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우 신성일

1960 -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
대한민국의 연예인.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호는 우석(隅石).
1937년 5월 8일,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강병오와 어머니 김연주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다만, 아버지 강병오에게는 본처가 아닌 2번째 부인이었으며, 전처 사이에 자녀들이 여러 명 있다고 한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며, 데뷔할 때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썼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본명 자체를 강신성일로 고쳤다.
선거에서 본명을 써야 하는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본명 강신영으로 나섰다가 유권자들이 신성일인줄 몰라서 표 손해를 많이 봤다는 게 개명의 동기.
2017년, 폐암 3기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생존률은 40%였다고. 2018년 3월에 '사람이 좋다'에 나온 바에 따르면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으며 또 10월 말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건장함을 보여주는 근황이 전해졌지만 결국 2018년 11월 4일 새벽 2시 30분에 별세했다.
참고로 대부분 말기암 환자는 거동도 못 할 뿐더러 삐쩍 마른 채 사망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경우에는 사망 2주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도 비교적 건강해 보였고, 삐쩍 마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회복되는 기색이 보였다고...
아마 저런 케이스는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1960 -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로 한국영화의 상징 그 자체였다.
중년신사같은 분위기였던 당시의 남자배우들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외모와 긴 기럭지, 강렬한 눈빛으로 대표되는 반항아 이미지에서 나오는 젊은 청년 이미지로 독보적인 스타가 되었다.

