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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보길도(甫吉島) 격자봉(赤紫峰;430.3m)지도
동천석실(洞天石室) 입구에서 올려다본
동천석실(洞天石室)
동천이라는 뜻은 산천이 두루 경치 좋은 곳이란 의미도 되고,
신선이 사는 곳도 되며, 하늘로 통한다는 뜻도 된다.
석실은 석조로 된 거실임은 물론이지만
산중에 은거하는 방이나 책을 잘 보존해 둔 곳이란 뜻도 된다.
안산 중턱의 암벽에 조성한 휴식 공간으로서
석제(石悌)와 석문(石門), 석담(石潭), 석천(石泉),
석폭(石瀑), 석대(石臺) 및 희황교(羲皇僑) 유적이 있다.
고산
그리고 해 저물녘에 차를 끊이는 연기가 선경처럼 보였다 하여
석실모연(石室募烟)이라하고, 부용동 8경이라 했다
낙서재(樂書齋)
고산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나라에서 송금령(松禁令)으로 소나무를 못 베게 하자
잡목을 베어 세간집을 지었다.
낙서재는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낙서재 남쪽에 잠을 자는 무민당(無悶當)이라는 집을 짓고 편액도 달았다.
무민당 옆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동와(東窩)와 서와(西窩)의 각한칸 집을 지었다.
낙서재 뒷편에 소은병(小隱屛)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고산
지금은 낙서재, 무민당, 동와, 서와의 흔적만 남아 있고
귀암(龜岩)의 자리에 민묘 2기만 자리잡고 있다.
보길도(甫吉島) 격자봉(赤紫峰;430.3m)
보길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해 있는 섬으로서, 완도에서 직선거리로 서남쪽 약 19km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전체면적은 약 32,99㎢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약 41km이며, 대체로 단조로운 암석해안이다.
섬내에는 주로 산지가 발달해 있으며, 중앙부에 평지가 좁게 자리하고 있다.
최고봉은 섬의 남쪽에 있는 격자봉(또는 적자봉)인데, 이 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막힘이 없다.
먼저 푸르른 바다에 조각배처럼 떠있는 다도해와 함께 북쪽으로는 1km거리에 있는 노화도 뒤로 해남의 땅끝마을이 바라다 보이고, 서남쪽으로는 추자도와 그 왼쪽 멀리 제주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또한 동쪽으로는 약 4km거리에 있는 소안도 뒤로 청산도와 여수 거문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북쪽으로는 진도와 그 주변의 다도해가 한폭의 그림과 같다.
그리고 이 섬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유적지로 유명한데, 1636년 병자호란 때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이 섬의 수려한 경관에 빠져 세연정(洗然亭)과 낙서재(樂書齋) 등의 건물 25개동과 연못을 만들고,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동네이름을 부용동(芙蓉洞)이라고 이름지으며 10여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 곳이 바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정원인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인데,
이곳에서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와 오우가(五友歌) 등의 유명한 시조(時調)가 탄생되었다.
참고로 섬의 최고봉인 격자봉도 윤선도가 명명하였다.
현재 부용동정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와 명승 제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외에도 섬의 남동쪽 해안에는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과 함께 자갈밭이 해안선을 따라 1.4km 펼쳐져
있는 예송리해수욕장이 있으며, 섬의 동쪽끝에는 조선 숙중때 우암 송시열이 세자책봉 문제로 인해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탄식하며 글을 새겼다는 '글씐바위'가 있다.
보길도라는 이름은 "클 보(甫), 길할 길(吉)"자인데, "섬안에 명당자리가 11곳 있는데, 10곳은 이미 사용되었다"라고 하는 "십용십일구(十用 十一口)"라는 글자를 결합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보길도 개요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섬의 남쪽을
차지한 격자봉은 바로 고산이 은거지로 삼아 살던 곳으로 산 전체를 상록수림이 온통
뒤덮고 있다.
