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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배규택
시보네 에세이 33
금계에 흐르는 청렴의 물결
황준량이 남긴 거룩한 유산
— 풍기가 낳은 조선 최고의 청백리,
퇴계의 수제자 금계선생 —
1517(중종 12) ~ 1563(명종 18) ·
조선 중기 문신·학자·목민관
Ⅰ. 프롤로그 :
소백산이 품은 황금 닭의 꿈
풍기읍 금계,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길지라 전해지는 이 마을에서
1517년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가 훗날 호(號)를 '금계(錦溪)'라
정한 것은 단순히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향 소백산 자락의 맑은 물과
그 정기를 몸속 깊이 간직하고,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고향의
이름을 욕되지 않겠다는
지극한 애향의 선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황준량.
자(字)는 중거(仲擧), 본관은 평해입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18세 때 향시 책문에서
지은 글은 고관들이 무릎을 치며
탄복할 정도의 명문이었다고 전합니다.
1537년 생원시, 1540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면서
24세의 나이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조선의 역사가
기억하는 이유는 총명함이나
빠른 출세 때문이 아닙니다.
20여 년의 관직 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퇴계 이황이 쓴 행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염습에 쓸 만한 천이 없었고,
관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
퇴계 이황, 『금계행장』
20년 넘게 관직에 있었던
사람의 마지막이 이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계 황준량을
풍기가, 조선이, 그리고
역사가 기억하는 이유입니다.
Ⅱ. 퇴계의 수제자
학문으로 다진 뿌리
1. 사제지간을 넘은 심우의 관계
황준량은
퇴계 이황의 대표적인 문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섰습니다.
퇴계 자신이 "처음 선생 이현보의
문하에서 공을 알게 되어
교유함이 깊고 가까워져서,
어리석고 듣지 못한 것을
공으로 인해 깨우친 바가 많다"라고
고백했을 만큼, 황준량은
스승에게서 배우면서 동시에
스승에게도 가르침을 주는
진정한 학문적 동반자였습니다.
황준량은 퇴계에게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를 꼼꼼히 배우며
성리학의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그는 바쁜 공무의 틈바구니에서도
주야로 독서와 학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이
"과로하면 병이 난다"고 걱정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글을 읽어 학문하는 것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고
기를 함양하는 것이니,
어찌 독서로 인하여
병이 날 수 있겠는가.“
학문을 수양의 도구로 본 그의 관점은,
그대로 목민관으로서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배움이 삶이 되고, 삶이 다시
배움이 되는 선순환,
그것이 황준량의 학문관이었습니다.
2. 퇴계가 행장을
직접 쓴 단 일곱 사람
퇴계 이황이
손수 행장을 써 준 인물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단 일곱 명에 불과합니다.
명종 임금, 퇴계의 선친,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그리고 금계 황준량.
이 일곱 명의 명단을 보면
황준량이 퇴계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황준량이 47세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퇴계는 아끼던 제자를 잃은 슬픔을
이루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을 잃고
"하늘이 나를 망쳤다"라고
통곡한 것처럼,
퇴계도 손수 제문을 짓고 행장을 쓰며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습니다.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요,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다.“
퇴계 이황의 평가 이 한마디는
황준량이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풍기와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서의
위상을 지녔음을 웅변합니다.
그것이 풍기 사람들이
그를 고향의 가장 큰 자랑으로
기억하는 까닭입니다.
3. 역사를 기록한 손
실록 편찬의 참여
황준량은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아
호조좌랑 시절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고,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조선의 공식 역사를 기록하는
이 작업은 최고의 학문적 신망이 있는
문신에게만 허락되는 영예였습니다.
Ⅲ. 청렴의 화신(化身)
세 고을을 살린 목민관
황준량은
평생 중앙의 권력 다툼보다
지방의 목민관 자리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의 목민관 이력은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세 곳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세 고을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책과 지역민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쉽니다.
1. 신녕현감 시절
부채(빚) 문서를 불태운 공직자
1551년(명종 6) 신녕현감으로
부임한 황준량이 마주한 것은
역대 전임자들이 쌓아놓은
무리한 부채 문권의 더미였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관아에 지고 있는 빚의 기록으로,
실상은 수탈의 흔적이었습니다.
