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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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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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강물 |
▲ 시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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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외부 전경 ▼ |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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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우측편의 단풍과 측면에서 바라 본 도산서원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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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문화재청 사진) |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강세황(1712∼1791)이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반타석 등을 그렸다. 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애일당·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적혀있다.
여기에는 성호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또한 이 글의 끝 부분에는 1927년 가을 최남선이 쓴 글도 적혀 있다. 서원의 배치, 건물의 크기와 방향 등이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졌으며 건물의 이름도 함께 밝혔다.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마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같이 섬세하게 산과 계곡을 표현하였으며 나무들은 붓을 눕혀 점을 찍듯이 나타내어 당시 유행하던 남종화풍의 초기적 필치를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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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입구 |
▲ 도산서원 입구를 들어서면 보이는 도산서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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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대통령이 기념 식수했다는 금송(錦松) |
▲ 도산서당 입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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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천 |
▲ 정우당 |
천원 지폐 속의 도산서원(구 지폐)과 도산서당(신 지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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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당 |
▲ 도산서당의 도안이 들어 있는 천원짜리 화폐를 들어 보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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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 번째 좌측 사진 속의 금송이 일본 수종으로 확인(2003년 3월)되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니 마느니 하고, 화폐 도안에서 빼는니 마느니 하더니 현재(2007년 11월)도 그 나무는 그대로 있습니다.
2007년에 신권이 발행되면서 도산서원 대신에 도산서당을 넣었는데, 이번에는 도산서당이 아니니 맞니하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아래의 자료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지폐 사진은 한국은행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
신권 "도산 서당 맞다"/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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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기사입력 2007-02-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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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
● 앵커: 1000원짜리 새 지폐에 그려진 도안을 놓고 논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산 서당이 아니라 계상서당이라는 주장이 나오자 이번에는 도산서원 관리사무소가 도산서당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호영 기자입니다.
● 기자: 도산서원 관리사무소는 신권의 그림을 도산서당이라고 주장하며 지형적인 근거를 내놓았습니다.
먼저 나룻배와 시사대다는 낙동강 본류인 도산서당 앞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상 서당 앞은 작은 개울이어서 배를 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계상 점거도의 주변 정치가 퇴계 종택 앞의 도산서원 주변과 흡사합니다.
그리고 계상점도의 지칭은 계상서당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퇴거계상에서 유례한 말을 넓은 의미로 퇴계선생이 머문 곳을 통칭한다는 주장입니다.
● 인터뷰: 당시 계상서당은 신권에 그려진 계상서당의 낡고 비좁아 비가 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기자: 이 같은 논란은 새돈 도안이 발표됐던 1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정선의 계상점거도의 그림이 도산서당이라고 한국은행이 설명한 때가 1년 전, 그러나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을 보고는 계상서당이라고 정정했습니다.
네티즌의 주장은 계상점거도의 퇴계선생의 모습은 1558년 주자서전료 서문을 짓고 있던 때로 그 당시 도산서당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기자: 1년 전부터 서당 이름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지만 한국은행은 철저한 고증을 외면한 채 새돈을 그대로 발행해 또다시 논란이 불붙고 있습니다.
MBC뉴스 이호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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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 정선의 대표작으로 보물 585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그림은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 책자 속에 삽입된 작품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계상서당에서 주자서절요를 집필하시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2007년 초 1000원 신권의 뒷면 배경으로 사용되었으나 지폐에 인쇄된 그림이 도산서당이냐 계상서당이냐의 논란이 발생해 사전 고증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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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서화가인 이황(1501∼1570), 송시열(1607∼1689), 정선(1676∼1759), 정선의 아들 정만수, 이병연(1671∼11751), 임헌회(1811∼1876), 김용진(1883∼1968) 등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연대순으로 묶어낸 서화첩이다.
모두 8엽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순서를 보면, 제1엽은 퇴우이선생진적이라는 그림과 표지글이 있고, 그 뒷면과 제2엽 앞면에 정선의 계사정거도(溪舍靜居圖)가 그려져 있다. 제2엽 뒷면에서 제4엽 앞면에는 이황의『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가 쓰여있다. 제4엽 뒷면과 제5엽 앞면에는 송시열의 글이 있다. 제5엽 뒷면, 제6엽 앞뒷면에는 정선의 그림인 무봉산중(舞鳳山中), 풍계유택(楓溪遺宅), 인곡정사(仁谷精舍) 등이 그려져 있다. 제7엽 앞면에는 이병연의 칠언절구 시와 년기, 서명, 낙관 등이 있고 제8엽 앞면에는 임헌회의 글과 김용진의 글 등이 있다.
이 서화첩의 속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며, 겉종이는 두터운 종이로 만들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모두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어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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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서광명실(위 좌측 사진)과 동광명실(위 우측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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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진도문 |
▲ 도산서원 전교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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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의재(전교당 좌측편) |
▲ 박약재(전교당 우측편) |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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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과 내부에 걸린 편액 전경 |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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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당 측면 전경 |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 및 사주토병(보물 211호) |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은 상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앞면 기둥은 계단 높낮이 때문에 다른 기둥보다 길이가 길다.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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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덕사 정문의 외부와 내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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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너머로 찍은 상덕사 전경 |
▲ 상덕사 전경(문화재청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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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당 뒷편 좌측에 있는 전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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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진각(전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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