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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계 13: 1-10)
= 육체본능론 =
요 약
영적으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육체의 본능을 가리킨다.
인간 육신의 본능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성도의 육체일지라도 방치하면 하나님 편보다는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세상 편에 더 가까이 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육체는 잘 통제하여 사용하면 좋은 믿음의 도구가 되지만 방치할 때는 그 본능의 속성으로 인해 타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단은 인간의 본능을 최대한 사용하여 타락시키고자 시도한다.
설 명
<육체의 본능>
1. 바다에서 한 짐승 = 본능적인 존재
2. 바다에서 - 나오는데 = 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안됨
3. 뿔이 열이요 = 본능을 이길 자가 없음
4. 머리가 일곱이라 = 가르칠 필요가 없음
5.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 인격을 사로잡는 강력한 권세
6.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 하나님보다 세상과 더 가깝다
7. 표범과 비슷하고 = 신속하고 무자비함
8. 곰의 발 같고 = 능력과 우직성
9. 사자의 입 같은데 = 포식성과 지배력
10. 용이 - 큰 권세를 - 주었더라 = 잘못하면 사단의 도구됨
11.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 양심에 의해 약간 주춤함
12. 짐승에게 경배하여 = 욕망을 위해 삶
13.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 이길 자 없음
14. 큰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 본능의 호소력
15. 마흔 두 달 일할 권세 = 영성 입혀지는 날까지
16.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 통제 못하면 성령을 거슬림
17.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 성도들도 이것 때문에 늘 시험에 빠짐
18.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함
19.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 = 육체에 영성 입으면 통제 가능
2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 = 본능은 조절할 대상
21. 인내와 믿음 = 은혜 받아도 본능은 있음
(본 문)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13:1-10)
(강 해)
이 시간에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환상은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진 후 그 내용인 일곱 대접 재앙이 시행되기 전에 삽입된 일곱 개의 삽경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한 마디로 육체의 본능을 다각도로 계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상이 나오는 것은 앞의 해 입은 여자에서 사단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었듯 이제 바로 그 본능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적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릴 방법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형상의 인간을 넘어뜨리던 방법처럼 미혹을 통한 외부적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단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육신적인 본능을 최대한 약점으로 잡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세상 정욕으로 노리는 것입니다. 기억할 점은 아무리 성화의 수준에 있어도 외부적인 유혹은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이 이것을 알려주니 얼마나 복된 책입니까?
그런데 일곱째 나팔의 내용인 일곱 대접 재앙이 시행되기 전에 이런 문제점들을 계속하여 나열함은 일곱 대접이 암시하듯 강력한 성화적인 방편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특히 바다 모래와 같은 안일에 거할 때 영력은 약해지고 본능이 주장함을 보여 주심입니다. 그러므로 상당한 영적 수준에 오를지라도 성화 방편의 고집적인 준행이 필요합니다.
그럼 본론으로 육체의 본능론에 대하여 본문이 가르쳐 주는 비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대체로 학자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역사상 세상의 권세나 장차 교회를 박해할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가리킴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는 육체의 본능을 가리킵니다. 인간 육신의 본능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성도의 육체일지라도 방치하면 아직은 하나님 편보다는 세상 편에 더 가까운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는 잘 통제하여 사용하면 좋은 믿음의 도구가 되지만 방치할 때는 그 본능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는 약점을 지닙니다. 이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모습이야말로 괴물 중의 괴물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인간의 본능의 허점을 사용하여 타락시키고자 시도합니다.
그럼, 본 환상이 묘사하는 육체의 본능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1. 육체는 짐승과 비슷한 본능적인 존재입니다.
1절에 “한 짐승이 나오는데” 했습니다.
여기 짐승이라 한 대로 인간의 육체는 짐승과 같은 본능의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동물도 인간의 육신도 여섯째 날에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짐승이라 함은 잘 길들이면 우수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훈련 봉사훈련 섬김훈련 인내훈련 경건훈련하시기 바랍니다.
2. 본능은 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1절에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다는 것은 한계선을 넘은 것을 가리킵니다. 잠8:29에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했습니다. 이 한계는 바다 물만의 한계가 아니라 거기 사는 생물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본능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의 한계를 넘게 되면 그 때부터 문제가 됩니다. 기억해야 할 점은 성령께서 도우실 수는 있지만 성령으로도 이 본능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본능은 지혜를 통해서 적절한 조절이 필수적입니다.