황준량은 자신의 절약과 행정 효율화로
이 빚을 메운 뒤, 관련 문서들을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이 일은 훗날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모범 사례로 기록됩니다.
다산은 "전임자들이 쌓아온
무리한 부채를 스스로의 절약과
효율화로 메우고 문서를 소각했다"고
황준량의 행적을 명시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목민관의 으뜸 덕목으로
청렴을 강조한 다산이 직접
그 이름을 남긴 것은,
황준량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또한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는 데
힘써 굶어가는 백성들을 소생시켰으며,
학문 진흥을 위해
백학서당을 창건했습니다.
이 서당은 훗날 백학서원으로 발전하며,
1678년 황준량이 직접 배향됩니다.
2. 단양군수 시절
5천 자 상소, 단양의 하늘을 열다
1557년(명종 12) 단양군수로
부임한 황준량이 마주한 단양은
그야말로 폐허에 가까웠습니다.
중첩된 세금과 공물의 부담으로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고 있었고, 고을 자체가
사라져가는 형국이었습니다.
황준량은 짧은 시간 안에
단양 고을 전체의 현황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그 결과를 무려 5,000자에 달하는
방대한 상소문 「단양진폐소」에 담아
임금에게 올립니다.
이 상소문은
단순한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폐단의 원인, 구체적인 수치와 근거,
그리고 실현 가능한
복수의 해결 방안을 조목조목 제시하여
임금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논리적으로 구성된 명문이었습니다.
단양진폐소의 결과
세금 부담 완화:
단양 고을은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면제받는 특별한 혜택을 얻었습니다.
민생 안정:
떠돌던 유랑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공동체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 기반 재건:
단양 향교가 이전·중수되어 학문과
교육의 토대가 다시 마련되었습니다.
정신적 복원:
학행이 높은 인물들을 사우에 제향하여
고을의 정신적·도덕적 기틀을
되살렸습니다.
목숨을 걸고 올린 이 상소 하나로
단양은 10년간의 숨통을 얻었고,
떠돌던 백성들이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의 배부름보다
백성의 끼니가 먼저"라는
그의 신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5,000자의 문장으로
증명된 행동이었습니다.
3. 성주목사 시절
교육으로 고을의 정신을 바꾸다
1560년 성주목사로 부임한 황준량은
자신의 역량을 쏟아부어 성주를
교육의 고장으로 탈바꿈시킵니다.
그가 성주에서 남긴
교육 관련 업적만 열거해도
한 페이지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사업명 내용 및 의의
이 모든 것이 불과 3년 남짓의
성주목사 재임 기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황준량에게 고을을 다스린다는 것은
단순히 행정을 처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땅과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Ⅳ. 목숨을 건 직언(直言)
강직한 언관(言官)의 기개
황준량의 청렴함은
개인적 청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강직한 언관으로서,
임금에게 직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
임금을 정면으로 질타하다
1550년 병조좌랑 재직 중
황준량은 불교 폐단을 지적하는
「청혁양종소」를 올립니다.
請革兩宗疏 (청혁양종소)
삼가 생각하건대 불교의 학문은
옛 성왕의 법이 아니라
외래에서 들어온 가르침입니다.
옛 우리 왕조의 조종들께서는
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억제하여
백성의 마음을 바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선종과 교종 두 종파를 세우고
승과 시험을 열어
승려들이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단의 가르침이
점차 백성의 마음을 미혹시켜
성현의 가르침을 무너뜨릴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 종파를 폐지하시고
승과를 없애어
학문의 정통을 바로 세우소서.
이 상소문은
단순한 종교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상소의 날은 임금을 향해
직접 겨눠져 있었습니다.
그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
고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장차
무엇을 우러러보겠습니까"라고
임금을 정면으로 질타했습니다.
대신들이 방관하고
임금이 말로만 개혁을 약속할 뿐
실천하지 않자, 그는
"올바른 도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제왕의 강학에 무슨 귀함이 있겠습니까“
라고 거침없이 몰아쳤습니다.
이 직언 때문에
뒷날 청탁을 거절당했던
언관의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황준량은 스스로 외직을 자청하여
신녕현감으로 떠납니다.
불의와 타협하느니 변방의
목민관이 낫다는 선택이었습니다.
