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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방문 2013.12.08 12:09
책만을 위해서 와주신 분들은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준비를 했고, 지금 정말 떨리네요. 제가 책을 쓰게 된 이유, 그리고 팔메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이 시간을 같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를 쓰게 된 계기
제가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학교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어느 날 스웨덴에서 친구들과 잔디밭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데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행복하다. 그러면서 행복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거든요. 저도 여러분에게 여쭤 볼게요. 만약 행복을 1에서 10까지 매긴다면 얼마만큼 행복하세요?
2013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물었을 때 평균 6.3점이 나와요. 그럼 스웨덴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스웨덴의 평균은 7.5예요. 스웨덴은 행복한 나라로 치면 세계 5위고요, 우리나라는 41위 정도예요. 제가 '행복'이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잔디밭에 누워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데 행복하더라고요. 또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인가를 떠올려 봤어요. 노르웨이에서 학교생활을 할 때 카누 타는 걸 되게 좋아했거든요. 어느 날 카누를 타다가 노를 빠트렸어요. 못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카누에 누워 잠을 잤죠. 햇볕 아래 얼굴이 빨갛게 익었는데 그때가 행복했어요. 한국에서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 봤어요. 원하던 한겨레에 입사하게 됐을 때, 아니면 무슨 상을 탔을 때, 이런 기억이 몇 개 떠오르더라고요. 그런데 이 행복의 차이가 있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제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그걸 얻었을 때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스웨덴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할 때, 그냥 가만히 있을 때 그 존재 자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행복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같은 사람인데 각각의 사회에서 왜 행복을 다르게 느낄까, 이 사회가 나의 행복의 기준을 바꾸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고민을 하다가 우리와 스웨덴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느꼈던 것이 교육과 정치였어요. 그래서 그 두 가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팔메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해요. 제가 스웨덴에서 통신원으로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인터뷰를 하고 자료도 모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정치인이나 공공 센터에서 일하는 분들, 학교, 교회, 병원 등. 이분들을 만나면 공통점이 있어요. 인터뷰를 할 때 한 분도 빠짐없이 언급했던 말이 “국민의 세금이니까요.” “국민의 세금이기 때문에 함부로 못 씁니다.” “국민의 세금이라서 그렇게 못해요.” 심지어 병원에서는 “더 좋은 약을 쓰고 싶은데 국민의 세금이라서 비싼 약을 못 쓴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세금에 대해서 이렇게 민감하구나, 우리랑은 다르다, 여기 정치인은 좀 다른가 봐,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제가 지속 가능 발전 분야의 한 수업을 듣게 됐는데 강연하러 오신 분이 보 셸렌이라는 분이었어요. 스웨덴의 지속 가능 분야, 환경 분야에서는 가장 유명한 협상가예요. 그분의 강연을 듣고 흥미롭다, 이 사람 책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을 구해 읽었어요. 책을 읽다 질문이 생겼죠. 그래서 그분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나는 하수정이라는 사람이고 웁살라 대학을 다니고 지난주에 너의 강의를 들었다면서 질문을 보냈는데 그다음 날 바로 답을 주시더라고요. 내 책을 재밌게 읽었다니 고맙다, 내 핸드폰 번호가 이건데 한번 만나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면서 번호를 주시는 거예요. 당황했죠. 저는 한국에 있으면서도 정치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만난다고 해도 직접 통화한 경우는 흔치 않았어요. 항상 보좌관을 통해야 했죠. 신기한 마음에 그분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더라고요. 그분이 저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제가 신문사에서 일한다는 말도 한 적 없으니, 그냥 내 수업을 들었던 ‘듣보잡’ 제3세계의 사람일 거예요. 제가 여잔지 남잔지도 이름만 보고는 알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휴대폰 번호를 주고 전화를 했더니 반갑게 맞아 주고, 만나서 이야기하면 좋겠다면서 내가 지금 빈에 가는 길인데 돌아가는 길에 기차를 타면 웁살라에 들릴 수 있으니까 거기서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간다고요?” 했더니 그때가 코펜하겐 환경 총회가 있었을 시긴데 빈에서 실무들끼리 협의를 한 대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저도 유레일패스를 타고 웁살라에서 빈까지 간 적이 있었거든요. 30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이분에게 “비행기를 타지 왜 30시간을 걸려 협상하러 가느냐. 나이도 많고, 수석 협상간데.” 그러자 “내가 환경 협상을 하러 가는 사람인데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비행기를 타고 갈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스웨덴의 기차는 탄소 배출량이 제로예요. 신기하다.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분과 약속을 해서 만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스웨덴의 정치 문화에 대해 질문했죠. “내가 만나는 정치인마다 내가 만나는 공직자마다 세금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한다. 얘기를 들어 보니까 공무원들이 하는 워크숍을 브로슈어에는 ‘1크로나라도 낭비하는 것은 국민을 착취하는 것이다.’라고 써있다더라.” 1크로나가 한국 돈으로 100원이에요. 환율로 치면 170원 하겠네요. 170원을 낭비하는 것이 국민을 착취하는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걸 물어봤더니 “그건 스웨덴 공직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태도”라며 “안 그러면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뿐더러 이 시스템 자체가 붕괴된다.”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죠. 제가 책을 쓰게 된 것도 이분을 만나고 나서 ‘아, 스웨덴 정치인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에 썼습니다. 이분에게 언론재단에서 집필 지원을 받게 됐다고 소식을 전했더니 너무 기뻐하면서 답장을 보내 주셨어요. “팔메가 수상으로 있던 시절에 내가 베트남 대사였다.”며, 팔메와 베트남은 뗄 수가 없는 관계거든요,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다시 연락해 주겠다고 답을 주셨죠. 지금도 격려해 주시고 연락하는 사이고요. ‘이런 정치인 정말 신기하다.’ 전 그때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처음은 아니지만 크게 받았어요.
제가 친구한테 말했죠. 너희 문화는 이렇다더라 하니 스웨덴 친구가 하는 말이 “그 정도 문화는 우리한테 당연해. 특히 정치인이면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제가 “그럼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은 누구야?”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아마 팔메일걸?” 그러더라고요. 그때 올로프 팔메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았어요. 사실 스웨덴에 암살당한 총리가 있다,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총리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이 팔메이고 어떤 업적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거든요. 집에 가서 조사하기 시작했죠. 팔메, 팔메. 이 사람에게 적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 사람은 적이 왜 이렇게 많지?’ 하고 생각하다 보니까 이 사람의 삶에 흥미를 갖게 됐어요. 팔메에 대한 자료는 스웨덴어 이외에는 거의 없거든요. 영어로도 팔메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요.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인이 필요한데 그 정치인의 실마리를 저는 팔메에게서 봤어요. 그리고 팔메를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팔메에 대한 책을 쓰게 됐지요.
