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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원문보기 글쓴이: 달라이 라마
안녕하세요. 전 경산코발트광산유족입니다. 카페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경산코발트광산 게시글을 보고 왔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경산코발트광산과 관련된 괴담들이 많이 나오던데 우리 경산코발트광산은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인권유린의 실제 현장입니다. 대부분의 기록은 은폐하거나 폐기하였지만 남아있는 자료들만 근거로 해도 수천명의 민간인이 한국전쟁직후 군,경에 의해 아니 좀더 확실히 말하면 국가에의해 어떠한 법절차도 없이 학살된 곳중 한곳이 바로 경산코발트광산입니다.
살에 살이 붙어 좀더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장소로 안내되기도 하지만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역사적인 인권유린의 장소이며 장차 인권 평화의 공원으로 길이 보존하고 후세에 알려서 이땅에서 두번다시는 전쟁으로 인하여 인권이 유린 당하는 일이 없도록 역사 평화공원으로 조성 돼어야할 뼈아픈 역사의 장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이 혹 경산코발트광산을 방문하시더라도 무고한 희생자들의 한을 생각해주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문하신다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아울러 경산코발트광산을 방문하실때는 반드시 낮에 방문하시고 혼자 방문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아래는 2007년도 기사입니다.. 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아예 조용하죠...ㅠㅠ
경산.
경상북도 경산시가 행정구역상 위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경산에... 폐 코발트광산에... 그 갱도 안에 다녀왔습니다.
그 어둠, 그 뼈 시림과 핏빛의 지하수 속에서 얼마나 참담함을 느꼈는지... 생각했습니다.
2001년 7월
초록의 포도가 한창이던 때이른 더위에 경산으로 향했습니다.
하루 전에 내린 비로 하천의 물은 불어 있었고... 하늘은 푸르렀습니다.
단지 한국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이념을 이유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례들을 모아
피해 실태와 사후 조치에 대해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개월 정도 지난
1950년 7월 초에서 8월 초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산42-1번지 일대
폐광산 수직갱도와 인근 골짜기에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과 청도지역 보도연맹원 약 3,500명을 군경이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현재 수평갱도 상하 2개소와 대원골 골짜기에 유골 수백 구가 방치되어 있으며
이중 일부를 연세대 법의학 팀에서 감식한 결과 1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남자의 유골로
총상흔, 둔기에 의한 외상흔, 화염흔 등이 보이고 있다고 감정함.
상기의 내용이 알고 있는 전부로
전라남도 함평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 사건과 고양의 금정굴 사건
강화도사건 그리고 경산의 코발트광산과 대원골 학살사건 현장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함평과 고양, 그리고 강화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개발에 따라 현장 보존이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경산은 달랐습니다.
경산 시내에서 유가족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든이 넘은 새댁 할머님.
결혼하고 하룬가 이틀인가 부부의 연을 맺고
끌려가 소식이 없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든이 넘은 새댁은...
" 남편이 저기 있는데... 내가 어찌 이곳을 떠나겠느냐..."고 울먹였습니다.
" 남편의 사체라도 수습하고 젯상이라도 차릴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 "는 할머니는
아직도 밖이 무섭다며 두문불출 집안에서만 칩거하고 계셨습니다.
보도연맹에 가입서에 도장을 찍으면
밀가루 배급준다는 말에 지장을 찍고 빨갱이라는 누명을 쓴 할아버지.
끌려가서 지서(현 경찰서)에 있다가 코발트광산으로 가는 길에 지서장의 도망가라는 말에
밤으로 달려 무조건 도망가서 살았다는 할아버지는 지금도 공포속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잊었지만...
아버지를 광산에 두고 차마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아들은 경산시청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제일 위 사진에서 설명하고 있는...) 2001년 당시 취재진을
광산 내부로 안내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해결해야 할 숙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코발트광산과 인근 대원골 등에서 약 3,5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당시 목격자들은 30명 정도를 실은 군용트럭에 하루에 10대씩... 열흘 정도...
경산역전을 지나 평산동 쪽으로 갔다는 증언에 따라 약 3,000명의 재소자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60년 당시 경산중앙초등학교에서 열린 위령제에 약 400명의 유족들이 참가했다는 증언과
60년 4대 국회 양민학살특위에 신고한 학살자 수도 356명이어서
청도지역 보도연맹원과 합치면 500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들 숫자를 모두 합치면 3,500명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또 당시 경산경찰서에 근무했던 황모 씨가 생전에는 진술을 거부하다 임종하기 전에 자식에게
광산에서 약 3,500명이 죽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산정상 부근에 있는 수직갱의 입구는 열려 있었습니다.
대구지역에서 발행하는 '매일신문'에서 경산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좌측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현재는 철근으로 그나마 입구를 가려 놓았습니다만 2001년 당시에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이 그냥 열려 있었습니다.
입구에 포승줄로 묶은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알을 한 발만 쏘았답니다.