Ⅴ. 흥학(興學)의 사람
교육으로 백성을 일으키다
황준량의 관직 생애를 통틀어
가장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고을에 부임하든
반드시 교육 기관을 세우거나
중수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퇴계의 서원 교육론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관학(향교)과
사학(서당·서원)을 함께 진흥시키는
균형 잡힌 교육 행정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믿었습니다.
과거 합격을 위한 교육은 지식을 쌓지만,
인격을 기르는 교육은 세상을 바꾼다.
그래서 그는 제도와 규정에 얽매인
관학에만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위기지학, 즉
'자신을 위한 배움'을 실천하는
서원·서당 교육에
더 깊은 열정을 쏟았습니다.
특히 소수서원 건립에도
인연이 깊습니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울 때부터
깊은 관심을 두었고,
사촌 황빈이 조미 75석을
희사하여 서원 운영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소수서원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고 응원하면서,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마다
그 정신을 이식했습니다.
Ⅵ. 비움의 미학
떠남으로써 영원해진 이름
1563년(명종 18) 봄,
황준량은 성주목사직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풍기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는 노년에 죽령 아래 금계에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짓고,
퇴계처럼 학문을 강론하며
여생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고향 땅에서 책을 읽으며
늙어가고 싶다는 꿈을 시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봄이면 한 초가집에서 돌아가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늙으리."
황준량, 귀향의 꿈을 읊은 시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귀향길에 예천에서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둡니다.
그 순간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책 몇 권과 낡은 옷가지뿐이었습니다.
퇴계는 그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며
직접 행장을 썼습니다.
"슬프다. 금계가 이에 이르렀는가.
성주에서 풍기까지 몇 리나 되기에
연로에서 죽다니.“
퇴계 이황, 『금계행장』
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에,
오히려 역사 위에
가장 눈부신 이름을 남겼습니다.
20여 년의 관직 생활 동안
관아의 물건은 실 한 오라기도
사사로이 쓰지 않았던 그의 청렴함은,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채우는
'비움의 미학'으로 후세에 전해집니다.
Ⅶ. 고향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
금선정과 욱양서원
황준량이 세상을 떠난 뒤,
고향 풍기는 그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뜻을 계승하고 기리는 공간들이
금계 일대에 하나씩 세워집니다.
1. 금양정사(錦陽精舍)
황준량이 생전에 고향 금계에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금양정사는 그가 죽은 뒤
1566년(명종 21) 완공됩니다.
퇴계 이황이 직접 풍기군수 조완벽에게
이 정사를 잘 보전해달라고 청원했을
만큼 그 의미가 각별한 공간입니다.
2. 욱양서원(郁陽書院)과 욱양단소
1662년(현종 3) 금양정사 곁에
욱양서원이 건립되어
퇴계 이황을 제향했고,
1690년 황준량이 추가로 배향됩니다.
스승과 제자가
고향 금계의 같은
서원에 함께 모셔지는 것,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제의 마무리가 있을까요.
욱양서원은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철거되었으나
욱양단소(郁陽壇所)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3. 금선정(錦仙亭)
1781년(정조 5) 풍기군수
이현일과 후손, 향인들이 황준량을
기념하기 위해 금계리에
금선정(錦仙亭)을 세웁니다.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의
이 정자는 금선계곡의 빼어난 경치와
어우러져 지금도 풍기의 아름다운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곳을 흐르는 맑은 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 물가에 금계 황준량이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Ⅷ. 에필로그 : 금계(錦溪)에 흐르는
그 물결은 지금도
오늘날 우리는
물질의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황준량이 보여준 '비움의 미학'은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목민관의 자리는
권력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백성의 아픔을 짊어지는 자리임을
그는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동시에
우리 고장 풍기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주세붕이 소수서원과 인삼 재배로
풍기의 물질적·정신적 토대를 닦았다면,
황준량은 그 위에 '청렴'과 '흥학'이라는
정신적 기둥을 세웠습니다.
한 고을에서 이 두 인물이 나왔다는 것,
그것 자체가 풍기라는 땅이 품은
깊은 기운의 증거입니다.
소백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금계리의 들판을 지날 때, 우리는
그 바람 속에서
선생의 숨결을 느낍니다.
그 맑은 숨결이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자리를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가?"
청렴이라는 맑은 물결은 지금도
금계(錦溪)에 흐릅니다.
