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3년 4개월의 공백기를 접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4월12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원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인공관절 수술을 한 나에 대한 배려였다. 3년이 넘도록 못 만나니 통장도 두둑하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취사는 생략하고 손에 물 안 묻히고 부잣집 사모님 흉내 좀 내보자고 약속했다. 밥은 원주에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집을 찾아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미세먼지가 최악이니 외출을 삼가하라는 문자가 날아온다.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가슴이 뛰었는데 날씨는 겨울 만큼 춥다. 친구들에게 젊게 보이고 싶은 욕심에 백화점에서 옷을 한 벌 샀는데. 봄 단장하느라 폼 잡고 나섰는데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은 겨울이다.
촌사람이 있는 대로 멋을 낸 것 같아 제천역에서 부터 얼굴이 화끈거린다.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이다. 괜히 계절에 맞지 않은 옷으로 촌티를 펄펄 날리는 것 같아 날씨가 야속하다. 서울에서 오는 친구들과 원주역에서 합류했는데 역시 친구들의 의상도 두껍다. 의상 선택을 너무 잘못 선택했구나. 나도 겨울옷을 입을 껄 하고 후회가 된다.
김천에서 자가용을 타고 출발한 친구까지 도착해서 우리와 합류했다. 이번 여행을 책임지기 위해 새로 뽑은 대형차를 손수 운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언제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의 수호천사 노릇을 할지 그저 건강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우리가 전국을 여행할 수 있기만 바란다.
다섯 명중에 한 친구가 감기 기운이 있어 차표까지 사놓고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섭섭한데 못 오는 친구 마음이야 오죽하겠나.
3년 만에 만난 친구들 얼굴이 많이 변했거니 했지만 옛 모습 그대로다. 숙소로 가는 봄의 길목에서 만난 산벚꽃, 도화, 사과꽃 연녹색 이파리의 조화가 신천지에 온 것처럼 환상이다. 아침과는 달리 따사로운 햇살! 친구들과의 만남 자체가 신바람 난다.
원주 오크벨리 리조트로 숙소를 정했는데 모바일 체크인을 하란다. 프런트는 아예 없어졌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심각한 것을 피부로 느꼈다.
친구들은 미세먼지에 민감했다. 오크벨리 조각공원에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산림욕을 즐길 수 있지만 겨우 밥 사먹으러 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골프장 안 숙소는 깨끗하고 뷰가 좋았다.
저녁은 간장게장 정식과 연잎밥 정식. 각자 취향에 따라 먹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예전에 나를 보고 "니가 돼지지 사람이나"했던 내 짝꿍 친구가 이제는 "니 살 좀 찌워야겠다."하며 웃는다. 관절 수술을 받으며 살이 많이 빠지긴 한 모양이다.
식사 후 이제 친구들의 미용 시간(?)이다. 언제나 나를 각별히 챙기는 친구는 미간 이마 팔자주름 패치를 주면서 계속 붙이고 자면 주름이 엷어진단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다니~! TV에 나와서 떠들어도 생업에 종사하는 나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노후에 팔자가 늘어진 친구들의 얼굴은 살짝 절여진, 싱싱한 겉절이 같이 보인다. 촌에 사는 내 얼굴은 곰삭은 묵은 지 같은데 말이다.ㅎㅎ
그러나 우리 집은 자고 일어나서 문만 열면 자연휴양림이다. 먹거리는 웰빙 음식으로 서울 살 때 보다 신체 기능은 정상수치보다 좋으니 더 바랄게 뭐가 있냐고 위로해보지만 헛헛하다.
하룻밤을 자고 원주에서 볼거리로 유명한 관광지 몇 곳을 둘러보기로 했지만 미세먼지가 여전히 최악이다. 절대로 외출은 삼가라는 신호음이 울린다.
그냥 입구까지만 이라도 가보자 해서 차로 이동하니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미세먼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풍경이다.
관광지답게 시식하는 곳도 많고 먹거리가 푸짐하다. 이 지역의 후한 인심이 느껴졌다. 집에 있는 남편들을 주기위해 대추말린 간식을 한통씩 샀다.
멀리보이는 구름다리도, 레일바이크 타는 것도 관절 수술을 한 나 때문에 뒤로했다. 막내딸이 추천한 뮤지엄 산이라는 갤러리에 갔는데 아뿔싸! 여러 가지 테마로 그림 감상하는 곳이지만 경로혜택도 없고, 입장료가 4만5000원이다. 간 떨리는 금액이다.
아무리 부자 사모님 흉내를 낸다고 했지만 돈이 아깝다. 다 둘러보려면 2시간 이상 소요되는 곳이라 또 내 다리 핑계로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번번이 나 때문에 가는 곳마다 입구에만 서성이다 돌아오니, 친구들에게 한없고 미안하면서 고맙다. 친구들은 "이번 여행 때 관광은 안하기로 했잖아"하며 위로를 한다. 이래서 친구들이 좋은가 보다.
다음은 박경리 뮤지엄으로 간다. 입장료가 경로우대로 4000원이다. 나도 할매 다리에서 처녀 일자 다리가 되었으니 전부 몸매는 아줌마! 마스크를 쓰고 경로라고 하니 매표원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경로 맞으세요?" 한다. 그 한마디가 천하를 얻은듯 친구들은 기분이 좋아 죽는다.
자연 속에서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느낀다.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했던 공간을 둘러보며 해설사의 꼼꼼한 설명을 들으니 작가의 생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선생은 신인작가들이 와서 글을 쓸 수 있도록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다. 아직도 작가의 조카가 관리하면서 신인 작가들에게 창작공간을 주고 있다.
박경리 작품<토지>와 <김 약국의 딸들>을 학교 다닐 때 감명깊게 읽었다.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그의 작품을 나는 좋아했다. 전시한 작품 '아침'을 여기에 옮겨본다.
◆아침
박경리
고추밭에 물주고 배추밭에 물주고 떨어진 살구 몇 알 치마폭에 주워담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닭모이 주고 물 갈아주고 개밥 주고 물 부어주고 고양이들 밥 말아주고 연못에 까놓은 붕어새끼 한참 들여다본다
아차! 호박넝쿨 오이넝쿨 시들었던데 급히 호스 들고 달려간다 내 떠난 연못가에 목욕하는 작은 새 한 마리
커피 한 잔 마시고 벽에 기대어 조간보는데 조싹조싹 잠이 온다 아아 내 조반은 누가 하지? 해는 중천에 떴고 달콤한 잠이 온다
나의 삶의 일부분 같아 많은 공감을 느끼며 글 쓰는 나의 진솔한 삶도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