는 다른 견습기자들은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우수한 저널리스트가 되겠지만, 김대중 군만은 어렵겠다고 실망했어. 그런데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될 것으로 믿었던 기자들은 1974년에 일어난 언론자유투쟁 때 앞장섰다가 다 쫓겨났어.
반대로 도저히 주체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그 김대중 기자만은 그대로 남아서 논설주간이 되고, 주필이 되고, 한국 여론을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조선일보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더군. (주석 6)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리영희는 “나는 인물을 평가할 안목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자탄’했지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생겼겠는가.
이때 견습기자였던 신홍범(<한겨례신문> 창간 주역)은 당시 ‘리영희 외신부장’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내가 리영희 교수를 만난 것은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부터였다.
당시의 리교수는 ‘리영희 외신부장님’이었다. 1966년 여름 아니 동서냉전이 격화되고 베트남전이 날로 고조되어 한국이 파병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성취하려는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중국대륙에서는 인류 제3의 생존양식을 추구하는 혁명이 실험되고 있었다. 텔레타이프를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세계가 질풍노도처럼 격동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계뉴스를 다루는 리영희 부장의 정열은 마치 신들린 사람같았다.
한밤중에도 야근자를 찾아와 함께 일하다가 새벽에 취재차를 타고 귀가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중요한 국제뉴스를 보는 관점, 뉴스의 선택, 영문기사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등 뉴스를 취급하는 리영희 부장의 자세는 매우 준엄하고 치밀하며 섬세하였다. 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과 사명은 진실을 전달하는데 있다는 것. 모든 여러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흑백논리나 이분법적인 눈으로는 그 전체상과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것, 영문번역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을 누누이 강조하고 모든 기자들에게 그것을 실천하도록 요구했다. (주석 7)
리영희를 잡으려는 음모는 신문사 내부에서도 진행되었다. 육군 첩보기관에 다년간 근무하다가 사장의 낙하산으로 입사한 이도형 기자가 어느날 리영희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이 기자가 느닷없이 조선일보 기자노동조합 결성을 나에게 제안하면서 앞장을 서라고 하더군.
하는 말이 “시국이 이렇게 혼란할 때 기자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조를 조직합시다.”
당시 한국 언론계에서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 모든 산업 직종에서 이제 막 생겨난 초창기 노동조합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던 때였으니까. ‘노동조합은 곧 빨갱이’였지. 나는 정부기관과 신문사 사주측의 합의에 따라 나를 계획적으로 모함하려는 이자의 적의를 간파했지.
그래서 나는 짐짓 “이 기자, 무슨 소리를 해, 지금 어떤 시국인데, 노동조합 같은 것을 만들자는 거야. 사상이 불온하잖아”라고 역습을 했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어. 이 사람은 그 후 친 군사독재정권적인 극우반공 언론을 업으로 삼은 잡지 <한국논단> 사장으로 용맹(?)을 날렸지. (주석 8)
주석
6) 리영희, <대화>, 333쪽,
7) 신홍범,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잠수함의 토끼’', 리영희 <동굴속의 독백>, 522~523쪽.
8) 앞의 책, 334~335쪽.
리영희가 외신부장을 재임한 첫 해인 1965년에 김학준·김대중·백기범·정태기·신홍범·박정자가 견습기자로 입사했다. 6명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었다. 견습기자는 편집국 외신부에서 수습 과정을 시작하는 관례대로 이들은 리영희 부장 밑에서 수습을 받았다.
그들은 머리가 좋았던 만큼, 외신부에 들어와서 접하게 되는 세계정세와 인류사적인 변혁과 사건들에 대응해 이해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어요. 그 세대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고 세뇌했던 병적인 반공주의 사상도 나의 시각 교정·의식 수정 노력에 의해서 놀랄 만큼 교정되어 곧 정상적 가치 판단을 하게 되었어.
그랬는데, 그 가운데 김대중 군은 사사건건 반공주의만 고집하는 거예요. 베트남 전쟁, 중국혁명, 제3세계 인민들의 진보적 운동에서 도도한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김대중 군만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그 낡은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자라는 의식의 틀을 깨질 못하더라고. 나는 다른 견습기자들은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우수한 저널리스트가 되겠지만, 김대중 군만은 어렵겠다고 실망했어. 그런데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될 것으로 믿었던 기자들은 1974년에 일어난 언론자유투쟁 때 앞장섰다가 다 쫓겨났어.
반대로 도저히 주체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그 김대중 기자만은 그대로 남아서 논설주간이 되고, 주필이 되고, 한국 여론을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조선일보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더군. (주석 6)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리영희는 “나는 인물을 평가할 안목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자탄’했지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생겼겠는가.
이때 견습기자였던 신홍범(<한겨례신문> 창간 주역)은 당시 ‘리영희 외신부장’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내가 리영희 교수를 만난 것은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부터였다.
당시의 리교수는 ‘리영희 외신부장님’이었다. 1966년 여름 아니 동서냉전이 격화되고 베트남전이 날로 고조되어 한국이 파병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성취하려는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중국대륙에서는 인류 제3의 생존양식을 추구하는 혁명이 실험되고 있었다. 텔레타이프를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세계가 질풍노도처럼 격동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계뉴스를 다루는 리영희 부장의 정열은 마치 신들린 사람같았다.
한밤중에도 야근자를 찾아와 함께 일하다가 새벽에 취재차를 타고 귀가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중요한 국제뉴스를 보는 관점, 뉴스의 선택, 영문기사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등 뉴스를 취급하는 리영희 부장의 자세는 매우 준엄하고 치밀하며 섬세하였다. 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과 사명은 진실을 전달하는데 있다는 것. 모든 여러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흑백논리나 이분법적인 눈으로는 그 전체상과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것, 영문번역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을 누누이 강조하고 모든 기자들에게 그것을 실천하도록 요구했다. (주석 7)
리영희를 잡으려는 음모는 신문사 내부에서도 진행되었다. 육군 첩보기관에 다년간 근무하다가 사장의 낙하산으로 입사한 이도형 기자가 어느날 리영희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이 기자가 느닷없이 조선일보 기자노동조합 결성을 나에게 제안하면서 앞장을 서라고 하더군.
하는 말이 “시국이 이렇게 혼란할 때 기자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조를 조직합시다.”
당시 한국 언론계에서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 모든 산업 직종에서 이제 막 생겨난 초창기 노동조합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던 때였으니까. ‘노동조합은 곧 빨갱이’였지. 나는 정부기관과 신문사 사주측의 합의에 따라 나를 계획적으로 모함하려는 이자의 적의를 간파했지.
그래서 나는 짐짓 “이 기자, 무슨 소리를 해, 지금 어떤 시국인데, 노동조합 같은 것을 만들자는 거야. 사상이 불온하잖아”라고 역습을 했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어. 이 사람은 그 후 친 군사독재정권적인 극우반공 언론을 업으로 삼은 잡지 <한국논단> 사장으로 용맹(?)을 날렸지. (주석 8)
주석
6) 리영희, <대화>, 333쪽,
7) 신홍범,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잠수함의 토끼’', 리영희 <동굴속의 독백>, 522~523쪽.
8) 앞의 책, 334~3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