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이틀째, 사려니 숲길을 걸었다. 빼곡히 늘어선 삼나무 숲, 원시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하늘이 보일 듯 말 듯 울울창창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이름부터가 우리들을 달뜨게 했다. 해설사 설명에 따르면 ‘사려니’는 제주도 말로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 불리는데 ‘살’ 혹은 ‘솔’은 신역(神域)의 산명(山名)에 쓰이는 어휘로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숲길에 들어서니 아침나절 이른 시각인데도 예비 신랑·신부 쌍쌍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3월, 순백의 드레스 차림으로 싸늘한 숲 속에서 촬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들 지금 마음같이 예쁘게 잘 살아야겠지요. 마음속 기원을 했다. 신랑들은 하나같이 자상해 보였고 그들 앞에는 그 어떠한 고난도 난관도 없을 듯 다정해 보였다.
이순(耳順)을 넘긴 우리 일행, 여인 넷은 모두 겉모습과는 다르게 저마다 지병 한둘씩을 달고 있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적은 편인 나도 몇 년 전 다친 무릎 때문에 산길을 오르는 데 걸음이 온전치가 못하다. 그래서일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건강에 좋다는 맨발걷기를 해 보겠다는 의욕이 앞섰다. 첫걸음부터 신발을 벗어 쥐었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우리일행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누가 보든 말든 우리는 당당하고 가볍게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늘그막 여인들의 작은 객기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바닥이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이 아팠다. 걷는 시간보다 앉아 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입구에서는 순한 흙이 깔려 있었는데 20여 분 걸어들어 가니 길바닥 여기저기 널린 뾰족 돌이 우리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했다. 참선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살면서 참을성 부족으로 잃거나 놓친 게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피가 날지라도 참아보자고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도 그 험한 길은 길지 않았다.
삼나무 향이 가득한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간간이 다른 팀 해설사의 설명도 귀동냥했다. 삼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자라는 사려니 숲은 식물뿐이 아니다. 대낮에 사슴이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팔색조와 참매가 포르르 나는 광경도 선물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예상치 못한 낯선 풍광, 설핏설핏 들려오는 해설사의 숲 이야기에 혼이 팔려 함께한 일행을 놓치기 일쑤였다. 이해 못할 나이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문득 여행은 이순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랑 못 맞출 것도 없다. 세상사 겪을 만큼 겪었으니 기다려 줄 줄도, 각자의 개성을 이해 할 줄도 안다. 서로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일 줄도 아는 나이가 이순이 아닌가 싶다. 그 누구도 상대를 힐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서로 공감하고 위로를 주었다. 남편을 3년 전에 하늘나라로 보낸 선배는 홀로 되고 처음 나선 나들이였단다. 가끔 노선을 이탈해도 우리는 웃었다. 그분은 신부님 어머니로 일흔 나이였지만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옷차림도 나풀나풀 봄 처녀처럼 입고 전직 유치원 선생님답게 자주 동요를 흥얼거렸다. 오륙십년 전에 익힌 동요를 차 안에서든 숲길에서든 박자와 화음을 무시하고 불러댔다.
3월의 제주 날씨는 심술을 자주 부렸다. 맑은 하늘에 금방 구름이 덮이고,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 이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곧 비를 뿌리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샤려니 숲길을 걷는 동안은 하늘의 심술도 삼나무의 피톤치드에 취했는지 바람도 비도 없었다. 조천읍 교태리의 물찻오름을 지나 한남리의 사려니 오름까지는 우리가 걸어내기에는 너무 멀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약 4km 만 걷고 돌아섰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단연 웃음이다. 연이어 벌어진 크고 작은 실수 하나하나가 미움 대신 웃음이 되었다. 제주에 머무는 삼일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주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왕좌왕 웃음판이었다. 공항에서 이곳 제주에 살고 있는 딸의 집까지 택시를 탔었다. 기사가 행선지 안내 내비게이션 작동이 안 된다면서 마을 입구 공원 풀밭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딸은 우리를 기다리느라 속 터져 했지만, 얼떨결에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우리 넷은 딸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풀밭에 퍼질러 앉아 행운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네잎클로버가 지천이다. 꽃집을 운영하는 형님은 마구잡이로 뜯는가 싶더니 딸의 집 식탁을 장식하는 멋들어진 플로리스트로 우뚝 섰다.
샤려니 숲을 다녀온 날 저녁에 그 꽃을 앞에 두고 딸이 차려주는 회를 먹으면서 멋진 여행을 자찬하는 건배를 했다. 볼그레한 연어회와 담녹색 잎을 깔고 뽀얗게 피어난 네잎클로버 꽃이 앙상블을 이루었다. 황홀한 밤이었다. 그리고 낮에 사려숲길을 걸으면서 다짐했던 결의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건강을 위해 맨발걷기를 빠뜨리지 말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존중하고 아끼는 벗이 되자. 일 년에 두 번, 봄가을에 꼭 이곳 제주도를 찾자고 손가락을 걸었는데 빈다짐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2021.05)
첫댓글 '사려니 숲' 좋지요.
이름도 아름답고 풍광도 근사하고.
저도 제주도 가면 한번씩은 꼭 들르는 곳이랍니다.
즐거우셨겠어요.
네.회장님 제주는 참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란 걸 갈 때마다 느낍니다.색달해변도 좋았습니다.
부럽습니다. 여행이 부럽냐고요? 아닙니다요. 나무잎 흔들리는 소리에도 까르러 웃는
60대 아줌씨들의 웃음소리가
부럽습니다.
네. 선생님 감성이 안 늙으니 모순이지요? 코로나사태가 빨리 끝나서 우리협회 산행을 함께 할 날 손꼽습니다.부디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