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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묵상글 들 ( 연중 9주 목요일-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슬기로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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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9주 목요일-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슬기로움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율법 학자들 중에서 드물게
슬기롭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씀도 들은 사람입니다.
이 두 말씀을 엮어서 이해하면 슬기로운 사람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아야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이와 다릅니다.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을 논합니다.
손해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남을 돕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하는데
오늘 토비트서의 토비아는 아버지 토빗과 마찬가지로 멍청합니다.
아버지 토빗이 남에게 선행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선행을 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역경을 허락하시는데
그런 아버지를 보고도 토비아는 불쌍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제 성무 일도
아침 기도 성경 소구에도 나오듯 토빗은 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지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
굶주린 사람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고
필요 이상의 물건이 너에게 있거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여라.
언제나 주 하느님을 찬양하고 네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가르침대로만 살아도 충분히 착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토빗은 이 가르침 정도를 넘어 사라,
결혼한 일곱 남자를 초야에 죽게 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어찌 결혼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앞의 일곱 남자처럼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르고,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혼을 동정심으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토비아와 비교하면 저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입니다.
모두를 사랑하기 위해서 한 여자만 사랑치 않는다고 하지만
모두를 사랑한다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일 수도 있고,
천국의 자유를 살겠다지만 실은 한 여자에게 매이기 싫어서
결혼하지 않은 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정심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사랑입니다.
너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고통과 불행으로 여기고,
너의 고통과 불행이 너의 고통과 불행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 동정심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가르침과 같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소인의 슬기로움은 목전의 이익을 얻는 데 힘쓰지만
천국의 슬기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사랑 잃지 않으려고 힘쓰며,
아무의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홀로 편하고 자유롭게 사는 데
희망을 두지 않고 좀 멀더라도 천국의 사랑에 희망을 두고 같이 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사랑과 희망은 천국의 사랑에서 얼마나 가깝습니까?
저와 같은 이기주의자가 요즘의 비혼 젊은이들에게 말할 자격이 없지만
요즘 의식 조사에서 결혼을 안 하겠다는 젊은이의 비율이 50%를 넘고,
결혼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고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혹 사랑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토비아는 욕정 때문에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
진정 사랑으로 그리고 기도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이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진정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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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관점”과 그에 따른 “변화”가 요구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이라고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곧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 한 자매”라는 관점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에페 1,10;1고린 1,30)일 뿐, “남”이란 애시 당초 없다는 뜻입니다.
‘한 몸’의 지체로 자신들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또한 “이웃 사랑”은 어떤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표현을 빌리면(새천년기 24항), “이웃”은 나의 일부요, “나”는 “이웃”의 일부가 됩니다.
따라서 이웃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이 되고, 이웃에게 주어진 선물이 자신을 위한 선물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결국, 이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자기”를 살아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내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이웃이 아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이웃을 하느님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토록,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탄생, 새로운 자기”에로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바로 이 사랑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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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빠다킹 신부님.
공무원 시험 대비학원의 한 강사가 합격생과 비합격생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다가 힘들고 우울할 때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합격생은 ‘울면서 공부한다.’라고 하고, 비합격생은 ‘그냥 운다’라고 합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딱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들다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다가는 단 한 번도 일어설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울면서도 공부했던 합격생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울면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613개의 유대교 율법 조항들을 단 하나로, 즉 ‘사랑’ 하나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 따로, 행동 따로의 모습을 통해서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사랑할 수 없는 각종 이유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모든 말씀에 동의하는 율법학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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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할 당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세상을 변화시킬 꿈만 갖고 있었습니다(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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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하게 벗어 던져야 할 것.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집에 늘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 제비 두 마리가 날아와 집을 짓는데, 정말로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며칠을 쉬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진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지은 집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새끼를 이곳에서 낳고 또 키운 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6개월 정도 지나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남쪽 나라로 날아갑니다. 온 힘을 기울여 집을 지었고, 또 많은 기억이 있는 곳이지만 미련 없이 떠납니다.
책 읽다 보니, 누에고치도 딱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물질적인 것에 너무나 집착해서 버리지 못하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래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에 집중하기보다, 세상에만 집중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과감하게 벗어 던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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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온몸으로 사랑하라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20년(폴란드의 철도 기술원 그르제프스키 씨(65))만에,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아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가르침을 주고 좋은 말씀을 하는 존재 그 이상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행동을 통해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과 천국은 별개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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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경천애인, 복음화의 길
오늘은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복음이 전해지던 19세기 말에
순교하였고 20세기 중반에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은 아프리카 복음화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아프리카 주교 대의원들의 특별 시노드 후에 화해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아프리카 교회의 주교와 신부, 봉헌 생활자와 평신도에
보내는 교황 권고 ‘아프리카의 사명(Africae Munus)’을 반포하였습니다(2011.11.19.).