당시는 하루에도 영화를 몇 편씩 겹치기로 찍던 시절이라 그가 도대체 몇 편의 영화에 나왔는지 정확하게 모를 정도였다.
유명세나 인지도 출연작으로 본다면 현재의 탑 인기 남자배우 3 ~ 5명은 합친 정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출연료도 단연 탑급으로 당시 배우 출연료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와는 무려 7배나 차이가 날 정도였다.
60년대 배우 출연료가 보통 1만8000원이었는데, 신성일 혼자 45만원을 받았다고 한다ㅎㄷㄷ. (이대근의 인터뷰 증언.)
다만 연기력으로 본다면 평론가들도 썩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다.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야관문: 욕망의 꽃>을 본 관객들이 '이런 전설급 원로배우의 연기가 이다지도 발연기였다니'라고 한결 같이 혹평한 데서 알 수 있듯, 발성도, 억양도 좋은 편이 아니다.
후시녹음의 최대 수혜자.
사투리가 무척 심해서, 대부분 성우 더빙으로 처리했다.
신성일의 목소리 전담은 1960년대에는 성우 이창환이 맡았다가, 1970~80년대에는 성우 이강식이 맡았다.
참고로 이창환은 원래 라디오 드라마 등에서 인기를 끌던 성우로, 신성일 성우 전담이 되고부턴 신성일이 엄청난 다작을 하다보니 자연히 이 분도 엄청나게 바빴다고 한다.
전성기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처음으로 본인 목소리를 녹음한 영화는 '오늘은 왕'으로 이후 드물게 신성일의 본 목소리로 나온건 '이상의 날개'의 이상, '코리언 커넥션'의 형사와 '증발'의 중정부장, '레테의 연가', '길소뜸', '달빛 사냥꾼', '야관문: 욕망의 꽃' 정도.
한창 영화배우로 전성기를 날리던 시절에는 영화에만 집중하며 TV드라마에 일절 출연안하기로 유명했지만,
예외적으로 반공드라마에 여러번 출연한적이 있다.
반공드라마 출연을 안하면 일감이 끊길수도 있던 시절이라서 그냥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고. 어쨌든 본격적인 TV드라마 출연은 여자의 남자가 최초.
2012년 3월 10일 세바퀴에 출연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참으로 생소한 광경. 종편인 TV조선의 토크쇼 노코멘트란 프로에서도 나왔다.
당대에 인기가 워낙 대단해서인지 그와 비슷한 남자배우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신일룡(본명 조수현), 동향(영덕) 출신인 신영일(본명 정인식)이 있다.
특히 신영일은 그의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활약했을 정도로 친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치참여를 하려고 했었고, 5공화국인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유권자가 신성일인 줄 몰라서 민주정의당 봉두완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에 밀려 3위 이하 득표로 낙선. 결국 1990년대에 강신성일로 개명하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16대 국회의원(대구광역시 동구)이 되었다.
16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서명한 사실도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 활동을 하던 중 뇌물수수를 하는 바람에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받았다.
20대 국회의원 강석호는 그의 조카며, 정당 역시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소속.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미남으로 소문난 그는 맨발의 청춘에서 호흡을 맞춘 엄앵란과 결혼했다.
이 엄앵란과의 결혼식은 당대 최고 톱스타 둘의 결혼이라 어마어마한 화제가 되어 이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이를 노리고 지방에서 전문 소매치기단까지 같이 상경했다가 잡힌 게 뉴스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그 과거사를 자서전으로 써낸 적이 있었다.
2011년 발표된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엄청난 과거사를 여과없이, 그것도 상대 여성의 신상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여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동시대 배우들의 회고록이 90년대 이후 발굴되면서 나름 화려했던 경력들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의 예[10]처럼 본부인에게 잘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덮거나, 최은희처럼 본인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지만 밝히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전에도 엄앵란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5, 6번은 이혼을 해야 했다."는 발언을 수시로 하였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신성일의 자서전 공개로 엄앵란은 보살의 영역에 이르렀다.
그나마 2018년 현재에서는 완전히 별거 상태이다.
참고로 MBC 프로그램인 사람이 좋다에 출연한, 신성일의 막내딸(이름은 강수화)은 엄앵란에게 '아버지에게 애인이 생겼으니까 완전히 이혼하자.'고 말했다.
또한 '둘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는 부부는 별개의 인격체라며 자신들처럼 사는 것이 미래 지향적인 부부의 모습이고 불륜 공개에 대해 엄앵란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이후 Y-STAR와의 인터뷰에서 그간의 불륜 폭로 발언이 자신의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난데없이 자택에 도둑이 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6년 부인 엄앵란이 건강프로그램 촬영 도중 유방암이 발견되어 수술 및 치료의 일련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아내의 입,퇴원과 뒷바라지 전부를 손수 맡으며 그 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이 어느정도 사그러진 것과 동시에 중, 노년 시청자들의 애증어린 공감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2017년엔 폐암 3기인 것이 밝혀졌을 당시에는 위로의 댓글보다는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 및 비난 댓글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나, 2018년 11월 4일, 사망 소식이 기사화가 된 이후에는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고, 아내인 엄앵란과 가족에게 위로를 표하는 댓글도 제법 눈에 띄었다.
고인의 죽음 후에, 고인이 투병 중, 엄앵란과 신성일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엄앵란 "우리는 동지, 멋있게 죽어야 돼", 신성일 "마지막까지 엄앵란과 함께 하고 싶어"

2018년 11월 3일 19:30분 경 언론을 통해 그의 사망 속보가 떴다.
순식간에 여러 언론들이 그 사실을 연이어 보도했고,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오르면서 사망이 기정사실화됐다.
하지만 이후 응급실에 입원한 상태지만 사망은 아니라는 정정 기사가 떴다.
가족과 영화배우협회 측은 신성일이 응급실에 입원해 위독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장례식장을 미리 예약했던 것인데 한 기자가 사망으로 보도하면서 (+ 확인도 안하고 기사를 베껴쓰는 행태 때문에) 이같은 오보사태가 벌어진 것.
신성일의 조카인 강석호 의원도 "가족들이 응급실에서 만일을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밝혔다.
언론 보도 후 7시간 뒤인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 경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아들 강석현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1살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는 한국 언론들의 한심한 수준과 허술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 신성일 나무 위키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