한 사람이 뒤로 넘어지면 묶인 포승줄 때문에... 나머지 4~5인은 저절로 수직갱 아래로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흘을 계속했답니다.
그렇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수직갱으로 그냥 스며들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지하수는 갱도를 타고 솟구치고...
이런 형국이었습니다.
산 허리로 내려 갔습니다.
원래는 항상 열려있는 갱도의 입구에는 유가족들이 양철로 임시문을 만들었습니다.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지하수의 색깔은 지금도 붉은색입니다.
허리를 잔뜩 웅크리지 않으면 머리를 부딛치는 낮고 좁은 굴을 40미터 정도 지나자
비교적 넓고 높은 수평갱의 끝이 나왔습니다.
동굴 내부는 어두웠습니다.
큰 비가 내려 위에서 내리 누르는 수압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지하수압이 물 속에 잠겨 있던 유골들을 밀어내서 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유골들은 누군가에 의하여 불에 그을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취재 당시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의 공권력은 존중되어야 함에도
그 공권력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때...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민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 너무나 무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과거를 청산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주검들을 방치한 채 어떻게 과거를 청산한다는 말인지...
57년간 세상이 무서워서 은둔한 유가족들의 아픈 가슴은 누가 안아 줄 것인지...
그들도 분명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다행인 것은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에서
2007년 8월말까지 1차 유해발굴작업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경산의 광산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잠겨있는 주검들에게 평안이 올 수 있을지...
첫댓글 예전에 경산에서 2년간 산적이있었는데 저 안경공장자리에 파티마 요양병원이 들어서있습니다. 전 저자리가 학살현장의 자리인줄은 꿈에도 몰랐습죠.. 근데 거기에 괴담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그 자리 근처만 가면 무섭다고 돌아가자고 항상 그랬었지요.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번은 거기 근처에 놀이터가 몇군데 있는데 밤에 산책하다 놀이터에서 잠시 쉬려고갔는데... 미끄럼틀 위에서 어린아이 둘이 저와 친구를 노려보고 있었죠.그때 무서워서 도망쳤던적이 있었는데 거기 학살현장과 먼 거리도 아닙니다..거긴 대구 경산에선 귀신길로 유명한데요..
놀이터가 총 3군데?있는데 두군데서 .... 아무튼 봤었구요. 한 곳은 제가 주로 밤에 산책가는 곳. 지금은 거기에 전원주택들이 들어섰는데 거기 주택들이 들어서기 이전엔 정말 무서웠습니다...맨 위쪽에 있는 놀이터.. 바로 뒷쪽이 학살현장이기 때문.. 거기 학살현장이란 걸 알기전에 계속 그 자리를 응시하게 되더군요.. 뭐가 모여있는듯한.. 그런 느낌?...알고나선 밤엔 더이상 거긴 안갑니다 ㅡㅡ;; 거기 파티마요양병원있고 골프장있구요.. 안쪽으로 더 들어가믄 대구한의대 있네요.
여친과 바람쐐러 자주 갔던 곳인데.. 갈때마다 오싹하다고.. 돌아가자고.... 실제이야깁니당... 이상..-
암튼 안타깝습니다... 마음 한편이 아려오네요..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 거기서 돌아가셨는데,,. 안타깝습니다.
전쟁이 만든 비극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 질수 있는지.. 같은 동네주민들을 학살한 군경들.. 아무리 상부 지시였다지만..
전쟁이만든비극이라는말은 권력자들이 만든 물타기입니다.
권력자들이만든 비극입니다
슬픈 역사ㅠㅠ
권력자가 만든 전쟁에 피해는 우리가 보죠...
나라를 지키기위핸 가족을 지키기위해 언제든 싸울거지만
저런 권력자들의 썩어빠진 놈들의 기득권을 지켜주기위해 죽을 생각은 추호도없습니다
세상이 뒤집히면 저런 일들이 또 벌어질 수 있다는게 진짜 더 비극인 듯 합니다. 돌아가신 분 모두 다 털고 좋은 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사실을 숨기는데 급급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 문제의 배경까지 오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네요. 보도연맹 또는 좌익의심자에 대한 '사형'(긴급절차에 의한 것이지만)은 한국전이란 특수한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남북 모두 정권에 위협이 되는 적대집단에 대한 보복은 다분했었죠. 박헌영이 자신했던 제5열에 의한 남한 내부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개전 후 빠른 대응(물론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만;;)때문이었고 우리가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말씀처럼 분명 유가족의 아픔 현실도 분명하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겨집니다.
독일이라면 적나라한 발굴현장에 기념관을 세워 교육에 활용할 터. 하지만 무조건 당시 학살당했다는 피해의식 내지 정권에 대한 정죄는 잘못된 인식이라 생각됩니다. 불가피한 선택이란 것을 다시한번 찾아보실수 있을 겁니다. 대부분 보도연맹원 내지 전향자라 했는데 개전 후 부역 및 학살자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38선남부출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하니까요. 복잡하지만 있는 현실과 불가피한 배경에 대해서는 혼돈된 평가는 지양해야 된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