아프리카 교회의 사명은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들이 아프리카를 좌절과 절망으로
몰고 가려던 시기에 희망과 재생의 계기를 주려는”(1994 시노드) 아프리카 교회가
이 대륙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개인 간의 화해와 공동체들 간의 화해를 이루고,
모든 이를 위하여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복음화에 있어서 중요한 초점은 가정입니다.
토착화된 가족 형태와,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
유럽 국가들의 식민정책의 후유증으로 남은 잦은 부족 간 분쟁,
가뭄 등의 자연 재난 등으로 가정들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의 기억은 부족들 사이의 동족상잔, 노예 매매,
식민지화가 남긴 뼈아픈 상처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대륙은 문명을 새로이 이룩한다는 각오로
여러 대립 구도와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와 식민지화에 대처하여야 합니다.
“‘지구촌’이라는 현대 문명 속에서도 세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역시 대화,
평화, 화해의 정신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전쟁, 분쟁, 인종 편견, 이방인 배척 행위가 인간 세계에서 아직도 너무나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아프리카 교회’).
하지만 아프리카의 혼에는 귀중한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그 다채로운 문화들, 풍부한 자원이 담긴
토양 등 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프리카가 지닌 특별한 풍요로움 덕분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존엄을 지니고 일어서려면
하느님께 관한 신앙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루카 8,21)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순명하고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삶에서 정의와 사랑이 피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하느님 말씀과 삶,
믿음과 바른 행위, 경신 행위와 사회적 투신을 하나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한 예언자들의 호소에 걸맞은 증거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복음화에 관한 교회의 사명은 문명 사회의 진정한 시험대입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복음화 사명은 성경, 성전(聖傳), 성사 생활을 원천으로 삼고,
평신도들이 사회교리의 원칙을 사회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아픈 이들, 공동체 안에서 가장 나약하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복음 선포는 아프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초기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복음화의 열정은 마르코 복음사가
덕분에 일어났고 뒤를 이어 “무수한 성인들, 순교자들, 증거자들, 동정녀들”이
수행해 온 것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아프리카 형제자매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교사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모든 대륙, 모든 인종에게 필요한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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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2021년 올해에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두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태어난 아시아 출신의 감독입니다. 아시아인의 정서와 감정이 유럽과 미국의 영화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가 주는 주된 시대정신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온 도시와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나의 능력과 업적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에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봄에 피는 꽃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낯선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웃에게서 믿음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에는 하루하루 삶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늘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가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이 사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의 ‘문명의 역습’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은 너무나 큰 희생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 같습니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버려지는 쓰레기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과연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공지능, 자율 주행 자동차가 우리를 편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행복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인 손실을 이야기합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백신과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곧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어쩌면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면서 우리는 어쩌면 지나치게 타인에 대해서 비난과 비평을 일삼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어쩌면 우리는 말 못하는 생명을 괴롭히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들 착취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수시로 체온을 재면서 나의 사랑의 온도, 나눔의 온도, 희생의 온도는 너무나 식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안전을 위해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으면서 과연 내가 거처할 하느님 나라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자연을 희생하면서 세우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없는 연민과 사랑입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입니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합니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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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
- 하느님 중심의 삶 -
수도원에 30년 이상 정주하다보니 세상의 변화가 한눈에 보입니다. 얼마나 변화무쌍한 세상인지 체감합니다. 앞에는 넓은 들판에 마을이 펼쳐진 동네들이였는데 별내신도시가 들어섰고 곳곳에 즐비한 고층 아파트들입니다. 참 편리하고 빨라진 세상인데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바빠지고 여유도 없어 보입니다. 행복해보이지도 않고 웬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에 그늘져 있습니다. ‘그늘’하니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려있는 글귀도 생각납니다. “올 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여름의 할 일)”
제 경우도 2000년 전과 후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2000년전에는 강론도 친필이었고 받은 편지도 모두 친필이었습니다. 노트북도 핸드폰도 이메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생각되지 않았고 찾아오는 분들도 많았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참 역설적으로 신속하고 편리해진 세상이라면 여유와 평화도 많이 누려야 할 텐데 갈수록 바빠지고 여유없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웃음보다는 긴장한 얼굴이 대부분입니다. 수도원 피정을 다녀간 어느 자매의 진솔한 친필 편지에 감동했습니다.
