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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자 엄홍길, 박영석, 한완용.
한국이 낳은 엄홍길(43), 박영석(40)에 이어 최근 한왕용(37)도 히말라야 8,000m급 14개좌 완등의 위업을 달성 했다. 이로써 한국은 14좌 완등자를 3명이나 배출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된 것이다. 젯트기류,눈사태, 희박한 산소등 최악의 기상조건을 극복해야만 하는 8,000m 급은 하나만 오르는 것 도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지구의 지붕 히말라야 산군에서도 가장 높아서 '수직의 한계'(Vertical Li- mit)라는 8000m 이상의 고봉을 14개座나 완등한 이들 3인은 보통사람이 아닌 '超人'들이다.
한국 산악계는 대원과 셰르파까지 15명이 한꺼번에 눈사태로 죽음을 맞는 등 히말라야 원정 초창기인 60년대 초부터 10 여년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77년 고상돈이 한국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양과 질에서 일취월장했다. 78년 1회, 80년과 81년 각각 2회, 82년과 83년에 각각 6회, 84년 13회 등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해외 고산원정 횟수가 늘어났다. 근본적으로는 오름짓 그 자체의 긴장과 고독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지속할 수 없는 것이 등반이다. 고상돈에 이어 허영호 등 선배 산악인들에게서 등반으로 명예와 돈도 거머쥘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산꾼들은 너도나도 눈을 뒤집어 쓴 '하얀 巨峰을 향한 꿈에 가슴이 부풀기 시작한 것이다. 고봉 등정이라는 꿈을 실현하는 데는 우선 적지않은 돈이 드는데, 마침 한국 사회는 70년대에 이어 80년대에도 고도 성장을 지속 하였으므로, 경제적으로 많이 윤택해 졌다. 여기에 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산악인들은 그야말로 봇물 터진 듯 해외 고산을 향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한국 산악계의 역량이 절정기에 이르러 거둔 결실이 곧 세 산악인의 14좌 완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루어 낸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등산인의 꿈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물론 세 산악인 나름대로의 특별한 노력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다른 산악인들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이들이 14좌 완등이란 위업을 이루기까지 선택했던 등반방식, 장비, 식량, 등반 스타일 등의 공통점과 차이점 등을 알아본다. ■ 완등 기간 완등을 이루기까지 걸린 기간은 엄홍길이 12년, 박영석은 8년, 한왕용은 10년이 걸렸다. 세 사람 모두 거의 매년 한 개 이상의 8,000m급 거봉을 오른 것이다. 엄홍길은 88년 첫 8,000m급 거봉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이후 5년여 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 벽 등반에 몰두하다가 93년부터 본격적으로 거봉 등정 레이스에 나섰으므로 그도 실제로 는 8년여가 걸린 셈이다. 그는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3개 거봉을 오르기도 했다. 박영석은 93년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거봉 등정 레이스를 시작했다. 97년 봄 다울라기리 등정 후에 그는 1년내 5개 거봉을 올랐고, 이듬해는 4개 거봉을 오르는 괴력을 보였다. 한왕용은 94년 초오유로 시작, 올해 브로드피크로 끝맺었다. 그 역시 한해에 2,3개의 거봉을 오르는 강한 체력을 보였다
DAUM에서 퍼온 글에 살을 붙인것임 재정리 ................ 지평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