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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동쪽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앞에서 바라본 소백산맥 풍광. 끝없이 이어진 능선과 연봉들의 부드러운 곡선이 극락정토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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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살아생전 당대 최고의 문화재 감식안을 지녔다는 평을 받았던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1916~1984)의 글 '부석사 무량수전'의 한 구절이다.
눈이 시리게 푸른 가을 하늘이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을 자극해서일까.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이 글귀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무치게 고마운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내가 한국미술의 특질과 자존심에 대하여 주장한 바의 대부분은 (혜곡) 선생의 안목에 힘입은 것이었다."
우리 문화유산 답사의 대중화를 이끈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혜곡의 유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서문에 쓴 이 글귀도 기자의 궁금증을 부추겼다.
평생 '한국미'라는 화두를 품고 '미학 구도행'에 용맹정진했던 혜곡의 시선을 좇다 보면 그 길 위에서 아름다움의 편린을 엿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최순우 한국미 기행'을 떠났다.
- 천왕문~무량수전 아홉 단 석축…시작은 남서향, 안양루부턴 남향
- 지형 최대한 살린 동선축 절묘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과 처마…자연과 조화 건축철학의 백미
■화엄세계로 가는 구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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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이 자리한 경북 영주시 봉황산 부석사(浮石寺)를 찾은 것은 지난 6일이었다. 추석이 지났지만 산봉우리에만 단풍이 안착해 하산 채비를 하고 있었을 뿐, 산기슭의 절집 주변 숲과 진입로에는 노란물이 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가로수를 제외하곤 아직 녹음의 기세가 꺾이지 않은 상태였다.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 그림처럼 깔린 오색 낙엽이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는' 초겨울이 아닌 탓인지 혜곡이 맛봤던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해맑은 햇살 아래 천연스레 뿌리 내린 가람과 누각, 탑들은 고색창연한 기품을 뿜어냈다. 외려 화창한 가을 날씨가 선사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해서, 혜곡이 던진 '사무치게 고마운 아름다움'이란 화두를 곱씹어가며 산비탈에 질서 정연하게 펼쳐진 절집들을 찬찬히 더듬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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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흘림기둥 |
혜곡이 풀어놓은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먼저 부석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부터 알아야 한다. 화엄종(華嚴宗)의 개조인 의상(義湘)대사가 676년 창건한 부석사는 통일신라 '화엄십찰' 중 으뜸 가람으로, 석가모니의 지혜와 덕이 가득한 극락정토를 지상에 구현하려는 의상대사와 중창주인 원응국사(1307~1382) 등 고승대덕들의 치밀한 설계 아래 탄생했다. 부석사는 천왕문에서 무량수전까지 아홉 단의 석축을 쌓아 가람을 배치했다.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무한한 생명과 지혜(무량수)를 지닌 아미타여래를 모신 무량수전이 그 정점이다.
이는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극락왕생하는 아홉 등급을 나타내는 구품만다라(九品曼陀羅)를 상징한다. 천왕문에서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품, 중품, 상품의 단계를 밟아 극락(무량수전)에 이른다는 설계 의도가 담겨 있다. 모든 분별과 대립이 극복된 불국토인 화엄세계로 가는 구도행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설계 의도의 바탕에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 인공을 최대한 억제해 자연미를 극대화하려는 건축 철학이 깔려 있다. 이런 철학은 무량수전과 같은 국보·보물급 가람과 불상, 석물들은 물론 석축을 쌓는 데 쓰인 돌멩이 하나에까지 스며 있다. 혜곡은 이를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개념화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이라는 비평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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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동선축(점선)이 안양루를 기준으로 틀어진다. 지형을 최대한 살린 건축기법이다. |
■절묘한 가람 배치
설계자들의 의도를 따라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그 세계를 그려보며 가람의 동선을 꼼꼼히 밟아가 보자. 1980년에 세운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기 전 왼쪽 길가에서 당간지주(보물 제255호)를 만난다. 화엄종의 종찰임을 알리는 깃발을 꽂은 깃대를 맸던 이 한 쌍의 지주는 높이가 4.2m로 늘씬한 데다 조각장식이 없어 담박한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천왕문으로 다가가면 크고 작은 돌로 촘촘히 쌓은 석축이 시선을 압도한다. 원래 모양을 살리려고 가공을 최소화한 투박한 돌들이 맞물려 빚어내는 다양한 무늬의 석축 단면과 그 위를 뒤덮은 담쟁이 넝쿨, 짙푸른 이끼가 마음씨 고운 시골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겨 수직적 상승이 주는 위압감을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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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석단 |
천왕문을 나서면 천왕문 석축보다 더 높고 넓은 대석단(大石壇)이 기다리고 있다. 전체 높이 4.3m, 길이가 75m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으로, 9세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위에는 중생들에게 윤회를 일깨우는 회전문이 세워져 있다. 비탈진 산기슭에 층층이 석축을 만들어 가람터를 마련한 것이다. 중생들은 석축 가운데 조성된 돌계단을 오르면서 구도의 어려움과 부처의 자비행을 되새기며 신심을 다지게 된다. 회전문을 통과하면 길 양편에 3층석탑 두 기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쌍탑은 1958년 부석사 동쪽 골짜기의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쌍탑을 뒤로하고 낮은 석축의 계단을 오르면 2층 누각의 높다란 범종각이 나온다. 범종각의 구조는 독특하다. 건물 앞뒤가 긴 구조로, 앞면이 '여덟 팔(八)' 자 형상의 팔작지붕이고 뒷면은 '사람 인(人)' 자 형상의 맞배지붕이다. 이 누각은 1746년 불에 타 이듬해 다시 지었다. 누각 아래는 통로다. 이곳을 지나가면 다음 석축과 누각 천장 사이에 네모꼴의 창이 생겨 무량수전의 관문인 안양루(安養樓)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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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루 |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안양루 밑으로 난 길을 통과하면 극락(무량수전)에 이르게 된다. 안양루에서부터 동선축이 달라진다. 일주문부터 안양루 앞까지는 남서향이었지만, 안양루부터 무량수전으로 이어지는 동선축은 정남향이다. 두 축은 조망 지점도 다르다. 범종각 축은 멀리 도솔봉에, 안양루 축은 가까운 안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산자락을 파내 동선축을 일원화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지세를 살리면서 조망 시야도 넓힌 지혜가 돋보인다. 안양루 아래에는 또 하나의 대석단이 막아서 있다. 높이 4m의 2단 석축으로 계단만도 25개나 된다.