보길도지에 의하면 원이름이 격자봉(格紫峰)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국립지리원 발행
5만분의1 지형도에는 적자봉(赤紫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보길도는 배를 타야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아직 그 호젓함을 다 잃지는 않고 있다.
완도나 해남 땅끝에서 오는 배를 타고 내리게 되는 청별포구에서 부용동을 향해
약 30분 정도 가면 고산이 '어부사시사'를 창작했다는 세연정(洗然亭)이 나온다.
개울을 막아 만든 연못인 세연지에는 1992년 복원한 정자가 있다.
세연정을 나와 보길초등학교를 지나 포장길을 따라 걷다보면 부용리사무소가 나타난다.
부근에는 민박집들이 즐비하다.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그만인 곳이다. 적자봉 아랫마을
부용동은 깊은 산중인 듯싶다. 이곳에서는 동천석실과 낙서재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다리를 건너 오솔길을 따라 20분가량 오르면 동천석실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부용동
마을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고산이 은거했던 낙서재의 터가 과연 명당으로
뚜렷하게 조망된다.
활엽수림의 터널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보면 동백꽃이 화려하게 자태를 뽐낸다.
오솔길 바닥에도 새빨간 동백의 봉우리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동백의 향기를
맡으며 울창한 활엽수림의 터널을 따라 30분가량 오르면 예송리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있는 406봉에 도착한다.
누룩바위에 올라서면 동쪽의 당사도와 복생도, 서쪽의 넙도, 군도, 남쪽으로는 추자도와
제주도, 북쪽으로는 노화도와 횡간도가 모두 보인다. 누룩바위에서 정상까지는 5분 거리.
적자봉 정상은 비슷한 높이의 암봉이 연이어 있어 착각하기 쉽다.
정상에서는 뽀래기재를 지나 보옥리로 내려가는 길과 바로 부용동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보길도(甫吉島)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보길도(甫吉島)는 전남 완도군에 속하는 도서로서 완도에서는 32Km 떨어져있고,
해남 땅끝에서는 12Km 떨어져 있다.
섬의 크기는 동서 12Km, 남북 8Km이고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지역이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이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으며 85세를 일기로
보길도에서 눈을 감았다.
보길도에서 윤석도 유적지는 부용동과 세연정,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등이 있는데....
세연정(洗然亭)은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나는
바개울에 보(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한 인공연못이며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윤선도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윤선도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의 한 사람으로, 서인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피난길에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오우가(五友歌)- 윤선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맑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때가 많은도다
맑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일로 피면서 쉬이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른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은음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지하의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좋아 하노라
《완도 '보길도 甫吉島 격자봉 格紫峰·430m》
<보길도>는 완도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해남 땅끝에서 더 가깝다. 주위에는 노와도 소안도등의 큰섬과 예작과 장사도 등의 작은 섬들이 붙어 있다.
한자 사전에서 보면 보길도의 甫는 클보 크다는 뜻이고, 吉은 길할 길 자로 옛날 풍수지리(風水地理)에의한 길지의 섬 이라는 뜻이다.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며.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 해남군 땅끝에서 12km 떨어져 있다, 교통은 완도와 땅끝에서 카페리호가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하고 있다
남쪽에 격자봉(格紫峰·430m), 동쪽에 광대봉(廣大峰, 311m), 서쪽에 망월봉(望月峰, 364m)등 전역에 산지다. 섬 중앙 부용동쪽에 협소한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3℃,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곰솔 , 팽나무 등의 상록활엽수 250여 종이 자라며 감귤도 재배된다.
'<보길도 甫吉島 이름>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 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깄다. 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가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파자를 풀어 보길도가 되었다.
<격자봉格紫峯> 아침해가 떠 오를 때 산의 색이 붉은 색으로 변하여 적자봉(赤紫峯)이라 하였다. 격자봉이 되었다. 격자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황소가 드러누운 듯한 산세다.
격자봉은 고산(孤山)이 보길도(甫吉島)에 입도했을 때 주산의 형국과 혈맥을 보기 위해 이 산에 올랐다, 보길도에서 제일 높은 해발 430m의 격자봉이다.
