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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정말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로힘’,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 그리고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인 ‘여호와’ 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체험한 은혜와 축복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별명을 지어 부른 것입니다. 그 많은 하나님의 별명을 정리해 보면 두 개의 시리즈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시리즈입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이레’, 승리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닛시’,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샬롬’,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라파’, 임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샴마’ 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엘 시리즈입니다. 강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 엘리욘’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 샤다이’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엘 칸나’입니다. 엘 시리즈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다른 이름들과는 성격상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고유 명사가 아니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셔서 알려주신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이름은 다른 이름처럼 그렇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이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수치스럽고 창피한 이름입니다. 그 뜻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보면 질투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심리상태입니다.
창 4장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살인이 일어난 동기가 바로 질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셨지만 자기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그 마음에 질투가 일어났고, 그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보면 질투는 악령에 사로잡힐 때 일어나는 인간 심리상태입니다.
삼상 18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7절을 보면 이 때 여인들이 이렇게 노래하며 환영했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의 마음에 질투가 불일 듯 일었습니다. 그런데 악신이 사울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자 질투심은 극에 달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들어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질투는 타락한 인간,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연약한 모습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이 수치스런 표현을 쓰시면서 이름을 지어 부르라 하셨습니다. ‘엘 칸나’ 즉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을까요? 왜 구지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려주셨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출34:14, 20:5-6, 신 5:9-10, 수 19:19-20 등 의외로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러 곳의 말씀들은 언제나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려 할 때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질투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질투와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나는 것은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 동안 독점적으로 누리던 엄마 아빠와 가족들의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동생을 때리고 꼬집고 학대합니다. 때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아기티를 냅니다. 안 물던 우유병을 빨고 옷에 오줌도 싸고... 한 마디로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아이는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생이 자기가 받아 누리던 가족들의 사랑을 다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밉습니다. 이 아이는 동생이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좀 크거나 가족들의 세심한 배려를 받게 되면 가족들이 자기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질투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질투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합니다. 밉고 화가 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는 연인 사이의 사랑의 질투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 질투가 불처럼 일어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이 클수록 그 질투는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제임스 파커는 하나님의 질투라는 이 말, 이 표현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연인 관계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박사과정에서 상담학을 공부할 때 다루었던 케이스입니다. 금슬이 좋던 부부였습니다. 아내가 어떻게 하다가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게 됐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돌아오라고 애원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남편 애원도 있고, 아이들 생각 때문에 가정을 버릴 수 없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뒤 한 달이 못 돼서 아내는 다시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남편이 예전처럼 정말 잘 대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다 용서했다고 하더랍니다. 처음에는 돌아오라고 애원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다 되도록 왜 나를 버렸냐라든지 그 남자가 나보다 뭐가 더 좋더냐 라든지 따지거나 화를 내지를 않더랍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내더랍니다.
처음에는 감사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깊이 하게 되면서 의심이 생기더랍니다. 과연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것일까? 아이들 때문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체면 때문에 돌아오라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랍니다.
남편은 자기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만 자기가 필요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자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집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분 말씀이 차라리 남편이 화를 내고 자기를 때리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랍니다. 질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향한 사랑을 그 질투 속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투를 느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 길래 하나님께서 이처럼 질투를 느끼실 정도로 사랑하신단 말입니까? 정말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우리 아닙니까? 주님의 질투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의 깊이를 뜨겁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요구를 나타내시려고
하나님의 질투는 성경에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에만도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출 24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예식을 거행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언약서를 낭독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결혼 서약을 하게 하시고 성혼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언약서 안에 첫 번째로 기록하여 강조하신 것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행진을 하다가 모압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모압 여인들의 미모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 여인과 사귀고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여인들에 이끌려 그들의 신전에 가서 제사 드리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염병을 내리셔서 수 많은 사람들이 병이 시달리게 되었고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하나님의 질투심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한 이스라엘 남자가 미디안 여인과 음행을 저지르는 현장에서 창으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습니다. 그 때 민 25:11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리고 13절에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했지만 살다보면 한 눈 팔게 되고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섬기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질투심을 느끼고 행동한 비느하스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질투심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라는 분이 쓴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라는 책을 보면 남자가 느끼는 질투와 여자가 느끼는 질투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성적인 배신감에서 질투를 강렬하게 느끼지만 여자는 남자의 감성적 배신감에서 질투를 강렬하게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남편이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으면서 저지른 불장난같은 외도를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속의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마음속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더라고 육체적인 순결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의 요구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요구를 잘 이해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요구는 남자와 여자의 요구를 합쳐놓은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 것이며 행동으로도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영적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질투심을 함께 느껴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이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정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시려고
질투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 칸나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헬라어로는 젤로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젤로스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여집니다. 하나는 질투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이것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Jealous’입니다. 이 말은 질투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형용사로 쓰여서 우리말로는 ‘질투심이 강한’이라고 번역합니다. 다음은 ‘Zealous’입니다. 이 말은 열심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형용사로 쓰여서 우리말로는 ‘열심인’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은 하나님의 열심과 통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질투 안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려서 톰소여의 모험을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 본 일 있습니다. 허클 베리핀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이 아이는 떠돌입니다. 자기 멋대로 삽니다. 학교 가지 않습니다.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수 안한다고 밥 안 먹는다고 야단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려서 이 아이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내 이 아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엄마가 매일 같이 잔소리합니다. 늦게 일어난다고, 세수 안한다고, 학교 지각한다고... 한 번은 밥을 제대로 먹지 않는다고 엄마가 눈물이 그렁그렁하시더라고요. 성적을 받았는데 90점을 받았습니다. 95점 받지 못했다고 야단이십니다. 95점 받았습니다. 100점 받지 못했다고 야단이십니다....
부모가 된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바로 엄마의 열심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잔소리하십니다. 하라는 것도 많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습니다. 세상에 한 눈을 팔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힘들게 하십니다. 그냥 좀 내버려두시지 왜 그렇게 성가시게 그러시는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죄를 지어도 놔두십니다. 잘못돼도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죄짓고 부정한 짓 저지르면서 나름대로 잘 삽니다. 마치 엄마가 모르는 아이 남의 집 아이 잔소리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설 때 그게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늦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힘들게 하시고, 그래서 잔소리하시고, 그래서 고달프지만 믿음 생활 철저하게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투의 또 다른 면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요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뜨거운 열심이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를 사랑한다. 나만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오늘도 열심으로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