가령 서서히 음식을 드는 것도 포만감으로 강한 식욕 본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음식을 통해 성욕도 적절히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음식으로 인해 정욕을 감당치 못하거나 지나친 금식으로 가정 화목을 깨치는 있이 있어선 안됩니다. 혹은 명예욕이나 권세욕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신앙생활을 할 때 조절할 수 있습니다. 본능이란 어느 정도 충족해야 하는 특징이 있으므로 정상적인 생활을 통하여 한계 안에서 실족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아무도 그 본능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1절에 “뿔이 열이요” 했습니다.
본래 뿔은 권세와 능력을 상징하며, 열은 전체 모두 혹은 시험의 수입니다. 즉 본능을 전능성에 비유함은 아무도 이길 자가 없는 강력한 권세요 그래서 늘 시험을 불러옴을 가리킵니다. 연령의 차이에 따라 본능의 표출이 다르며 각인에 따라 약점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이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물질에 약하고 어떤 이는 정욕에 어떤 이는 명예에 약합니다. 이 욕망의 조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4.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선천적 지식이 있습니다.
1절에 “머리가 일곱이라” 했습니다.
여기 머리는 지식의 거점이요, 일곱은 사역의 완전 수입니다. 이것은 본능을 전지성에 비유한 것으로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는 아니지만 이처럼 본능이란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능동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나면서 젖을 빨고 새는 때가 되면 짝짓기를 합니다.
5. 인격을 사로잡는 강력한 왕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1절에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했습니다.
그럼 여기 뿔에 쓴 열 면류관은 무엇일까요? 역시 뿔은 권세와 능력이요, 면류관은 왕을 상징하며, 열 개는 온전히 갖춘 만수 모두수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능이 인격을 사로잡아 왕노릇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욕구를 왕처럼 섬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빌3:19에 “저희의 신은 배요” 했고, 롬16:18에도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했습니다. 여기 배는 욕구의 상징으로 탐욕이 곧 우상임을 보여줍니다.
흔히 적 그리스도 짐승의 통치라는 말을 하는데 종말의 일은 나중에 논하고 우선 이 짐승 같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짐승의 인격 통치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대로 사는 것이 바로 성령을 거슬리는 좁은 의미에서 적 그리스도적인 삶입니다.
6. 이 지상에서 본능은 하나님보다 세상에 더 가깝습니다.
1절에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했습니다.
여기 머리들의 참람된 이름이란 본능의 여러 가지를 탐욕을 암시합니다. 가령 식욕 성욕 명예욕 권세욕 생명욕 재물욕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욕망이 한계를 넘을 때 문제입니다. 이 참람된 이름이란 본능이란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쪽에 더 가까움을 가리킵니다(약3:15).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주의 사역에 도구가 되며 재림 시에 다시 부활하고 영원히 영혼과 함께 영생할 육체이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 그리고 영성을 입기 전에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이 더 가깝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몸 드려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창3:6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한 것처럼 하나님을 망각하고 세상 것이 마음 팔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경고했습니다.
7. 본능은 대단히 신속하고 무자비합니다.
2절에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했습니다.
표범은 대단히 신속하고 무자비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많아서 사냥한 후 혼자 먹거나 먹이가 커도 숨겨두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본능은 아주 신속하고 무자비하고 탐욕적인 속성을 가졌습니다. 사람의 본능에만 부탁한다면 지체될 이유도 없고 본능에 걸리면 조금도 봐주지 않습니다.
8. 본능은 능력과 우직성을 가졌습니다.
2절에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라 했습니다.
곰의 발 같음은 본능의 능력성과 우직성을 나타냅니다. 곰의 발은 취하는 재주도 뛰어나거니와 위력이 매우 커서 치명적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본능에 이끌리면 큰 흉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에서와 같이 신앙까지 팔아먹는 자리에 이르기도 합니다.
9. 본능은 포식성과 지배력을 가졌습니다.
2절에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했습니다.
사자의 입 같음은 본능의 포식성과 지배력을 가리킵니다. 사자는 주리게 되면 사냥을 하는데 많은 양의 먹이를 먹습니다. 이처럼 본능은 만족하기까지는 계속하여 추구합니다. 그런데 사자는 만족히 배를 채우면 주릴 때까지는 사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본능은 어느 정도 채워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본능은 또 다시 막강한 포식성을 드러냅니다.
10. 방치하면 사탄이 할 일을 대행하고 맙니다.
2절에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했습니다.