■첩첩 산주름이 극락?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 석축 위에 서면 별천지가 전개된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돌아서서 시선을 정면으로 두면 저 멀리 눈높이에서 소백산맥의 부드러운 능선이 춤을 추듯 끝없이 이어지고, 앞뒤로 첩첩 포개진 봉우리 사이에 옅은 안개가 끼어 마치 무릉도원을 그린 수묵화의 선경을 연출하는 듯하다. 자식을 향해 언제든 활짝 열려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닮았다. 극락이 따로 있을까. 이 풍광을 보며 의상대사를 비롯한 뭇 고승대덕들이 꿈꿔오다 마침내 구현한 불국토가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이 풍광을 바라보는 혜곡은 극락을 지상에 구현한 가람 설계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을 되뇐다.
혜곡의 찬사는 무량수전으로 이어진다.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 1376년 원응국사가 고쳐 지은 무량수전은 친자연적 건축 지혜의 집적소다.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집인 이 가람은 지붕의 하중을 줄여 구조적 안정성과 기능성을 높이면서 자연과 조화하는 탁월한 건축기법이 총동원됐다. 기둥의 아래쪽 3분의 1쯤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 보이도록 한 '배흘림'과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보다 더 높인 '귀솟음'이 대표적이다. 배흘림은 기둥 아래위 굵기가 같을 때 위쪽이 더 굵게 보여 기둥이 앞으로 쓰러질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데 대한 보완책이며, 귀솟음은 지붕이 넓을 경우 처마가 처져 보이는 문제점을 처마선을 살짝 들어올려 해결하려는 대책이다. 혜곡은 이렇게 지어진 가람의 아름다움을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라고 정의하면서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고 극찬했다.
아미타여래는 이처럼 최상의 가람에 모셔졌다. 흙을 빚어 만든 높이 2.78m의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여느 절집처럼 건물 가운데서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건물의 서쪽(왼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방 극락정토에서 동쪽의 중생들을 향해 무변광대한 지혜와 덕으로 깨우침을 주는 자비행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미타여래를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에 돋을새김된 공양보살상은 경배한다. 공양보살상은 살포시 미소 짓고 있다. 공양보살상의 미소는 혜곡이 사무치게 고마워하는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모든 중생을 깨우쳐 이 땅을 극락정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 속에서 하나로 빛난다.
※최순우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내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해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 등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한 뒤 타계할 때까지 재직하며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마쳤다. '한국미술 2000년 전시' 등 대소 규모의 특별 전시를 수십 차례 주관해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 무량수전 뒤 숲 속 베일 속 가람, 조사당·응진전…
- 의상대사 수도처로 짐작
무량수전 뒤편 숲 속에는 일주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공간과는 다른 가람이 있다. 조사당(국보 제19호·사진)과 응진전, 자인당이다. 무량수전까지가 화엄의 세계를 펼치듯 드러낸 공간이라면, 이곳은 의상대사의 수도처로 짐작되는 가려진 공간이다. 의상대사의 명성이 높아지자 통일신라 문무왕이 전답과 노비를 보냈으나 대사는 모두 거절하고 의복과 발우만 지닌 채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조사당은 선종이 풍미하던 9세기 이후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366년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다시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이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맞배지붕이라 위엄을 갖추고 있다. 조사당 내벽에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6폭의 사천왕상·보살상이 있었는데, 최근 보수하면서 떼어내 현재 유물전시각에 진열해 놓았다. 자인당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좌와 광배가 온전한 두 기는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이며, 광배가 없는 가운데 불상은 아미타불이다. 응진전에는 석가삼존불과 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 동쪽 뒤편에는 한 칸짜리 조그만 전각이 있다. 의상대사를 사모하다 자신의 몸을 바쳐 도운 선묘(善妙) 낭자의 넋을 기려 세운 선묘각이다. 선묘는 대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묵은 신도 집의 딸이다. 대사가 귀국하던 날 선묘는 부두로 나갔지만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이 몸이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뱃길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며 바다에 몸을 던지니 소원대로 선묘는 용으로 변했다. 또 대사가 부석사 터를 잡을 때 현재 장소를 물색했으나, 이미 이단의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묘가 커다란 바위로 변해 공중에 떠서 이들을 물리쳐 무사히 절을 지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절 이름 '부석(浮石·뜬돌)'은 여기서 유래했다. 무량수전 서쪽 뒤편에 그 흔적인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