-늘 따뜻했습니다. 늘 환대해주었습니다.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늘 든든했습니다. 요셉 수도원 덕분에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섰습니다.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않으시고 꺾어진 갈대를 베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 나침판도 없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만났습니다.
구세주가 따로 있나요?!
예수님이 따로 있나요?!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덕분에 용기도 생겼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생각만해도 든든한 요셉수도원입니다. ‘배밭’ ‘불암산’ ‘요셉’ ‘남양주’ 이름만 들어도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슴 깊이 고마움만 가득 담아 갑니다. 모두 모두 건강히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당신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2021.5.31.
감사와 사랑의 진솔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내용이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중 수도원을 만나 살아난 분의 고백입니다. 읽는 순간 ‘경천애인의 수도공동체!’였습니다. 세상의 오아시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개인의 증거보다 공동체의 증거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그리스도의 평화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그리스도의 쉼터에서 쉬고, 그리스도의 배움터에서 배우고, 그리스도의 샘터에서 샘물을 마시고자 옵니다. 이 모두는 수도원의 존재이유를 보여줍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경천애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선입니다. 참으로 경천애인의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갈수록 건강하고 견고한 삶입니다. 대부분의 혼란과 방황, 표류는 중심을, 하느님 중심을 잃어 자초한 경우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 삶의 중심을 확실히 잡아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 물었는데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으로 답해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또 우리 믿음의 수도공동체가 그대로 ‘이스라엘’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경천애인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분명한 우선순위가 하느님 사랑에 이어 이웃사랑입니다. 구별할 수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이 환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감복한 율법학자도 즉시 공감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경천애인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말해줍니다. 613개 율법조항들이 이 가장 큰 계명 하나로 요약됩니다. 말그대로 우리 삶의 중심이, 의미가, 목표가, 방향이 되는 말씀입니다. 참 사람이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사는 길도 가장 큰 계명의 실천뿐입니다. 마음과 몸은,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참으로 경천애인의 가장 큰 계명의 실천이 깊어질수록 확보되는 심신의 건강, 영육의 건강입니다. 경천애인의 사랑이야 말로 우리 삶의 건강에 최고의 식食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경외의 사랑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오늘 화답송 후렴도 참 행복은 하느님 경외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갈림없는 온마음, 온생각, 온정신, 온힘을 다해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 일, 공부 등 우리의 모든 수행에 목숨을 걸고 매진邁進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림없는 사랑의 수행이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이웃을 위한 섬김의 사랑에 올인하게 합니다. 결국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섬김의 이웃 사랑의 열매로 검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참으로 경천애인,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오늘 바로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주님을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너무 자명한 삶의 진리, 사랑의 진리에 어느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였다 하니 너무 당연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어제 주인공 토빗과 오늘 주인공인 그의 아들 토비야가 경천애인의 모범입니다. 말그대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자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없는 어제 토빗의 유언중 계속되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언제나 주 너의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고 너의 길을 올바르게 해 주십사고, 너의 길과 너의 뜻이 성공을 거두게 해주십사고 그분께 간청하여라.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얘야, 이 분부를 늘 기억하고 네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하여라.”(토빗4,19)
“얘야, 우리가 가난하게 되었다고 해서 두려운 생각을 품지 마라.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모든 죄악을 피하며 주 너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면, 큰 재산을 얻을 것이다.”(토빗4,21)
오늘 제1독서 말미에서 토비야와 사라의 신혼부부가 잠자리에 들기전 토비야의 기도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사랑이 우선입니다. 하느님 경외의 사랑과 사라를 통한 이웃 사랑의 일치가 참 절묘합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마지막 구절의 기도 분위기도 참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아멘. 아멘”하고 함께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토빗8,9ㄱ). 마침 교황님의 6월의 기도지향이 ‘결혼의 아름다움’이며 그 전문을 인용합니다. 공동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기도지향입니다.
-“특히 이 힘든 시기에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는데 진실입니까? 결혼하여 함께 삶을 나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렵고 복잡한 시대 결혼 여정은 쉽지 않을 수 있으나 노력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이 긴 삶의 여정중에 남편과 아내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동반해 주십니다. 결혼은 사회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태어난 성소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준비를 요하는 각자 남은 삶에 대한 의식적 결정입니다.