또 하나 팔메에 대한 책을 쓰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스웨덴에 대해 쓴 책을 많이 봤거든요. 대부분 스웨덴이 유토피아처럼 그려져요. 좋은 제도에 대한 소개는 굉장히 많았지만 그 제도를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투쟁과 노력이 있었는지에 대한 건 별로 없었어요. 스웨덴도 어두운 면이 분명 많은 나라거든요. 겨울에 햇빛이 없어서 어두운 게 아니라 사회 자체에 어두운 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소개한 책은 별로 없었어요. 팔메는 스웨덴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팔메에 대해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것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넬슨 만델라예요. 신기하죠.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자라는 사실이요. 그렇게 된 이유도 팔메와 관계가 있어요. 그건 이따 말씀드릴게요. 두 번째로 존경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네, 엄마예요. 세 번째는? 올로프 팔메예요. 15위까지 뽑힌 사람들의 직업을 분석해 보면, 스웨덴에서 존경받는 사람 중 가장 많은 직업이 정치인이에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이 존경을 받는가. 우리 사회에서 “너 정치적이야.”라고 말하면 “고마워.”라고 하진 않잖아요. 정치적이라고 하면 뭔가 술수를 쓰고 음흉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데 스웨덴은 정치인이 존경받는 직업이고 실제로도 정치인에 대해 존경스럽게 생각해요. 제가 친구들에게 “너네는 국회의원에 대해, 정치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으면 하는 말이 있어요. 거의 대부분 비슷하게. “되게 불쌍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왜 불쌍해 국회의원이?” 그랬더니 국회의원의 별명이 스웨덴에서는 ‘3D 임시직’이라는 거예요.
일단 국회의원의 월급이 우리나라보다 적어요. 사실 스웨덴의 GNP가 우리나라보다 2.5배 높거든요. 물가는 1.5배 비싸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받는 월급은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받는 월급보다 적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미 보편적 복지를 모든 사람과 똑같이 받고 있기 때문에 의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받는 혜택은 별로 없어요. 의원 연금을 받으려면 우리나라는 의원직을 3개월 유지하면 되지만 스웨덴의 경우 10년을 유지해야만 받을 수가 있거든요. 의원이 된다고 해서 특권이 별로 없죠. 특히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1명당 기사 포함해서 보좌관을 9명까지 둘 수 있지만 스웨덴은 국회의원 2명이 비서 1명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나마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고요. 이렇게 혜택은 별로 없는 반면에 공인이기에 주어지는 책임감은 엄청나게 크죠. 그 중압감이라는 건 말도 못해요.
중학교 수업 과제로 ‘정보공개 청구’를 해오라는 게 있어요. 국회의원들이 쓰는 비용 등 모든 걸 정보공개 청구로 알 수 있거든요. 그만큼 국회의원에게는 미디어, 보통 시민들의 관심과 감시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예요. 스웨덴에서 가장 큰 당이 사민당이죠. 작년 12월에 사민당의 총리가 사퇴했어요. 이 사람이 지역 국회의원인데 국회는 수도에 있잖아요. 그렇다면 의정 활동을 하기 위해서 국회 근처에 집을 얻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 보조금을 주게 돼있어요. 이 사람이 거기서 살았는데 보조금을 나라에서 부당하게 가져갔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니까 이 사람이 동거인과 같이 살았는데 나라에서 말하기를, “넌 동거인과 같이 살았으면 집세를 반만 청구해야지 왜 전액을 청구했느냐?”는 거예요. 4년 동안 살았는데 그 집세가 한국 돈으로 2천만 원 정도 돼요. 월세 80만 원짜리 집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저는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살았는데 집세가 50만 원이었거든요. 학생 아파트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수도 스톡홀름에서 80만 원짜리 집에 살았다면 절대로 호화로운 집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너는 둘이 같이 살았는데 왜 전액을 청구해. 넌 양심에 문제가 있어. 정치인으로서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러자 사민당이 우리 노동자의 당에 이런 오점을 남길 수 없다고 해서 이 사람을 압박했고 “나는 당의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고 해서 스스로 사퇴했죠. 국회의원에게 요구하는 도덕성의 잣대가 이 정도라면, 글쎄요 국회의원을 하고 싶을까요.
스웨덴의 국회의원들은 일도 많이 해요. 평균 노동시간이 주당 30시간인데 조사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66시간을 일한대요. 제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대부분이 “도서관으로 오세요.”라고 말을 해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대부분은 행사에 가서 얼굴 비치고 인사하기 바쁘지만 스웨덴 정치인은 보좌관이 없으니까 자신들이 직접 정책을 만들어야 해서 도서관에 자주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일을 못하느냐. 평균 입법 건수가 한 사람당 1년에 18건이래요. 박근혜 대통령이 15년간 국회의원 하는 동안 15건을 입법했어요. 그렇게 따지면 생산성도 굉장히 높은 편이죠.
스웨덴은 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회의원들이 사업이나 학문에서 성공한 마지막에 국회의원을 경력이나 권력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웨덴은 처음부터 정치인이 목표인 사람이 많고 비례대표제다 보니까 다양한 이익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을 정당 명부에 넣어요. 그들끼리 별 공통점이 없어요. 18세도 있고 70세도 있고 배경도 직업도 다양하고.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면 자신의 직업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고요. 한 국회의원이 인터뷰하기를, “국회의원에 관한 이 다큐멘터리를 아이들이 안 봤으면 좋겠다. 정치라는 게 얼마나 숭고한 직업인데 아이들이 이걸 보고 정치인이 되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어떻게 하냐.”는 거예요. 실제로도 자발적 이직률이 30퍼센트예요. 우리나라는 국회의원이 한 번 되면, 재선하고 3선을 해서 국회의원 직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스웨덴은 한 번 하고 나면 정말 나는 나라를 위해 이 정도면 봉사했다면서 관두는 비율이 30퍼센트나 된다는 거죠.
감히 생각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좋은 정치인을 원한다면 국회의원들에게 주는 혜택을 스웨덴 수준으로 낮추면 아마 보통 사람들이 받는 혜택이 스웨덴 수준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정치인이 되는 목적이 정치인이 됨으로써 얻는 부가 이익 때문이 아니라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 내가 사회를, 공동체를 바꿀 수 있다는 그 신념 때문에 정치인이 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러면 정치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곳에서 스웨덴의 총리 올로프 팔메가 암살당했다. 1986년 2월 28일.” 팔메가 쓰러진 스베아베겐 거리에는 그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팔메가 걷던 평화, 자유, 연대의 걸음은 그의 죽음과 함께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한 연설에서 특유의 낙천성과 진보에 대한 신념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아름다운 날이 우리 앞에 있다.”
올로프 팔메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
이제 팔메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그렇게 존경받는 팔메가 어떤 사람일까. 1986년 2월 28일 올로프 팔메는 부인과 아들 커플과 스톡홀름 중심가에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걸어가다가 괴한의 총에 맞아서 목숨을 잃습니다. 총알은 두 발이었고요. 29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스웨덴은 법으로 25년의 살인 사건 공소시효를 갖고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법을 바꿔서라도 범인을 잡겠다고 해서 법을 바꿨어요. 범인을 찾거나 결정적인 제보를 하는 사람에게는 노벨상의 상금의 5배에 해당하는 상금을 주겠다고까지 했지만, 수백억이 되는 수사 비용을 쓰고 수천 쪽이 넘는 수사 자료를 만들고도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해 정말 말이 많아요. 누가 죽였을 것이다, 누가 죽였을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죽었을까, 암살의 용의자를 살펴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실마리가 보이고 이 사람이 더 궁금하게 돼요.