그 물결이 우리 시대에도
이어지길 바라며.
글쓴이 노트
자랑스러운 우리 고장 출신 목민관,
‘청렴(淸廉)’과 ‘흥학(興學)’이라는
정신적 기둥을 세운 금계 황준량의
내면을 살펴봅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닦는 학자로서,
독서를 통해 평생 수양을 이어가며
청빈하면서도
고결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그의 시어를 문헌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하고
해석해 보았습니다.
이 글이 그분의 마음을 기리는
작은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문에 다 싣지 못한
주옥같은 글을 노트합니다.
감사합니다.
金陽精舍記 (금양정사기)
금양정사에 대해 기록한 글
山川之勝 (산천지승)
得於天而成於人 (득어천이성어인)
人得其地 (인득기지)
則可以養性而讀書 (즉가이양성이독서)
산천의 아름다움은
하늘이 내리고 사람이 완성하는 것이다.
사람이 좋은 땅을 얻으면
그곳에서 마음을 기르고
책을 읽을 수 있다.
人之爲學 (인지위학)
非但在於章句 (비단재어장구)
亦在於觀山水 (역재어관산수)
以養其胸次也 (이양기흉차야)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글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과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기르는 데에도 있다.
乃構精舍 (내구정사)
名曰金陽 (명왈금양)
朝對靑山 (조대청산)
暮聽流水 (모청류수)
이에 정사를 짓고
이름을 금양이라 하였다.
아침에는 푸른 산을 마주하고
저녁에는 흐르는 물을 들으며 지낸다.
竹嶺記 (죽령기)
소백산맥의 고개 죽령(竹嶺)을
지나며 쓴 기문
嶺以竹名 (영이죽명)
蓋其山多竹 (개기산다죽)
風來則聲 (풍래즉성)
如清琴之響 (여청금지향)
이 고개를 죽령이라 부르는 것은
산에 대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맑은 거문고 소리처럼 울린다.
登其嶺 (등기령)
則群山在下 (즉군산재하)
白雲在上 (백운재상)
天地開闊 (천지개활)
그 고개에 오르면
여러 산이 아래에 있고
흰 구름은 위에 떠 있다.
천지가 넓게 열린다.
行旅往來 (행려왕래)
莫不駐足 (막불주족)
而歎其勝 (이탄기승)
길 가는 사람들마다
걸음을 멈추고
그 경치를 감탄한다.
然山川之勝 (연산천지승)
在乎人心 (재호인심)
그러나 산천의 아름다움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금계집』 詩
曲折隨淸澗 (곡절수청간)
縈回度斷橋 (영회도단교)
凍雲生石竇 (동운생석두)
寒雪積松梢 (한설적송초)
石勢鋪筵古 (석세포연고)
山形列障高 (산형열장고)
春來歸草屋 (춘래귀초옥)
漁樵老此曹 (어초노차조)
휘어 굽어 맑은 산골 물을 따라가고
돌아 돌아 끊어진 다리를 건넌다
언 구름이 바위 굴에서 피어나고
찬 눈이 소나무 끝에 쌓인다
바위는 자리를 펼친 듯 예스럽고
산은 병풍처럼 높이 둘러섰다
봄이 오면 초가집으로 돌아가
어부와 나무꾼처럼 늙으리라
上疏文 계열 글
官以民爲本 (관이민위본)
棄之至此 (기지지차)
則官何用哉 (즉관하용재)
관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거늘
그들을 이 지경으로 버려두고서야
관은 있어서 무엇하랴.
次退溪元日見寄之作
(퇴계가 새해에 보내온 시에 차운하다)
餞臘迎春欲曉天 (전랍영춘욕효천)
山齋獨坐意茫然 (산재독좌의망연)
行臨蘧瑗知非歲 (행림거원지비세)
已到鄒軻不動年 (이도추가부동년)
聖處工夫難下手 (성처공부난하수)
頭邊光景劇奔川 (두변광경극분천)
何緣免被他歧惑 (하연면피타기혹)
섣달을 보내고 봄을 맞는 새벽
산속 집에 홀로 앉아 마음이 아득하다
거원이 허물을 알았던
나이가 가까워지고
맹자가 말한 부동심의 나이에 이르렀다
성인의 경지를 배우는 공부는 어렵고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다
어찌해야 세상의 미혹을
벗어날 수 있을까.
