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己亥) 선조 묘소 답사 ■
2019년 11월 12일 然堂 두환, 東谷 재원, 德山 계춘, 翠山 수환, 錦峯
인환, 草兮 종삼, 一丁 두환, 竹軒 백, 栢江 성록 등 9명은 9시 관산읍 방촌리 출발~보성군 벌교~고흥읍 ~포두면~동일면 내나라도~봉래면 외나라도 예하리~점심식사~포두면 옥강리~고흥읍~보성군 벌교~ 장흥군 장평면 율곡마을 등을 이동하면서 20세 훈도공 魴 묘소, 22세 음선무랑공 廷佑 등 이하 5位 단소와 24세 世弘公 등 이하 3祖 묘소, 20세 양곡공 鱣 묘소 등 3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1.훈도공(20세 魴, 1532~1592)
1) 훈도공의 행장(1999년 기묘보 지장록 p 97 충의록) 내용
생원 晉秀의 五子요, 승문원습독 由亨의 孫子다. 천자(天姿)가 영오(潁悟)하고 才華가 出群하여 經書와 史記에 널리 通하였으며 더욱 실천하는데 독실하였고 文學과 德行이 道內에 알려져 道伯(관찰사)의 추천으로 興陽의 鄕黨訓導가 되어 고을의 子弟들을 잘 가르쳐 敎化가 行成되었고 文行과 碩德이 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本郡 斗院에서 그대로 살게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 임금이 義州 龍灣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忠武公 李舜臣이 한산도에다 陣을 치게 되니 公이 奮然히 말하기를 임금이 피란길에 오른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하된 자 어찌 가히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살기를 도모하리오. 곧 家童 백여명을 거느리고 忠武公의 陣營에 달려가니 忠武公이 그 忠勇을 가상하게 여겨 公으로 하여금 本郡의 원과 더불어 軍兵을 거느리고 國島(외나라도)의 한쪽을 담당케 하였다. 本郡원이 규율을 잃음에 곧 아뢰어 파면되고 公이 홀로 國島를 지키었는데 그때 적선이 海港에 가득하고 한산도 싸움에 敗하니 國島의 陣營이 孤立되고 군사도 적었으며 또한 밖으로부터 援兵이 없어 全軍이 陷沒하였고 彈丸이 비처럼 쏟아져 몸에 완전한 곳이 없었으나 눈빛은 횃불 같아 꾸짖기를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니 賊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칼로 쪼개대니 공이 드디어 害를 당하였다. 卒兵이 그 상황을 달려가 告하니 그 아들 主簿 德男이 屍體가 쌓여 있는 속에서 뼈를 거두어 國島에 葬하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이 "魏將軍의 墓"라고 한다.
훈도공의 배(配)는 기묘초보부터 누락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중간에 화재로 가첩(家牒) 등 소장문서를 잃어 확인되지 않는다.
백강께서 문중어르신들을 모시고 뜻깊은 일을 하셨네요
수고 많으셨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