결코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꿈을 즉 사랑의 꿈을 꾸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 꿈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원을 바라며 결혼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사랑안에서 너그럽게, 충실하게, 인내로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보다 가치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불어together’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이 경청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더불어 부부 여정의 삶 또한 경천애인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순교자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아프리카 순교성인들의 순교상황을 대하면서 순교의 죽음은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이자 경천애인 사랑의 절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온마음과 온정신,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 불의한 권력에 희생된 19세기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성인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경천애인의 사랑을 통해 날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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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최우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들려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모든 계명 중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첫째는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만연한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삶의 최우선으로 삼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정 제도나 신분에 속하지 않은 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칫 이상주의자나 현실 부적응자, 광신자로 치부될 위험까지도 있지요.
세상은 자기들이 자행하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 양심을 압박하는 하느님과 그분 자녀들이, 세상 한구석에서 그저 조용히 자기들끼리 특정 양식을 공유하며 신앙생활을 문화 양식의 일환 정도로 꾸려나가길 원합니다. 세상이 하느님 대신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재물과 명예, 권력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한갓 우상일 뿐이니 불편하기 그지없겠지요.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하느님 사랑에 이어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이웃 사랑입니다.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타자에게 열려 있는 연민과 헌신의 마음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또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이미 자신과 타인이 별개가 아닌 까닭입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힘이 들게 됩니다.
반면 세상이 첫째로 추구하는 우상에 매이게 되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재물 앞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최대로 추구하는 이윤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체제 안에서 누군가를 도구화하고 착취한 결과물일 때가 많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산업재해들이 그 단적인 증거지요.
권력이 최우선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힘의 원리에 편승하게 되면 사람은 자꾸 뒤로 밀리게 마련입니다. 또 평소 별볼일 없(어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는 가난한 이들의 지지를 실탄 삼아 누리는 영광은 사람을 그저 이용할 뿐이지요. 우상이 첫째인 사람에게 이웃 사랑은 더 많은 걸 얻기 위한 보여주기 이벤트일 뿐이지요.
제1독서 대목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낳은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토빗 6,9)
토비야는 일곱 명의 신랑이 혼인 신방에서 죽어 나간 사라의 일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그녀와 혼인하기 두려웠지만, 라파엘의 권고의 말을 듣고 "그 여자를 매우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게"(토빗 6,18) 됩니다.
"여보, 일어나구료.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토빗 8,4)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결심한 토비야는 장인이 될 라구엘의 만류에도 혼인을 결행하고 사라와 함께 이처럼 기도로써 부부의 삶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특별한 인연으로 서로 엮이는 순간, 인간적인 관심이나 욕정을 뒤로 하고, 모든 생명과 관계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앞에 먼저 무릎을 끓는 모습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토빗 8,7)
토비야의 기도는 자신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여 선택하고 실행했음을 그분께 엄숙히 고백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첫째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사라를 향한 연민과 헌신의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이 사랑은 서로에 대한 구원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과의 사랑이 깊어지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더욱 친밀해지지요. 그러면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사랑이 사랑을 더 두텁고 진실되게 합니다. 이제는 억지로 힘 들이지 않아도 사랑이 알아서 사랑을 낳고 키우는 경지가 될 것이고, 그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데려갈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길에 동반자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지치지 말고, 그치지 말고 사랑의 길을 걸어 사랑을 완성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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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31)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첫째와 둘째,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십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 하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첫째와 둘째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요, '하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 될 수도, 분리 되어서도 안 되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하느님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 낼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로 토빗기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독서 안에서 우리는 토빗과 사라와 그리고 사라와 하나가 되는 토빗의 아들 토비야가 주님께 올리는 간절한 사랑의 기도를 만납니다. 그들은 이 기도를 통해 새롭게 다시 살아나고,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토빗의 유언입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암흑에 빠져들지 않게 해 준다. 사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빗4,10-11)
분리 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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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첫째가는 계명
오늘 복음 말씀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인가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너무 많고 분명해서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가지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1코린 1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주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러한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고 축복해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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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장 큰 계명.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1)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먼저 강조하신 것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재물에 관한 가르침에 바로 연결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말씀에서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함께 섬기면 안 된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나는 양쪽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양쪽을 똑같이 사랑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가 아닙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이나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은
모두 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재물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서 하느님 섬기듯이 섬기는 것은, 재물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되고, 동시에 하느님을 재물 위치로
떨어뜨리는 짓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가 됩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유혹했을 때(마태 4,8-9),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이 세속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영광으로 유혹했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은 사탄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에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탄에게 경배하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사탄에게 경배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과 세속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영광을 하느님처럼 섬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도 죄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과 남보다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혼자서만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와 사탄에게 경배하는 죄를 함께 짓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이웃 사랑 실천도 진실하게 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선이지만, 남들보다 더 부유한 부자가 되려고
하느님도 외면하고 이웃도 외면한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2)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모든 사랑에도 적용됩니다.)
