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사53:4-9고전1:21-24)-임영수 목사
오늘은 사도신경 두 번째 명제 예수님에 관한 내용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대 목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적인 형틀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 형 틀이 널리 사용되었던 국가들은, 이집트, 페니키아, 칼타고, 페르시아, 앗시리아, 인도, 그리 스, 로마 등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적인 형틀은 아닙니다. 본래 유대적인 사형집행 제도는 목매다는 것 (민25~ 4), 불살라 죽이는 것 (레20:14), 돌로 쳐 죽이는 것 (레20:27)등입니다. 유대 관습에서 사람 을 나무에 달 때에는 죄지은 사람을 죽인 후에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신21:22~23)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신21:23) 밤 동안 반드시 나무에 달린 자를 끌어내려 땅에 묻었습니다. 유대 관습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 (신명21:23)였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무섭고, 수치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 가형은 주로 정치법, 반사회적인 범에게 집행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로마 황제와 로마에 반역한 죄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보고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가 전 하는 십자가에 관한 기사에서는 예수께서 운명의 순간에 하나님과 단절로 깊은 고통을 느끼 셨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 때에 총독의 군인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로 들어가서,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힌 다음에,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습니다.
얼마동안 예수를 희롱한 다음에 다시 예수가 입었던 옷을 갈아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 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골고다(해골)라는 곳에 이르러,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 께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 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습니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 시 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는데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운명하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났 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아리마대 출신으로 요셉이라고 하는 한 부자가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 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고,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 새 무덤에 모신 다음에, 무덤 문에다 큰 돌을 굴려 놓고 갔습니 다." 이상이 마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율법에 충성을 기울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와 잘 계몽된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 어리석게 여 겨지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사도신경 고백에서 예수와 관련된 이 명제를 빠트리지 않고 고백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한 인간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십자 가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저는 십자가를 통해 비춰지고 있는 그 신비스러운 능력과 지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 다. 만약 저의 눈에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었다면, 이 시간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 다. 저에게서 십자가는 희망의 문이며, 저의 미래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저의 삶은 희망 이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희망이며, 인류의 미래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생의 역사와 전기적인 면에서 그가 누구였으며, 그가 무엇을 목 적으로 하고 살았는가? 를 말해주는 확증의 표식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나사렛 예수가 십 자가에 처형된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보증된 예수의 역사에 속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가 완전히 인간이었다는 것은 이미 예수의 탄생에서 확증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의 십 자가 사건에서 예수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생을 살았던 인물임을 더욱더 확증해 줍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그 죽음에서 그의 인간성과 인간 존재 자체가 엄숙히 궁극적으로 고려된다."고 했습니다.
이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의 과정을 빠트리지 않고 연대하여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예수의 삶의 역사 의 절정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어떻게 인간과 연대 가운데서 살아가셨는 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 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이 겪은 모든 고난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경험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타적인 사람일 수록 다른 사 람과의 연대 가운데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합니다. 어린아이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 린 아이가 아플 때 함께 아픔을 느끼고, 아이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합니다. 그것은 아이와 사랑의 연대감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인간과 연대에서 살아가신 예수의 생의 역사에서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어떤 생을 살아 가셨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증해주고 있 습니다.
하인리히 포겔(Heinrich Vogel)은 이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없는 자리가 어디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만 있는 병동, 아우슈비치와 같은 집단 수용소, 죽음의 가스실, 죽음을 기다리며 서있는 감옥의 행렬,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히로시마의 희생자들, 혹은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다른 자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 상에서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는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그 인간이 하나님 자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달려있는 곳이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의 역사에서 그 누구나 이 절망의 자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의 자리며, 죽음의 자리 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인간 존재의 삶과 자신을 연대시키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과 단절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 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삶의 역사의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연적이거나 돌발적이거나 예정된 것 이라기 보다 인간 예수의 삶의 역사의 마감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해의 자리며, 속죄의 자리, 새로운 희 망의 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여의사가 의과 대학생 시절부터 호기심에서 복용하던 마약이 나중에는 완전히 습관이 되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문의가 되고 나서 점점 마약으로 깊이 빠져 들 어가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어느 비오는 날 저녁 강가 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죽음을 체험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 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잠시 후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임하면서 자신이 마 약의 힘에서 풀려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평생을 마약 중독자 갱생을 위해 헌 신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절망과 단절,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한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부활의 아 침이 내다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단정해 버 리거나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비젤은 그 절망 의 자리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 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고난에서 찾은 해답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은 그 자리를 피해갈 수 없습 니다. 인간의 삶의 그 어둡고 절망적인 부분을 체험해가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깊은 허무와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유토피아와 허무주의 사이에 놓여있는 매우 좁은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유토피아나, 허무주의라는 허구적인 생의 환상 의 길에서 가 아닌 , 십자가의 좁은 길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 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로흐만 교수는, 십자가는 유일한 우리의 필요이며, 우리의 희망 을 세우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희망은 권력의 사랑 안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능력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희생적 삶, 자기를 내놓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인간의 현실적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드리고 체념 가운 데서 살아가는데서 십자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삶은 악, 불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고, 의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의 삶, 그리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의 삶과 자신을 연대시키는데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가 계속해서 불의에 대해 저항해 오고, 디아코니아를 포기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에쿠아돌의 로메로 신부는 매우 사색적이며, 독서를 즐기며, 조용히 살아가는 명상적인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그 지역을 담당하는 주교직 책임을 맡아 현실에 동참했을 때, 그의 앞에 전개된 세상은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정의, 공 의, 사랑,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는 군사 독재 치하에서 무참히 죽어가며, 고통당하는 민중들 과 함께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암살되었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희망 이며, 미래입니다. 성 금요일은 인류 역사의 동터오는 부활의 새 아침을 알리는 거룩한 날입 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반드시 죽 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잠깐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예 수의 하나님께 복종의 삶, 헌신의 삶, 사랑의 삶의 마지막 마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서 그의 삶을 끝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인간 의 마지막 것까지 감수하심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 고 죽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 이상 더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자신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 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인간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 인가를 모른 다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 의 생각대로 고상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고, 도적으로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절망의 자리는 우리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 나 있다는 것, 우리는 결국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는 인간의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이 허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십자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사 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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