첫 번째로 지목되는 용의자
첫 번째 용의자는 ‘극우 세력’입니다. 팔메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로 치면 강남 좌파라고 하는데 그건 될 것도 아니고 얼마나 부잣집이었느냐 하면 지금 팔메 집이 루마니아 대사관저인가 그래요. 한남동에 가면 되게 크고 대사관으로 쓰는 집들 있잖아요. 그런 집에서 태어났고 하녀도 있었고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집에서 파티를 하면 왕족이 올 정도로 부잣집이었대요. 한때는 팔메 가문이 발렌베리 가문과 맞먹는 집안이라고까지 말했었는데 발렌베리 가문은 이건희 회장이 모델로 삼는 스웨덴의 재벌 가문이거든요. 스웨덴 경제의 30퍼센트를 발렌베리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힘센 가문인데, 거기에 비견될 정도의 가문이었다고 해요.
이 사람은 집안 환경의 영향을 받아 오히려 보수적인 색채를 띠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거기서 깜짝 놀란 거예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피부색으로, 자라난 환경 때문에 차별을 받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교육의 기회를 갖기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팔메는 “미국에서의 시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서 좋았지만 나는 절대로 스웨덴을 미국과 같은 나라로 만들지 않겠다. 나는 스웨덴이 미국처럼 되는 걸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스웨덴으로 돌아와 사민당에 가입하고 사민주의자가 됩니다.이 사람은 삶의 부닥침보다는 자기가 바라는 이상향 때문에 사민당에 가입을 했고 그런 정치인이 됐다고 봐야겠죠.
그러면 팔메가 사민당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반겨 줬느냐. 아니오. 팔메가 가입한 사민당은 블루칼라 노동자의 당이거든요. 당시 사민당의 태반이 초등학교 졸업자였어요. 그러니까 팔메에게 너무 이질감을 느끼는 거죠. 그 상황에서도 팔메가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그와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은 심장까지 사민주의자다.”라고 말할 정도로요. 10년 후에는 팔메가 속한 모든 단체에서 팔메를 리더로 삼아야겠다고 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고 해요.
첫 번째 용의자가 극우주의자잖아요. 그들은 팔메가 너무 고까운 거예요. “너는 지금 우리의 이익을 대변해도 모자랄 판에 왜 적군에 들어가서 우리한테 이렇게 하느냐.”는 거죠. “너는 그냥 우리 클래스야, 그 클래스가 아니라.” 팔메는 자신이 그곳에 속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부자나 거물을 만나도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어요. 당당하게 말했고 독설가였고 토론도 굉장히 잘했고. TV토론회에도 1년에 9번씩 출연하고 그랬다는데, 팔메가 토론하면 재밌거든요. 사람을 궁지로 몰아붙이니까 재밌어서 보는 거예요. 보수 입장에서는 정말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죠. 대중 연설에 너무 능했기 때문에 재계를 압박하는 장치를 여론으로, 대중을 등에 업고 압박을 했어요.
스웨덴은 합의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예요. 팔메 이전에 스웨덴을 23년 동안 이끌었던 타게 에를란데르라는 총리가 있는데, 이 사람은 사실 개인적인 매력은 크지 않아요. 하지만 정치가로서는 훌륭했죠. 목요 클럽을 만들어서 재무부 장관 주재하에 노동조합 대표, 기업가 대표 등 모든 이익집단을 모아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게 하고 여름이 되면 자기 관저로 이 사람들을 초대했어요. 그 전까지는 스웨덴에 파업이 잦고 시위를 하다가 사람이 죽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이 총리가 23년 동안 공을 들인 이후로 파업률이 0으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될 정도로 토론을 많이 하고 여러 사람들을 보듬고 다양한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정말 정치가다운 사람이었던 반면, 사실 팔메는 그렇진 않았어요.
스웨덴 경영자협회에 가면 “팔메가 있던 시기는 우리에게 암흑기다.”라고 말할 정도로 팔메는 너무 독선적이었다고 해요. 왜 그랬느냐. 에를란데르가 있던 시기는 경제가 점점 발전하고 사회가 성장하는 시기였는데 팔메가 수상이 된 1969년은 경제에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분규가 일어나고 사회적 불만과 이익이 충돌하는 시기였어요. 1979년에 대처가 정권을 잡고 1981년에 레이건이 정권을 잡잖아요. 그 시기에 팔메가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 기업들은 “법인세 올리면 다른 곳으로 기업을 옮기겠다. 나는 이런 데서 기업 활동을 못한다.”면서 으름장을 놓았죠. 하지만 팔메 시절에 세금이 많이 올라가요. 그리고 노동조합의 권리를 강화하고 노동 안전법을 개선하고 여성을 위한 제도 등을 계속 입법했어요.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점점 족쇄처럼 작용한 거죠. 그래서 팔메를 협박하면 팔메는 대중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거예요. “경영주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내가 어디서 예산을 빼란 말이냐. 내가 장애인 예산을 뺄까, 복지 예산을 뺄까?” 그러면 사람들이 그 압박을 기업에 넘기게 되고 기업들은 또 그걸 견디지 못하죠.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어떤 기업가도 사회복지를 늘리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팔메가 집권하는 동안은 좋든 싫든 귀가 닳도록 들어야 했고 따라야 했다.” 어쩌면 이게 팔메 식의 정치였던 것 같아요. 만약 에를란데르처럼 신사적으로 정치를 했더라면 지금의 스웨덴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 만들었던 기업과 시민과의 균형, 이것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스웨덴의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LCA에 관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요. LCA는 한 제품의 기본 원료에서부터 마지막 폐기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까지 생명주기를 분석하는 거예요. 그때 제가 삼성 반도체를 분석했어요. 그리고 발표를 했죠. 발표 중간에 반도체 공장에 있는 백혈병에 걸린 사람들 그리고 삼성이 그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언급을 했어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 발표를 하고 나서 근 한 달 동안 친구들에게 “네 발표를 듣고 갤럭시를 사려다가 애플 샀잖아.” 이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삼성에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긴 했지만 그걸 보면서 ‘아 스웨덴에서는 나쁜 기업은 기업 활동을 할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 봄이었죠. 방글라데시에서 옷 만드는 공장에 붕괴 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굉장히 많은 노동자, 특히 여성이 사망했는데 우리가 아는 굉장히 유명한 브랜드들의 옷이 그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기업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고 있었죠.