사랑이란, “목숨까지도 포함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거나,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과 모든 것을 바친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떤 ‘가난한 과부’는 순교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내는 돈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칭찬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넣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부자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일부만 바쳤다고,
즉 사랑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만 바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가난한 과부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재산의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2.8).
그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가진 것을 모두 바쳤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명예욕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재물욕과 명예욕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방해했습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부유한 사람들이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척’만 한 사람들로 성경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전 재산을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부 바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4).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일부만 바치거나
아니면 아예 못 바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거짓 사랑’은 사랑을 안 하는 것보다 더 죄가 큽니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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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이 포함되고, 그 밖에 우리에게 신앙인의 의무로 주어진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나요? “예.”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마음, 목숨, 정신과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몰입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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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한계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에게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누군가를 최대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사랑이 아주 출중하지 못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나의 사랑은 그 상대의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을 길러준 늑대 부모를 완전히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늑대 부모의 사랑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가 사랑을 더 증가시키고 싶었다면 늑대가 아니라 인간 부모를 찾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또 똑같은 예화를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다른 예화를 찾을 수 없어 반복합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후 토마스는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많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모를 사랑해 봐야 그 수준밖에 안 됩니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역시 올바른 예화는 아니지만, 영화 ‘에비타’의 후안 페론의 삶을 보고 싶습니다. ‘에바 페론’, 에비타는 본래 작은 시골의 연극배우였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고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의 한계는 그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비타는 도시로 상경해서 그곳에서 고위층 남자와 사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그렇게 사귀는 사람을 높여가다 결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어 이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골 여인으로 살던 자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크지만, 에비타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많은 사람에게서 거의 성녀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비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돈 주고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머물렀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 사람의 사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녀는 더 높은 단계의 사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먼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께 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의 도박과 외도, 폭력에 못 이겨 이혼을 앞두고 메주고리에로 성지순례를 하러 갔습니다.
밤낮없이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오르내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유산시키고 자신에게 몸과 마음의 커다란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술과 도박을 끊고 묵주를 손에 쥐고 아내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스도는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만큼이 곧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소명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길은 기도와 공부와 희생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하며 또 부모처럼 고생을 해 보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공부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희생으로 그분의 고통을 느껴본다면 결국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부모를, 친구를, 미운 사람까지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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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 교회 성장을 위한 씨앗이요 거름입니다!
유럽 대륙과 인접해있는 북 아프리카 지역과는 달리 동 아프리카 지역의 복음화는 꽤나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내전(內戰)으로 유명한 우간다의 경우 1879년 첫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가톨릭에 우호적이었던 므데시 추장이 세상을 뜨면서 교회는 크나큰 시련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무왕가가 후임 추장으로 등극하면서 피비린내나는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충신이라고 여겼던 부하 므카사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알게 되자, 배신감에 길길이 뛰면서 즉시 참수형에 처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가를로 르왕가가 찬수당한 무카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그 역시 이미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추장 몰래 예비자 교리를 실시했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은밀하면서도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 헌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반 가톨릭 노선을 확고히 한 무왕가였기에, 기를 쓰고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를로 르왕가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이 체포하였습니다. 1886년 6월 3일 적대자들은 가를로 르왕가를 비롯한 신자들의 옷을 발가벗기고 온몸을 동아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은 큰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 그들 특유의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신자들을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동이 터올 무렵 한명 한명 참혹하게 처형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추장과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추장 관내에서 일하던 사람들, 추장의 수행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직속 상관 둘 사이에서 하느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추장 무왕가 입장에서 잘 아는 얼굴들이었고, 자신을 위해 봉사한 사람들이었기에 웬만하면 봐줬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을 끊겠다는 말 한 마디면 사형을 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만을 최우선 순위로 선택했고, 왕의 불순한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참수형으로 어떤 사람은 화형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1920년 가를로 르왕가를 비롯한 우간다 순교자들은 영광스럽게 시복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 교회 성장을 위한 씨앗이요 거름’이라는 말처럼, 그들의 순교 직후 바간다 족들 가운데 5백명이 세례를 받았고, 3천 여명의 예비자들이 쇄도해, 오늘날 우간다 가톨릭 교회를 활짝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순교가 드믄 이 시대, 현대의 순교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오늘날 순교란 순간순간 죽고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죽은 사람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모욕을 줘도 침묵합니다. 멸시를 당해도 침묵합니다. 그저 하느님 자비와 은총만을 바랄 뿐입니다.