섬 중앙에 대형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분지가 형성돼 있고, 격자봉은 이 분지 남쪽에 솟아 있다.
산세가 부드럽고 완만하지만 주능선에 들어서면 뿔처럼 돋은 기암들이 나타나며 산객을 놀라게 한다.
이른 봄부터 동백꽃으로 붉게 물든다.
<윤선도尹善道1587-1671>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은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되어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선유를 즐기며 불후의 명작인〈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남겼다. 85세에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 쓰이는 섬 내의 지명도 거의 그가 붙인 것이다. 동쪽 선백도 바위에는 송시열비 (宋時烈碑)가 새겨져 있다.
<세연정 洗然亭> 고산(孤山)은 3,000여평의 계원(溪苑)에 보(洑)를 막아 600여평의 계담과 250평의 인공연못을 만든 곳이다.
이 세연지는 밑바닥 암반(岩盤)을 이용하여 보를 쌓아 반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동쪽 축대(築臺) 및 계담에서 터널식 수입구로 물이 연못으로 흐르도록 하였다.
제방(堤防)에는 당시 심은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일곱바위의 수석경과(水石景) 사이에 피어있는 연꽃의 아름다움은 자연과 인공의 아름다운 조화가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산은 특히 이곳 세연정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어 악기를 연주하면서 풍류를 즐긴곳이다. 어부사시사는 우리 국문학사상 금자탑이 될 말한 주옥같은 시다.
<동천석실洞天石室>낙서재(樂書齎)에서 마주 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하며 해발 약100m 높이에 안봉 중턱에 1,000여평이 넘는 암석군(岩石群)으로 형성된 곳에,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석대(石臺),희황교(羲皇橋)등 기교한 모양으로 길이7.5m, 폭4.5m 깊이60㎝의 수경조원(修景造原)을 이루고 한칸의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고산은 이곳에서 서책(書冊)을 즐기며 신선(神仙)처럼 소요하는 은자(隱者)의 처소로 여기고 다도(茶道)에도높은 흥취를 느꼈다 한다.
<예송리 흑명석黑鳴石 해수욕장> 예송리 흑명석 해수욕장은 길이 약 1㎞와 넓이 150m 정도에 흑진주(黑珍珠)같은 갯돌로 전 해안에 깔려있다.
파도에 갯돌이 씻겨 내릴 때 천연음악(天然音樂)소리가 마치 돌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하여 흑명석(黑鳴石)이라 한다.
바닷물이 깨끗하고 맑아 여름 피서철에는 남국의 낭만을 즐기며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뒷산 봉우리가 고산이 맨 먼저 올라가 지형과 형국을 살폈던 격자봉(格紫峯)이다.
흑명석 해안에 뻗어있는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40호이다. 소나무, 동백, 후박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청별淸別마을> 이름은 조선 인조대(1623∼1649년)에 부용동에 은둔했던 고산 윤선도가 육지를 왕래할 때 이곳에서 배로 떠났다.
청별(淸別)이란 이름은 윤선도가 명명한 지명. 손님을 맞이하고 보냄에 있어 사심이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이별한다 해서다.
격자봉 (430m)
격자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마치 황소가 드러누운 듯 부드럽고 완만하다. 그러나 산속
으로 들어서면 황소머리에 뿔이 돋은듯이 고만고만한 거리를 두고 기암이 나타나고 그 기암마
다 독특한 모양을 뿜내며 발길을 멈추게 한다.주능선과 정상에 올라 사방을 휘둘러 보는 파노
라마도 시원시원하다. 정상에서 북으로는 분지를 이룬 부용리와 동천석실, 승룡대, 석전대 등
이 샅샅이 내려다보이고, 바다 건너 멀리로는 해남 땅끝과 달마산이 가물거린다.북에서 오른
쪽으로는 노화도, 뒤로 완도 상황봉이 하늘금을 이룬다. 동쪽으로는 예작도, 당사도, 소안도
가 수반위의 수석처럼 자리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한 폭 그림을 이룬다. 남쪽으로는 맑은
날이면 추자도와 제주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보길도의 관문인 청별나루에서 도보로 15분 거
리에 이르면 고산 윤선도의 사적비(사적 제368호)인 세연정이 반긴다.세연정은 우리나라 조
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독특한 발상이 잘 나타난 곳이다. 개울에 보(일명 굴뚝다리)
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에서 어부사시사가 창작되었다. 연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는 1992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 산행지 설명
완도 남서쪽에 있는 노화도에서 약 3.8㎞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노화도·소안도를 비롯한 큰 섬과 예작도·장사도 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섬의 명칭은 섬 내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뜻(十用十一口[甫吉])으로 보길도라 했다.