그때 제 스웨덴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H&M이 거기 있었다. H&M은 왜 책임지지 않는가.”를 써서 올리는 거예요. H&M이 스웨덴에서 제일 유명한 옷 브랜드이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에요. 제 친구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올렸어요. “H&M은 가격 올려라. 난 소비자로서 피로 만든 옷 입고 싶지 않다. 50센트씩 가격을 올려라. 그리고 그 돈으로 이 사람들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줘라 나는 스웨덴 기업이 이러는 거 정말 보고 싶지 않다.”면서 페이스북에 올리며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캘빈클라인에서는 이미 책임을 표명했었는데 H&M은 답이 느린 편이었어요.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이 SNS를 통해서 압박을 가한 거예요. 당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이렇게 해달라고 내건 조건이 있었어요. 복지 기금을 향상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제3자가 안전 검사를 하게 하는 등 노동자들이 원하는 요구 사항이 있었는데, 결국 H&M이 가장 먼저 이를 받아들여 사인한 기업으로 언론 자료를 냈지요. H&M이 방글라데시 노동환경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다음에 제 친구들이 H&M이 첫 번째로 사인했다는 걸 페이스북에 공유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저는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나라를 또는 어떤 조직을 사랑하는 방식 가운데,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죠. ‘우리나라 기업이, 우리나라가 나쁜 짓을 하고 있으면 그냥 눈을 감고 우리 기업이니까 팔아 줘야 돼.’가 아니라 잘못하고 있으면 “잘못하는 거야. 돈 더 비싸게 받아도 돼. 그 대신 나는 이런 기업에 돈 줄 수 없어.”라며 채찍질을 가해 그 기업이 제대로 된 기업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죠.
그때도 느꼈지만 스웨덴의 이미지, 국가의 이미지라는 건 비단 어떤 브랜드나 나라의 정책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시민들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죠. 아무튼 그래서 극우 세력은 이렇게 기업 활동을 어렵게 하는 팔메를 굉장히 싫어했고, 팔메보고 “너는 공산주의자야. 소련의 스파이가 분명해.”라면서 흑색선전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팔메를 죽인 세력 중 하나로 극우 세력이 첫 번째로 올라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지목되는 용의자
두 번째로 꼽히는 용의자는 크리스테르 페테르손, 이 사람은 용의자로 지목돼서 재판정까지 간 유일한 사람이에요. 암살될 당시 팔메가 부인과 함께 있었거든요. 부인이 많은 용의자 명단 중에 “저 사람이에요.”라고 지목한 인물이에요. 당시 목격자들이 저 사람이 분명하다고, 저 사람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해서 지목했는데 사실 그때가 밤이었고 이 사람이 입었던 옷이나 키, 머리색이 일반적인 스웨덴 사람과 다르지 않았게 때문에, 1심에서는 구형을 받았지만 2심에서는 무죄로 풀려났어요. 재판부에서는 “이 사람이 팔메를 죽인 이유가 없고, 정신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목격한 팔메의 부인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그때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해서 풀어 줬어요. 이 사람이 당시 뇌질환을 앓고 있었거든요. 약물 중독자이기도 했고.
언론이 참 추악하다는 생각을 한 게, 이 사람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당신이 죽였냐면서 돈을 주고 인터뷰를 했어요. 그 사람은 “내가 죽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죽였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모호한 답변을 했는데 결국 이 사람이 2003년에 죽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죽였는지 아닌지는 이제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팔메의 유족은 아직까지도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죠. 최근 스웨덴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드라마도 했었다고 하는데 스웨덴의 유명한 범죄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그 당시 팔메 부인이 이 사람을 지목한 순간 다른 모든 가능성은 닫혔고 그래서 조사가 늦어졌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로 지목되는 용의자
그다음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경찰과 군부, 그리고 조사를 맡았던 비밀경찰입니다. 수사 보고서가 270쪽 정도예요. 제가 다는 못 읽었고 열심히 봤는데, 이 사람들이 정말 수사할 의지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허술했어요. 물론 스웨덴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고 팔메가 경호원과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지만요. 팔메를 맞춘 두 발의 총알도 경찰이 찾은 게 아니었어요. 경찰이 헬기를 띄우고 수색대를 동원하는 등 난리를 쳤는데도 한 발은 그 옆에 있었던 인도 기자가 주웠고 또 한 발은 그다음 날이 돼서 팔메가 죽은 현장에 꽃을 들고 갔던 평범한 시민이 주웠습니다. 팔메가 죽은 당시 경찰들이 약물 단속을 하고 있어서 1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늦게 왔고, 와서 팔메를 싣고 가는 것도 늦었고요. 그리고 범인이 도주할 경로를 차단해야 할 거 아니에요? 공항이 스톡홀름에서 40분밖에 안 걸리거든요. 그것도 전혀 차단하지 않았어요. 마음만 먹으면 범인이 그냥 공항으로 가서 도주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경찰의 수사가 허술했죠. 그리고 비밀경찰, 이들을 세포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 같은 조직이에요. 이 조직이 미국의 CIA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사실 팔메를 눈엣가시처럼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건 좀 이따 나올 다음번 용의자에서 말씀드릴게요. 미국의 사주를 받은 비밀경찰이 일부러 수사도 허술하게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1968년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팔메가 반베트남전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는 모습. 그의 오른쪽에 모스크바 주재 북베트남 대사인 응우옌토쩐이 있다. 이날 팔메의 행진 및 연설 이후 미국과 스웨덴의 외교 관계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팔메의 베트남 전 개입 그리고 그를 지지한 국민들
팔메가 스웨덴 안에서 이룬 정치의 업적도 있지만, 두드러지는 건 외교적인 업적인데요. 그중에서 특별히 말씀드리고 드리고 싶은 부분은 베트남전에 팔메가 개입했던 거예요. 베트남 반전 운동을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됐었죠. 1970년대에 미국이 베트남을 점령해서 폭탄을 투하했을 때 당시 미국이 하는 일이 누구도 반기를 들 수가 없었잖아요.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런데 팔메는 중립국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우리는 중립국이기 때문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진실을 말한다.”라고 말하며 미국을 강하게 비판했어요. 총리가 되기 이전 시절에도 베트남 대사와 같이 데모하러 다녔고 총리가 된 이후에는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이 베트남 민간인에게 폭격을 터뜨리는 것은 독일 나치와 똑같은 일이다. 이건 정말 세계가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이 말을 들은 미국의 반응이 어땠느냐, 당시 미국 국방 장관이 헨리 키신저였어요. 키신저는 유대인이에요. 나치의 핍박을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인데, 그런 자기가 믿고 있는 이 나라를 보고 나치와 똑같다고 한 거예요. 키신저가 불같이 화를 내고는 당시 대통령 닉슨에게 말해 다음 날 바로 스웨덴과의 외교 단절을 선언합니다. “너희 대사 우리가 인정 안 하겠다.” 그렇다면 스웨덴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팔메가 스웨덴 총리가 되기 전부터의 별명이 베트남 외교부 장관이었어요. 미국에 대한 스웨덴의 의존도가 굉장히 높은 편이었거든요. 그럼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미국을 향해 그런 정도의 강한 반응을 날려서 미국이 대한민국과 외교 단절을 선언한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어요? ‘국내 정치나 신경을 써라, 국익을 생각해라, 너 혼자 좋다고 해서 그래도 될 일이냐.’라고 하겠죠.