燈夕有感
(정월 대보름 밤의 감회)
去年燈夕丹丘郡 (거년등석단구군)
二樂樓上忝先登 (이락루상첨선등)
星篝火樹粲文光 (성구화수찬문광)
酒徒詞客多風稜 (주도사객다풍능)
笙歌動塵沸寥廓 (생가동진비요곽)
豪吟縱醉何瞢騰 (호음종취하몽등)
今年燈夕錦水村 (금년등석금수촌)
少院閉門風露凝 (소원폐문풍로응)
지난해 대보름에는 단구 고을에서
이락루에 올라 풍류를 즐겼는데
등불은 별처럼 빛나고
시인과 술꾼들이 모여 호탕하였다
풍악이 울리고 시를 읊으며 취했는데
올해는 금수촌에서
문 닫힌 작은 집에
바람과 이슬만 가득하다.
感古(옛 일을 생각하며)
天意茫茫未可原 (천의망망미가원)
乖張好惡孰讎恩 (괴장호오숙수은)
芝蘭九畹蒔難茂 (지난구원시난무)
荊棘千林剪更繁 (형극천림전갱번)
하늘의 뜻은 아득하여 알 수 없고
좋고 싫음의 인연도 알기 어렵다
지초와 난초는 잘 자라지 못하는데
가시덤불은 베어도 더 무성해진다.
寄金重遠遊俗離山
(속리산을 유람하는 김중원에게)
遊食桑門盡屬厭 (유식상문진속염)
書生攻苦只虀鹽 (서생공고지제염)
庠田量出知多少 (상전량출지다소)
不比從前歲取廉 (불비종전세취렴)
절에서 놀며 사는 삶은 싫고
서생은 절인 채소로 공부하며 산다
학전에서 나오는 곡식이 얼마인지
해마다 잘 살펴 백성을 보살피라.
山居(산중 생활)
山深人不到 (산심인부도)
雲起石門開 (운기석문개)
終日看松色 (종일간송색)
清風滿客懷 (청풍만객회)
산이 깊어 사람 오지 않고
구름이 일면 돌문이 열린다
종일 소나무를 바라보니
맑은 바람이 마음에 가득하다.
秋日(가을날)
秋山明夕照 (추산명석조)
寒水帶孤舟 (한수대고주)
世事隨流水 (세사수유수)
悠悠萬古愁 (유유만고수)
가을 산에 석양이 밝고
찬 강물에 외로운 배 떠 있다
세상일은 흐르는 물 같고
끝없는 세월의 근심만 남는다.
山齋夜坐
(산재에서 밤에 앉아)
夜靜松風細 (야정송풍세)
山空月影寒 (산공월영한)
書聲驚宿鳥 (서성경숙조)
人與白雲閑 (인여백운한)
밤 고요하고 솔바람 가늘며
빈 산에 달빛 차갑다
책 읽는 소리에 새가 놀라고
사람은 흰 구름처럼 한가롭다.
春日山居(봄날 산속에서)
草色連村遠 (초색연촌원)
溪聲入竹門 (계성입죽문)
閑居無俗事 (한거무속사)
長日對雲山 (장일대운산)
풀빛은 마을까지 이어지고
시냇물 소리는 대문으로 들어온다
한가로운 삶에 속된 일 없으니
긴 날 구름 낀 산을 바라본다.
山路(산길)
石徑苔痕古 (석경태흔고)
林深鳥語閑 (임심조어한)
行人忘世事 (행인망세사)
心在白雲間 (심재백운간)
돌길에는 오래된 이끼
깊은 숲에는 새소리 한가롭다
길을 걷다 세상일을 잊고
마음은 흰 구름 사이에 있다.
自述(자술)
貧居無俗事 (빈거무속사)
松竹自淸風 (송죽자청풍)
一榻看山色 (일탑간산색)
悠然意不窮 (유연의불궁)
가난한 집에 속된 일 없고
소나무와 대나무에 맑은 바람 분다
평상에 앉아 산빛을 보니
마음이 끝없이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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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황준량 선생님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제가 선생님의 인품과 선비 정신을
자세히 작성한 프롬프트로
선생님의 존영을 만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