현대의 순교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 끝도 없이 내어놓은 일입니다.
뭘 내어놓을 것입니까?
전혀 없을 것 같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내어놓을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시간을 내어놓고, 재능을 봉헌하고, 재산을 나누고,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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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31)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계명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사랑의 여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다.
계명은
사랑의 삶을
만들어간다.
계명은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초대한다.
사랑이
구원이다.
참사랑이
참계명이다.
사랑이 무너지면
욕망과 욕심이
관계의 중심을
차지한다.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들에게
가득 보여주신다.
하느님 사랑을
받은 이가
이웃 사랑도
기쁘게 실천할
수 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사랑이
가장 큰
은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이
빠져있다면
아직도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란
마음을 다하고
사랑이란
목숨을 다하고
사랑이란
정신을 다하고
사랑이란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큰 계명이
나와 너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 안에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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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3.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9주간 목요일제1독서 (토빗6,10-11; 7,1.9-17; 8,4-9ㄱ)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토빗7,17)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토빗8,7)
토비아와 사라의 결혼 이야기(토빗7,9ㄴ-17)는 일련의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먼저 토비아가 아자르야(라파엘)에게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 하고 말한다. (토빗7,9ㄴ)
그러나 라구엘은 일을 천천히 진행시키려하며("오늘 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라") 이미 사라를 아내로 맞이했던 일곱 남자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한다. (토빗7,10-11ㄱ)
토비야가 "제 일을 결정지어 주시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고 않겠습니다."하고 말하며 막무가내로 곧바로 결혼시켜 줄 것을 주장하자,
라구엘은 토비야가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라구엘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면에는 후손에 관한 규정(수혼제)에 관한 신명기 25장 5-10절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이 율법의 정신은 가족 안에서 과부와 그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라구엘은 토비아와 사라를 남편과 아내로 선언하면서 "이제부터는 너는 사라의 오라비이고 사라는 너의 누이다. 오늘부터 사라는 영원히 네 사람이다." (토빗7,11) 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라구엘은 자기 딸 사라를 불러 그를 토비아에게 넘겨주고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혼인 계약서를 쓴다. (토빗7,12-13)
끝으로 토빗기 7장 15-17절에서 라구엘은 아내를 불러 신방을 준비하게 하고, 라구엘의 아내 아드나는 또 한 사람의 남자가 죽어야 할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드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딸 사라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사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다.
한편, 토비아와 사라는 한 몸을 이루기전에 일어나 기도한다.(토빗8,4-8)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한 뒤에 토비아는 우리 모두의 첫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기억하고, 사라를 순수한 마음으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선언한다.
토비아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토비아와 사라는 "아멘, 아멘"(토빗기에서 사라가 하는 유일한 말)으로 기도를 마친다.
역시 악귀를 제압하는 유일한 길은 간절한 기도뿐이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내는 길 뿐이다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마르12,28ㄱㄷ~34)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3)
원래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카르디아'(kardia)는 히브리어 '레바브'(lebab)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는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che;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셰카'(naphsheka)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bekol naphscheka)는 '너의 온 영혼을 다해' (with all your soul)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는 신명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정신성과 정신력을 의미하기에 '목숨을 다하고'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마태22,37참조)로 세분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12장 33절에는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가 '생각을 다하고'로 대치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쉬네시스'(synesis; understanding)는 '지혜', '총명', '깨달은 것', '이해' 등으로 번역된다.전체적인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이스퀴스'(ischys; strengt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with all your strength(might)>,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 전영(全靈), 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절대적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십계명의 첫 부분인 1~3계명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으로서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연적 결과로서의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을 말하는데, 이것은 십계명의 4~10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두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해당하는 '플레시온'(plesion; neighbour)은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살거나 혹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도 모두 포함한다(루카10,25~37).
이제 이 두 가지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번제물'에 해단하는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 whole burnt offerings)는 '전부 불태우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홀로카우토오'(holokautoo)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그리고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튀시온'(thysion; sacrifices)의 기본형 '튀시아'(thysia)는 '희생 제물' 또는 '제사'를 뜻한다. 여기서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는 번제를, '튀시아'(thysia)는 번제 이외의 다른 제사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사무엘 1권 15장 22절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의 교훈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과 순종이 없는 형식적 제사와 제물은 하느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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