스웨덴 신문사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어요. “팔메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70퍼센트의 국민들이 “난 팔메를 지지한다”, “나는 우리 총리가 자랑스럽다.”고 답했고 그 이후에 팔메를 다시 선거에서 뽑아 줬죠. 우리가 말하는 이 멋있는 정치인 팔메는 팔메 자신이 멋진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팔메를 지지한 국민이 없었으면 팔메는 절대로 이런 정치인이 되지 못했을 텐데, 제가 제일 부러운 것이 바로 그런 풍토, 이런 정치인을 뽑을 수 있고 이런 정치인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풍토입니다.
이런 사회적 풍토는 제가 생활하면서도 많이 경험했어요. 한번은 친구들이랑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 2시쯤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요. 경제학동 옆에 피자집이 하나 있거든요. 클럽에 다녀올 때마다 거기 들러서 피자를 먹었어요. 어느 날 제가 친구들에게 말했죠. “피자 말고 다른 거 없냐? 다른 거 먹고 싶은데 만날 피자만 먹으니 좀 질리는 것 같아.” 그랬더니 친구들이, “스웨덴을 통틀어 이 시간에 문 여는 데는 여기밖에 없을걸?” 거긴 터키 이주민이 운영하는 피자집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래? 한국 가면 짱인데, 한국은 이 시간엔 다 열려 있어. 피자, 치킨, 초밥 다 먹을 수 있다.”고 했어요. 제가 그러면 친구들이, “진짜? 짱이다.” 이럴 줄 알았죠. 그런데 제 친구들의 반응은, “아 정말 안됐다.” 이러는 거예요. “뭐가?” 했더니 제 친구들이 하는 말이,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건강을 해치면서 일한다는 건 그만큼 사회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사람들일 텐데 너희 사회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다니 안됐다.”는 거예요. 제 마음이 찌릿해지면서, 사실 전 친구들이 “우와 진짜?”라고 하면 “갈 것도 없어. 배달시키면 돼.”라고 답하려 했는데 제가 이런 말까지 했다간 저를 마치 신자유주의의 아이콘으로 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 아 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연대 의식이라는 것이 비단 그 나라에서 그 시간에 일하는 사람에 대한 아픔뿐만 아니라 저 멀리 대한민국에서 이 시간에 일하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아파할 수 있구나. 그 연대 의식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셰리 버먼이 쓴 『정치가 우선한다』는 책이 있는데, 굉장히 좋은 책이에요. 그 책의 내용인지, 버먼이 쓴 논문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데, 이런 말이 있어요. 스웨덴 사민당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스웨덴에 사민주의의 정신을 심은 것이라고요. 사민주의라는 것이 자유, 정의, 연대 의식이잖아요. 제도가 사라져도 남는 것은 그 의식인 것 같은데 사회 안에 그 의식을 깊이 심어 놓은 것이 스웨덴 사민당의 가장 큰 업적이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지구 다른 편에 있는 약한 사람을 또는 자기 사회 안에 있는 약한 사람을 아파하는 연대 의식이 팔메가 있던 시절에 좀 더 적극적으로 일구어졌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흘러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팔메를 미국이 싫어했고, CIA가 사주했다, 그래서 비밀경찰인 세포가 또 하나의 용의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받는 거고요.
네 번째로 지목되는 용의자
또 다른 용의자는 군수산업이에요. 노르웨이는 유명한 기업이 없는 대신 기름 덕에 잘사는 나라예요. 하지만 스웨덴은 별 자원이 없거든요. 우리와 비슷해요. 대기업 중심의 나라이고 인적 자원에 기대야 하고. 이 나라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 중 하나가 무기 산업입니다. 군수산업. 여러분이 아시는 사브나 볼보도 사실 군수산업 업체고요. 세계 9위의 무기 수출을 자랑하는 나라이고 국민 1인당 무기 생산량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왜 군수산업이 팔메를 죽인 용의자로 꼽히느냐. 팔메가 있던 시절에도 군수산업은 스웨덴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스웨덴은 힘없이는 중립 못한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에 굉장히 투자를 많이 하거든요. 중립이라 전쟁은 하지 않지만 무기 개발에는 힘을 많이 써요. 그 대신 법이 있는데, “전쟁의 위험이 있는 국가 혹은 내전이 있는 국가에는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법이 있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무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전쟁을 하는 나라잖아요. 법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죠. 이 법의 빈틈은 무기가 첫 번째 도착하는 나라를 기준으로 법이 적용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란이나 이라크로 무기를 바로 보내지 않고 싱가포르, 바레인, 이탈리아를 거쳐 무기를 수출하고 있었죠.
당시 팔메가 6년 동안 UN에서 미션을 받아서 이란과 이라크의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말하는 거예요. “팔메, 너는 이란과 이라크의 분쟁을 중재하고 다니지만 거기에 무기를 파는 게 누구냐, 스웨덴이 아니냐. 너는 정말 위선적이다.”라고 했어요. 그걸 듣고 팔메가 깜짝 놀란 거죠. 정말 몰랐나 봐요. 정말 몰랐다는 게 저는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 팔메가 특검을 지시해요. 특검과 동시에 모든 무기 수출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 무기인데 그 무기를 이란이나 이라크에 판다고 하면, 글쎄요. 부자가 되는 게 중요한가요, 아니면 무엇을 팔아서 부자가 되는지 그 내역이 중요한가요. 지금도 스웨덴 사회에서는 논쟁이 있어요. 우리가 무기를 남아공에 팔아도 되는지가 지금도 사회적인 문제예요. 스웨덴이 무기를 팔아도 되느냐는 원론적인 문제부터 무기를 팔아서 부자가 되는 게 합당한 일이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죠.
아무튼 팔메는 무기의 무기한 수출 금지 명령을 내렸어요. 무기 회사들이 난리가 났죠. 팔메가 죽기 몇 주 전에도 이란 대사가 와서 우리가 대금을 지급해도 무기가 오지 않았다면서 항의했다고 해요. 팔메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무기 회사가 팔메를 죽였을 것이다. 실제로 팔메가 죽고 나서 보포르스라는 가장 큰 무기 회사는 인도와 수조 원에 달하는 무기 계약서에 바로 도장을 찍게 되죠. 그리고 팔메가 특검을 하도록 했던 검사가 있는데, 이 사람이 그 당시에 불법으로 무기를 얼마나 팔았는지 조사했어요. 그걸 발표하기 일주일 전 지하철에 떨어져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검사의 죽음과 불법 무기 판매에 대해서 탐사 보도를 기획하던 여기자는 행방불명이 되죠. 2년 후에 스톡홀름 하수도에서 그 사람의 차가 시신과 함께 발견돼요. 이런 증거로 무기 회사가 팔메를 죽였을 것이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지목되는 용의자
또 하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팔메를 죽였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웬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넬슨 만델라잖아요. 제가 책을 쓰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제도, 인종 분리 정책을 봤는데 너무나 참혹하더라고요. 흑인은 길 가다가 백인 여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 수 있어요. 저녁 6시가 지나면 자기 신분증과 소지 허가증 혹은 이 길을 지나다닐 수 있다는 허가증이 없으면 길을 다니지 못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즉심 판결을 해서 구타하거나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거예요. 정말 무서운 법인데, 그게 법이라는 것 자체가 놀라울 지경이었죠.