최고봉인 적자봉(425m) 이외에 광대봉(311m)·망월봉(364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으며, 중앙에 있는 좁은 저지는 농경지로 이용된다. 해안은 소규모의 만이 발달한 북동쪽을 제외하면 드나듦이 대체로 단조로우며,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하며,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나무·팽나무 등 250여 종의 식물이 자라며, 예송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송리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과 예송리 감탕나무(천연기념물 제338호)가 있다. 주민은 대부분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농산물로 쌀·보리·콩·고구마·마늘·무 등이 생산된다. 특히 마늘·보리·쌀 등은 생산량이 많아 농협수매가 이루어진다. 연근해에서는 도미·삼치·멸치 등이 잡히며, 전복·소라 등의 채취와 굴·미역·김 등의 양식이이루어진다.유물·유적으로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을 비롯하여 윤선도가 세운 세연정(洗然亭), 선백도 바위에 새겨진 송시열비(宋時烈碑), 보길나루에서 발견된 조개더미, 예송리에서 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有莖逆刺式石鏃) 등이 있다. 매년 음력 12월 30일 각 마을에서는 당제와 지신밟기를 하며, 큰 나무와 바위에 고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마을의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다. 중앙의 저지대와 연안을 따라 취락이 분포하며, 북쪽 노화도와 마주한 간척지에 행정관서와 상가가 들어서 있다.
능선과 해안선을 따라 소도로가 동서방향으로 나 있으며, 해남군 토말과 완도에서 각각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섬의 남동쪽에 중리·예송리 해수욕장이 있다. 면적 19.32㎢, 해안선 길이 41㎞, 인구 2,978, 가구 1,113(2004).
♣ "보길도(甫吉島)" 는 전남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는 섬으로 노화도 남서쪽 1.1㎞ 지점에 있으며
최고봉인 "격자봉 과 수리봉" 등을 비롯한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면적은 32.99㎢, 해안선 길이는 41.0㎞ 이며 윤선도(尹善道) 유적지로 유명한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4호로 지정 되었다.
'보길도'의 유래는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기고 갔다.
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구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 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 졌다고 풀어 "보길도" 라 불렀다고 한다.
♣ "격자봉(430m)" 보길도의 주봉으로 산 이름은 고산 윤선도가 명명하였다. 원래 이름은 격자봉 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적자봉으로 변하였다. 완만한 등산코스에 습지인 듯 칙칙한 느낌이 들지만 능선에 올라서면
다도해가 시원스럽게 펼쳐 지고 맑은 날이면 추자도, 제주도를 조망할 수 있다. 적자산에는 황칠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기도 하다.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마치 황소가 드러누운 듯 부드럽고 완만하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 서면 황소 머리에 뿔이 돋은 듯이 고만 고만한 거리를 두고 기암이 나타 나고 그 기암마다
독특한 모양을 뿜내며 발길을 멈추게 한다.