팔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인종 분리 정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인류가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인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여기에 맞서면 저 제도는 없어진다.”는 말을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스웨덴은 남아공과 모든 교류를 금지한다고 선언했어요. 수출, 수입 금지, 외교적인 교류도 금지, 문화 교류도 금지, 스포츠 교류도 금지, 당시 컴퓨터를 수출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금지, 그런데 사람들이 안에서 비웃었죠. 스웨덴의 당시 인구가 500만 정도밖에 안 됐는데 그렇게 작은 인구의 스웨덴이 그런 일을 한다고 누가 눈이나 깜짝하겠느냐, 남아공은 꼼짝도 안 한다, 그러니 국내 정치나 신경을 쓰라고 했어요.
그랬는데 팔메가, “아니다. 정치는 한 사람의 힘이다. 한 사람이 내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사람이 동조해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으면 그게 정치다. 모든 사람이 정치인이고 나는 그렇게 정치 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죠. 그 후 덴마크가, 우리도 팔메의 주장에 동참하겠다. 그리고 노르웨이, 그리고 핀란드, 독일, 프랑스가 같이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 이 사람들이 UN에 안건을 상정했고 마지막으로 결국 미국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인을 해요. 이제 전 세계가 남아공을 제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는 없어졌죠. 남아공 입장에서는 “팔메, 쟤 뭐야? 왜 우리나라 일에 감 놔라 배 놔라야?” 그래서 특공대를 결성했고 비밀결사대로 팔메를 없애려고 했다는 기사도 났었어요. 그래서 남아공 정부가 또 하나의 용의자로 지목되었죠.
그 당시 어떤 나라도 이렇게 열강에 대응해 맞서질 못했어요. 소련과 미국에 맞서는 말은 누구도 하지 못했는데 팔메는 거침없이 나섰잖아요. 그래서 세계에 무슨 일이 터지면 기자들이 “스웨덴에서 뭐라 그래? 팔메가 뭐라 그래?” 이렇게 물었대요. 그 발언을 쓰려고. 그래서 1970년대 스웨덴의 별명이 “세계의 양심”이었어요. 가장 부러운 별명이죠. 저는 그걸 보면서 김구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는데 “부자 나라가 되는 것도 원치 않고 강한 나라가 되는 것도 원치 않고 오직 아름다운 문화의 힘.” 그걸 보면서, ‘아, 이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정말 부럽다.’ 지금도 부럽죠. 세계의 양심이라는 별명을 우리도 갖고 싶은 별명이니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반 폰 비히르 한이라는 제보자가 있는데요. 이 사람이 2012년에 유투브를 통해 양심선언을 했어요. 자기가 용병이었다고요. 이집트의 카다피를 위해 일하던 용병이었는데 당시 같이 일하던 CIA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팔메를 죽이면 2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는 양심선언을 했어요. 실제로 CIA 요원이 자신에게 와서 “사람을 죽이려면 뭘로 죽이는 게 제일 좋으냐?”고 해서 무슨 영화를 찍나 하는 마음에 매그넘 35구경을 쓰면 좋고 앞을 갈라놓으면 쐈을 때 누구도 살지 못한다는 식의 내용을 설명해 줬대요.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이 사람이 다시 찾아와 팔메가 자주 다니는 집, 노선, 지인, 팔메의 병력, 일정 등을 주면서 이 사람을 죽이면 2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자신은 거절하고 바로 사민당과 경찰에 신고했고 그 신고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실제로 팔메는 매그넘 35구경에 맞아 죽었죠. 그래서 이 사람의 발언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예요.
그리고 스웨덴의 10대 기업 중 하나가 테드라 팩인데 우리가 먹는 콜드 주스의 팩을 공급하는 회사예요. 전 세계 시장의 6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대요. 엄청 큰 회사죠. 그런데 그 기업의 상속녀가 작년 8월에 “내가 팔메를 죽인 암살범을 안다. 남편과 함께 기업가 모임에 갔다가 그 비밀을 듣게 됐다.”하고 신문기자에게 제보했어요. 그 신문기자에게는 하루에도 몇 건씩 내가 팔메를 죽였다는 메일이 온대요. 그래서 믿질 않았는데 이 사람이 진짜 그 재벌가의 상속녀인 거예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메일을 주고받았대요. 그 와중에도 그 상속녀는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니야? 누가 나 죽이는 거 아니야? 내가 이걸 하다 죽어도 당신은 진실을 밝혀 주길 바란다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 죽었어요. 약물 중독이라고 하지만 모르죠. 어떻게 된 건지. 지금도 팔메의 죽음에 대해서는 미궁에 빠져 있지만, 팔메는 너무나 제거될 만한 이유를 많이 가진 사람이었고 또 그런 삶을 살았어요.
타게 에를란데르와 올로프 팔메가 함께 자료를 살펴보는 모습. 1969년 팔메는 에를란데르의 뒤를 이어 스웨덴 총리이자 사민당 대표가 되었다. 팔메는 에를란데르의 보좌관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그 시기에 사회민주주의자로서 가치관을 정립했다.
스웨덴의 합의주의
스웨덴의 정치를 말할 때 합의주의가 중요해요. 사실 팔메는 합의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요. 팔메 이전 총리인 에를란데르야말로 합의주의를 제대로 보여 주죠. 팔메는 약간 독단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기업가들에게는 암흑기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합의주의라는 것은,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삶에도 녹아 있는 제도예요.
제가 스웨덴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글로벌 이코노미 수업에서 들은 에피소드가 있어요. 인도에 안드라 프라데시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2004년 BBC에 뉴스가 났어요. 안드라 프라데시에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농부 3천 명이 자살했다는. 엄청난 숫자죠. 왜 안드라 프라데시의 농부들이 계속 자살하느냐에 대해. BBC에서 보도하니까 다른 여러 뉴스에서 받아썼고 사람들이 가서 조사를 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고 하니 그 지역은 원래 밀을 재배하는 지역이었어요. 후에 다국적기업들이 여기에 진출하죠. 그러고는 농부들을 설득했어요. “밀 그만 재배하고 면화로 바꿔라. 그러면 우리가 너희가 재배하는 면화를 다 사주겠다. 씨도 공짜로 준다.” 많이 배우지 못한 농부들이다 보니 한 명이 바꾸면 그럼 나도 바꿔야 하나 싶어서 너도나도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면화 재배를 하려면 비싼 농기구가 필요하거든요. 그러자 기업이 “우리가 대출해 줄게.”라고 했고, 이 사람들은 대출을 떠안고 농기구를 샀죠.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첫해는 씨도 공짜로 받았고 다 사준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둘째 해, 셋째 해를 보냈죠. 그런데 가뭄이 든 거예요. 그래서 농사를 완전히 망쳤어요. 수확량이 없으니 돈을 벌지 못했죠. 그다음 해가 되니 다국적기업이 농부들에게 “이제 씨는 너희가 사. 더는 공짜로 못 준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제품이 좋으면 사고 아니면 안 산다.”면서 가격 흥정도 했어요. 농부들은 대출받아 농기구를 샀는데 그 대출이자가 15퍼센트, 대출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돈을 받기 위해 깡패들이 집을 찾아오고 협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농부들이 겁이 나서 자살하기 시작합니다. 그 숫자가 3천 명이죠. 그렇게 되자 인도의 수상이 안드라 프라데시를 직접 방문해요. 농가를 방문하고 나서 기자회견을 통해 선언합니다. 이 사람들의 평균 대출 금액이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50만 원 정도 돼요. 그래서 “이 피해 가정 모두에 나라에서 150만 원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자살한 가정에는 위로하는 마음으로 50만 원씩 추가로 더 지급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하고 떠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자살하는 농부의 수는 더 늘어납니다. ‘그래 내가 죽어서 우리 가족한테 50만 원이라도 더 받게 하자.’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선생님이 “스웨덴이었으면 절대 이런 일은 없다. 정책은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느리게 해결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제대로 해결했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게 합의주의거든요. 합의주의는 그 일과 상관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문제의 해결책을 같이 논의하는 것이에요. 학생들에게도 이 문제를 해결해 봐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조를 짜서 토론을 시켰어요. 복지사, 상담가, 의사, 농부, 대출 업체 종사자 등 관련된 모든 사람을 불러 토론하고 어떤 식으로 해결하면 좋을지, 나라는 어떤 식으로 지원하면 좋을지, 사람들과 대출 업체는 어떻게 멀리 떨어뜨려야 할지, 이런 것에 대한 다양한 안이 나왔죠. 그래서 후진 정치는 참 슬픈 것 같아요.