♣보길도 격자봉(430m)
고산 윤선도의 유적을 품은 산
섬 하나가 면을 이루는 보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바다에 에워싸인 그림같은 산이다. 육지의 관광명소들은 장소에 구애없이 인파로 들끓고 있지만 보길도는 어렵사리 찾게 되는 곳이어선지 한결 조용하다. 아직도 이 섬은 일부 낚시꾼과 이곳의 은밀함을 즐겨온 소수 단골 탐방객을 제외하고는 찾는이가 드문 편이다. 물을 떠나 바다 한 가운데에 격리된 해방감이야말로 보길도의 자랑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섬 풍광이 아름답다. 배로 건너야 하는 어려움 덕에 지금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지켜진 셈이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32km 떨어져 있고, 해남반도 땅끝에서는 남으로 12km 떨어져 있다. 동서 12km, 남북 8km에 면적이 32.98제곱km인 섬 전체가 온통 상록수림에 덮혀 있다. 섬 중앙에는 대형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분지가 형성돼 있고, 분지 한가운데에 부용리 주민들의 식수원인 수원지가 자리하고 있다.
보길도는 사방 해안이 낚시의 명당이지만, 분지 남쪽에 솟아있는 격자봉(430m)도 명산이다. 격자봉은 지금까지 이 섬으로 계속 탐방객을 유혹해온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지를 산자락에 품고 있는 산이다. 고산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큰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해남 윤씨 집안 대종을 잇는다.
그는 30세 되던 해 이이첨 일파에 대한 탄핵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유배와 은둔으로 이어지는 일생을 보낸다.
51세 되던 해(1637년) 왕(인조)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등지고자 재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정착하기로 하고 부용동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이듬해 난이 평정된 뒤에도 그동안 고초를 겪은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북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고산은 자연과의 친화를 통해 많은 문학작품을 창조했고, 풍수지리, 천문, 음악 등에도 매우 박식했다. 85세로 격자봉 산자락인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감하였으며 자신의 문학적 토양이었던 문소동 골짜기에 몸을 뉘였다.
격자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마치 황소가 드러누운 듯 부드럽고 완만하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서면 황소머리에 뿔이 돋은듯이 고만고만한 거리를 두고 기암이 나타나고 그 기암마다 독특한 모양을 뿜내며 발길을 멈추게 한다.
주능선과 정상에 올라 사방을 휘둘러 보는 파노라마도 시원시원하다. 정상에서 북으로는 분지를 이룬 부용리와 동천석실, 승룡대, 석전대 등이 샅샅이 내려다보이고, 바다 건너 멀리로는 해남 땅끝과 달마산이 가물거린다.북에서 오른쪽으로는 노화도, 뒤로 완도 상황봉이 하늘금을 이룬다. 동쪽으로는 예작도, 당사도, 소안도가 수반위의 수석처럼 자리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한 폭 그림을 이룬다. 남쪽으로는 맑은 날이면 추자도와 제주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보길도의 관문인 청별나루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이르면 고산 윤선도의 사적비(사적 제368호)인 세연정이 반긴다. 세연정은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독특한 발상이 잘 나타난 곳이다. 개울에 보(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에서 어부사시사가 창작되었다. 연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는 1992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세연정에서 보길초등학교 앞을 지나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포장길을 따라 약 1km 거리에 이르면 부용리사무소가 나타난다. 사무소 앞에는 '낙서재 0.7km, 동천석실 0.5km, 곡수당 0.65km'라고 쓰인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앞에서 남쪽 낙서재로 들어서는 수렛길로 발길을 옮겨 5~6분 거리에 이르면 왼쪽 계류가에 안내판만 세워져 있는 곡수당터가 나타난다.
곡수당은 고산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기거했던 곳으로 지금은 옛모습은 사라지고 논밭으로 변해있다. 세연정보다는 규모가 작은 정자였다고 한다. 곡수당터를 뒤로하고 약 100m 더 올라가면 낙서재터에 닿는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살았던 집터이다.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나라에서 송금령(松禁令)으로 소나무를 못베게 하자 잡목으로 집을 지었고, 낙서재 뒷편(남쪽)에 있는 소은병이라는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지금은 낙서재 집터에는 새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잡초만 무성하다.