스웨덴은 이런 합의주의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학습하거든요. 학교 식당의 메뉴를 바꾸는 데도 그냥 메뉴가 바뀌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토론을 해요. 학생 대표, 학교 대표, 식당 대표, 조리사, 영양사, 주변 레스토랑 대표, 식자재를 납품하는 업체 대표 그다음 운송 업체 대표 등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모여 논의한 다음에 정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스웨덴이 정책을 정하는 걸 보고 “너넨 달팽이야.”라고 말해요. 그렇지만 팔메는 “그래 우린 달팽이야.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린 그 어떤 나라보다도 멀리 나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죠. 우리가 말하는 합의주의가 그냥 노사정이 모여서 끝날 일이 아니라 해당 문제와 상관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할 수 있는 문화를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학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한국에서 공부하다가 스웨덴에 처음 갔을 때는 친구들이 시험 날 “공부 많이 했어?”라고 물으면 저도 모르게 “아니 잤어.” 이렇게 대답했어요, 공부를 되게 많이 했는데도.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몸에는 경쟁의식이 배어 있었던 거죠. 그다음에 시험을 볼 때 “아 정말 미치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막 달려와요. “수정, 왜 그래?” “아 정말 모르겠어.” 그러면 친구들이 “야, 이거 내가 정리한 노트인데 봐. 내가 가르쳐 줄게. 설명해 줄게.” 이래요. “이거 네가 정리한 건데 나 줘도 돼?” 그러면 “그럼, 너도 A 받고 나도 A 받으면 좋지.” 이래요. 시스템이 거긴 절대 평가고 우리 상대평가예요. 우리는 서로가 다 경쟁자잖아요. 그런데 거긴 다 잘하면 다 패스할 수 있고 아니면 다 불합격할 수도 있어요. 서로 협업하고 팀워크로 일하는 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돼있고 교육에서는 약자를 기준으로 삼아요. 지금은 스웨덴이 우리나라의 경쟁 시스템이나 영재 발굴 시스템을 배우겠다고 오지만, 그래도 항상 약자가 기준이기 때문에 수업 중에 “저 이해 안돼요.” 그러면 그 아이가 이해된다고 할 때까지 선생님이 안 넘어가요. 솔직히 먼저 이해한 사람은 재미가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단점은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다수가 기준이지만 스웨덴은 가장 약한 사람이 기준이라는 건 중요한 차이점인 것 같아요.
1985년 가을 총선 때 연설하고 있는 팔메의 모습. 이는 이듬해 암살당한 팔메가 치른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팔메의 국내 정치
팔메의 국내 정치에 대해서 잠깐만 언급하면, 사실 스웨덴의 복지 제도는 에를란데르 시절에 주춧돌이 다 놓였어요. 팔메가 한 것은 이 복지 제도의 기본 단위를 개인으로 바꾼 것이에요. 예를 들면, 독일 등 대부분이 복지 제도의 수혜 또는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 단위로 집계하거든요. 만약 가난한 할머니가 있는데 부양가족이 있으면 혜택을 받을 수가 없잖아요. 스웨덴은 모든 것이 개인이에요. 내가, 이 땅에, 고아로 아무것도 없이 장애아로 태어나도 내가 먹고 자라고 공부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있어서 나라가 다 책임지죠. 그래서 가족과 상관없이 개인에게 수혜가 맞춰지도록 된 시스템이에요. 우리는 지금 선택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저는 논문에서 감동을 받을 때가 몇 번 있어요. 특히 감동적이었던 논문의 내용이 “스칸디나비안 컨트리는 처음부터 선택적 복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선택적 복지라는 것은 얼마나 가난한지를 확인한 다음에 돈을 주는 거잖아요.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나라에 증명하고 돈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 그래서 스웨덴은 국왕의 아이에게도 똑같이 아동 수당을 준다. 고아로 태어나도 똑같은 아동 수당을 받는다.” 이게 보편적 복지의 철학이에요.
우리는 지금도 효율성의 논리로, “왜 이건희 손자에게도 도시락을 줘?”라고 하지만 복지라는 것은 내가 수혜자가 아니면 항상 예산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게 돼 있어요. “내가 받는 혜택이 아닌데 당연히 비용을 줄여야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건희도 자기 손자가 똑같은 교육의 혜택을 받는다면 전반적인 서비스 개선을 위해 이 사람도 관심을 가질 것이고 비용을 반드시 내게 될 거라는 거죠.
이제 마무리할게요. 제가 지속 가능 발전 수업을 들으면서 본 아주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어요. 바닷가에 한 청년이 라디오를 들고 와요. 사람들은 일광욕을 즐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청년이 모래사장에 라디오를 두고 혼자 춤추기 시작하는 거예요. 미친 듯이 춤춰요.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면서 쳐다봐요. 그 사람이 한참 춤추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끼어들어요. 이제 두 사람이 신나게 춤추는 거예요. 이제 사람들이 뭐야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오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춤판이 벌어지는 거예요.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했던 말이 “너희들이 만약에 아주 용기 있는 사람이거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서 첫 번째 사람이 되면 그건 정말 좋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두 번째 사람이 같이 춤춰 줬기 때문에 ‘아, 춤춰도 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라면서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사람 아니면 두 번째 사람이 되라고 해주셨어요. 한국에 와서 찻길을 걷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거예요. 빨간불일 때 아무도 안 건너다가 한 명이 건너면 ‘뭐야?’ 이러다가 또 한 명이 건너면 우르르 건너잖아요. 그래서 심지어 제가 실험을 해봤어요. 홍대의 바에 갔죠. 클럽이 아니라. 친구한테 “춤춰.” 신나는 음악이 나왔을 때. 걔가 혼자서 춤을 추더라고요. 사람들이, ‘뭐야?’ 하는 분위기예요. 그 친구가 춤추면서 눈을 마주치면 다 피해요. 그러다가 이 친구가 춤추는 걸 모두 알아챘을 무렵 제가 투입되는 거죠. 같이 춤췄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서서 팔짱을 끼고 저희를 보면서 “춤춰도 되나 봐.” 이런 소리가 들려요. 잠시 후에 같이 춤을 추시더라고요. 그래서 바가 춤판이 된 적이 있었어요. ‘아 이거다.’라고 생각했죠.
여기 오신 분들이 팔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사회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건 어쩌면 제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H&M한테 “가격 올려. 너희가 방글라데시에 안전장치를 마련해.”라는 식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우리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한 명이 어떤 아이디어를 내거나 행동을 시작하면 “지가 뭔데, 지만 잘났어? 지만 별 거야?”라고 묻어 버리거나 폄하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때 두 번째 사람이 되어 줘서 이 사람에게 힘을 실어 주면 세 번째, 네 번째는 나타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용기 있으신 분이라면 첫 번째 사람이 돼주시고 그렇지 못하면 꼭 두 번째 사람이 돼주시라는 말씀을 드리며,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가 팔메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부럽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노무현은 스웨덴을 왜 부러워했을까. 지상 최고의 복지국가이기 때문에? 아니다. 이것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 복지국가를 만든 정치지도자들의 철학과 삶이 더 부러웠을 것이다. 스웨덴 사민당은 44년의 장기집권을 통해 지금의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페르 알빈 한손, 타게 에를란데르, 올로프 팔메 등 3명의 총리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에를란데르는 옷차림이나 생활방식도 무척 검소했다. 그는 총리가 된 이후에도 스톡홀름 서쪽 외곽 지역에 위치한 방 3개짜리 아파트를 세내어 살았다. 당시에는 총리용 관저가 따로 없었다. 23년 총리를 마치고 나서는 임대주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자 오랜 기간 나라를 위해 일한 원로 정치가를 위해 사민당 동료 정치인들이 갹출해 사택을 지어 주었다. 에를란데르가 유독 검소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직전 총리였던 한손은 임기 중에도 늘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고, 심지어 전차에서 내리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팔메 역시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남들처럼 전철을 타고 다녔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놀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여행객들이 스톡홀름 시내를 걷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스웨덴 총리 팔메더라는 식의 무용담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다.”
에를란데르는 무려 23년간이나 최고권좌를 지켰다. 독재가 아니었다. 자유선거를 통한 집권 연장이었다. 에를란데르는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아내는 1985년 남편이 사망하자 ‘국가 재산’이라며 남편의 볼펜들까지 반납했다. 어느 국민이 이런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겠는가.
팔메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남 좌파’ 출신이었다. 1969년 43세 때 최연소 총리가 된 팔메는 스웨덴 최고의 부촌에서 태어났다. 노동운동가 출신도 아니었다. 노조를 기반으로 한 사민당에서 비주류였던 셈이다. 에를란데르 총리의 비서로 정치권에 입문하여 총리까지 올라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독 팔메를 좋아했다. 왜 그랬을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의 말이다.
“노 대통령은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전 총리 얘기를 자주하며 부러워하곤 했다. 퇴근 후에 경호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기도 해서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결국 부인과 함께 경호원 없이 극장에서 영화보고 나오다가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맞긴 했지만, 업무시간 외의 사생활을 보통사람처럼 자유롭게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 나라를 꿈꿨다.”2) 팔메는 1986년 2월 28일 밤11시21분 지하철역 입구에서 괴한의 총탄에 쓰러졌다.
노무현은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소박한 꿈 하나를 공개했다.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롤모델이 바로 팔메였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시장에, 자갈치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대통령 재임 때도 언론인터뷰나 강연, 혹은 토론 모임에서 팔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퇴임 후에도 팔메를 찾았다.
“스웨덴의 훌륭한 지도자가 1986년 아내와 함께 극장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저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계엄이 선포되고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지도자가 없고, 시민과 같은 높이에서 걸어 다니는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웨덴이란 나라가 부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대통령 본인은 물론 아들과 형들과 동생들 가족들이 구속되는 불행한 역사의 연속에
이번에는 40년 지기라고 믿는 애당초 부터 이상한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 대통령 중심제의 폐해라 하겠습니다.
이제는 제도를 개혁하는 개헌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권력에만 눈먼자들이 자기가 대통령이 다 된것 처럼 날뛰고 촐랑대는 얌체족들을 보면 너무 서글픕니다.
대한민국을 진정한 헌신 애국의 기치로 이끌 지도자 영웅이 갈급한 때입니다.
신도님, 이렇게 긴 글을 단숨에 읽기는 처음이네요. 너무나 긍정적이며 신선한 내용을 올려 주셔서 오랫만에 살맛이 났습니다.이게 스웨덴 정치이구나! 갑자기 스트레스도 풀리고 오히려 강박증에서 벗어나니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일하는 사이사이 TV 뉴스를 들을려고 종일 켜 놓는데 참으로 부러운 나라이네요. 사민당의 합의주의는 상관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해결책을 논의 한다는건 굉장히 합리적이 아닙니까?국민들이 서로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그 의식이 바로 선진국의 바탕이 되었나 봅니다.우리는 정치라는 낱말 자체가 가장 혐오하는 뜻으로 혐오하는 사람, 권모술수, 협잡꾼등의 의미에 빗대어 쓰는데
스웨덴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개념으로 쓴다니 정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은 훌륭했지만 국민들의 합의주의는 하루 아침에 심어진 것이 아니기에 너무 서두르다 실패한 것이라 생각 합니다. 오래오래 시행착오를 거쳐 사회 공동체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이게 정치가 아닌가 합니다.한 사람이 나서서 행하는 생각이 올바를때 둘째, 또 그다음도, 같이 동참하여 받혀주는 국민성 또한 본받을 점이구요. 우리는 너무 경쟁의식이 강해서 누가 잘되면 끄집어 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풍토, 열악한 우리의 환경도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정치모델 ,꿈꿀 수 있는 나라, 스웨덴 국민들께
오랫동안 서로를
무상보, 저도 이 긴글을 옮겨오며 누가 감히 읽을까?라고 생각했지만 드디어 무상보친구가 해내고 말았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는 정치라는 것은 모름지기 올로프 팔메가 지향했던 그 길로 가야한다는 것이 저의 오랜 소망이라 이렇게 옮겨 왔습니다. 소련의 개혁을 지향했던 고르바쵸프 역시 스웨덴 모델을 지향하다가 개혁반대 세력의 표적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곽신도1회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만 합니다. 짧은 재임기간 너무 여려가지를 벌려놓고 무엇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패속에도 건질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심어놓은 인간다운 세상,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지향했던 그 꿈은 결코 소홀하게 다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워낙 강고한 반대세력의 집요한 공격으로 이룬 것이 거의 없지만 세월이 더 지나면 서서히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존중하며 , 양보하며, 때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훌륭한 국민성을 키워온 그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신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