낙서재에서 격자봉으로 가는 길은 일단 서쪽 방향으로 약 200m 거리를 이동하면 나타나는 산신당골 산길로 올라간다. 낙서재를 보지 않고 산신당골에 이르려면 부용리사무소 앞에서 곡수당으로 가다가 오른쪽 마을을 경유해 산신당골 입구에 이르면 된다.
산신당골 입구에서 남쪽 사면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뚜렷하다. 초입부터 상록수림 숲터널이다. 숲터널을 오르노라면 바람결에 실려온 새콤한 동백꽃 향기가 감미롭다. 숲길 바닥에는 떨어진 새빨간 동백꽃이 즐비하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어둠침침한 숲터널을 따라 1시간이면 벌써 누룩바위가 반기는 격자봉 정상이다. 격자봉은 어느 방향에서나 주능선까지 오르는데 1시간 안팎이면 족하다. 육지의 여느 산과 달리 격자봉은 주능선이 상록수림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정상과 돌출된 바위가 아니면 바다를 내다볼 수 없다.
하산은 대개 동릉으로 20분 거리인 안부에 이른 다음, 북쪽 낙서재로 내려선다. 이 코스가 가장 짧다. 동릉을 더 타고 나아가 큰길재에 이르러 부용리나 예송리로 내려서는 코스도 괜찮다. 정상에서 서릉을 타고 30분 거리인 뽀래기재에 이른 더음, 북동쪽 모중골을 경유해 보길수원지로 내려서는 코스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건각인 경우에는 뽀래기재에서 북릉으로 발길을 옮겨 선창리재~남은사~안산을 경유해 동천석실을 구경하고 부용리사무소 앞으로 내려서도 된다.
동천석실을 두고 윤선도는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했다. 이곳에서 해 질 무렵에 차를 끓이는 연기가 선경처럼 보였다하여 석실모연(石室募烟)이라 하며 부용동 8경에 넣었다.
보길도(甫吉島)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보길도(甫吉島)는 전남 완도군에 속하는 도서로서 완도에서는 32Km 떨어져있고, 해남 땅끝에서는 12Km 떨어져 있다.
섬의 크기는 동서 12Km, 남북 8Km이고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지역이다. (주민 약 3,700명/96년 2월기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이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으며 85세를 일기로 보길도에서 눈을 감았다.
보길도에서 윤석도 유적지는 부용동과 세연정, 낙서재, 곳수당, 동천석실등이 있는데....
세연정은 보길도에서 배를 내려 섬에 7대가 있다는 갤로퍼 택시를 타고 불과 10분이내의 거리에 있었으며
돌아보고 나올때까지 기다려달라하고 이십여분을 대기시켰다가 다시 선착장까지 타고 나올수 있었다.
세연정(洗然亭)은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나는 바
개울에 보(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한 인공연못이며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 산행지 설명
섬 하나가 면을 이루는 보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바다에 에워싸인 그림같은 섬으로 섬 풍광이 뛰어나며. 이 섬은 일부 낚시꾼과 이곳의 은밀함을 즐겨온 소수 단골 탐방객을 제외하고는 찾는이가 드문 편으로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지켜오고 있다.
보길도의 분지 남쪽에 솟아있는 격자봉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 -1671)의 유적지를 산자락에 품고 있는 산이다. 고산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큰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해남 윤씨 집안에 대종을 잇는다. 51세 되던 해(1637년) 왕(인조)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등지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정착하기로 하고 부용동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고 한다.
격자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마치 황소가 드러누운 듯 부드럽고 완만하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서면 황소 머리에 뿔이 돋은 듯이 고만고만한 거리를 두고 기암이 나타나고 그 기암마다 독특한 모양을 뽐내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정상에서 북으로는 분지를 이룬 부용리와 동천석실, 승룡대, 석전대 등이 샅샅이 내려다보이고 바다 건너 멀리로는 해남 땅끝과 달마산이 가물거린다. 북에서 오른쪽으로는 노화도 뒤로 완도 상황봉이 하늘금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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