여기 용은 미혹성을 강조한 사탄의 다른 이름인데 사람을 멸망으로 빠지게 함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본능을 방치하게 되면 본능이 사탄의 그 일을 대행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본능을 이용하여 자신의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일어나는 무수한 흉악한 일들이 인간이 본능을 악용한 결과입니다.
11. 양심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습니다.
3절에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했습니다.
여기 상하게 하는 것은 율법이나 양심을 가리킵니다. 본능이 인격 안에서 통제를 받는 유일한 것은 양심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양심으로 육체의 본능이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지만 결국은 양심을 초월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본능이 늘 양심을 오버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리고 온 땅이 따랐다 했는데 여기서 땅은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즉 양심이 무디어지면 그 때는 전 인격이 본능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12. 사탄은 본능의 욕망을 위해 살게 합니다.
4절에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라 했습니다.
여기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준다 함은 본래 미혹하는 용의 특성을 감안할 때 본능으로 하여금 세상 욕망에 충전되게 함입니다. 그리하여 용과 짐승을 경배하게 함은 본능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함입니다.
엡 2: 2-3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한 것입니다.
13. 본능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4절에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했습니다.
이 짐승과 싸울 자가 없음은 본능의 저력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능은 정당히 충족시켜 줄 성질이지 싸울 성질은 아닙니다. 본능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므로 한계선 안에서 충족하면서 자신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계선을 넘어서는 통제가 필요함은 바울의 고백대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했기 때문입니다.
14. 본능의 호소력은 대단합니다.
5절에 “또 짐승이 큰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했습니다.
큰말이란 목소리가 크다는 뜻이라기보다 본능의 강한 호소력을 암시합니다. 사람은 인간이 무관심 하는 비 본능적인 일에는 아무리 호소해도 그 말은 먹혀들지 않지만 본능에 호소하면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광고하는 사람들은 이런 본능을 이용하여 상업적인 광고를 하는 것을 봅니다. 혹은 무료로 무엇을 주겠다 하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참람된 말이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가리키는데 그런 입을 가짐은 자기 배로 하나님을 삼는 우상적인 본능을 뜻합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본능적 욕망을 하나님으로 삼고 그 욕망을 노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노래의 소제는 모두 육신적 욕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5. 성령 충만할 날까지 본능은 위력을 나타냅니다.
5절에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했습니다.
여기 마흔 두 달 일함은 이 기간은 육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제자들이 그랬듯이 예수를 구주로 깨달아 믿고 자라나되 오순절을 통해서 더욱 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제자들에게 구주 영접과 오순절에 성령 충만은 획기적인 영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영에 속한 자가 됩니다(롬8:9). 그렇다고 육체의 본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육신의 욕망도 잡혀지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삼 년 반이나 1260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마흔 두 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마흔 두 달이 사용되는 곳을 보면 대체로 악이 지배하는 시기들입니다(13:5, 11:2). 그러므로 마흔 두 달 후에는 악의 지배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기간에 1260일처럼 매일 매일 보살피시는 손길이 있고(계11:3, 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처럼 그리스도의 공생애적인 양육하심이 있습니다(계12:14, 단12:7). 이 양육과 악의 지배 시기가 같음은 우리가 영에 속한 자가 될 때 악의 지배도 끝나게 됨을 시사합니다.
16.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면 성령을 거슬립니다.
6절에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했습니다.
여기 짐승이 하나님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합니다. 이는 육체의 본능은 성령과 거듭난 영혼을 거스르는 속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짐승의 장막이 하늘에 있는 자들에게 있다 했습니다. 그 악한 짐승이 하늘에 거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마치 신령한 복을 받은 셈의 장막에 육신적인 복을 받은 야벳이 거하는 배경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거듭나 하늘에 속한 영혼과 함께 아직 성령을 거스르고 훼방하는 땅에 속한 육신을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인격 안에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는 현상을 교훈한 것입니다(갈5:17).
17. 성도들이 이것 때문에 늘 시험에 빠집니다.
7절에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했습니다.
여기 성도를 이긴다는 것은 언 듯 성경적이지 않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한 아무도 이길 수 없으며, 믿음으로 세상도 사단도 나 자신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사본, 에브라임 사본, 풀피리안 사본 등에서는 이 본문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성도를 이긴 이김은 영원한 이김을 뜻하지 않습니다. 즉 신자들이 늘 시험 드는 이유가 이 육신 때문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국 회개하며 영적으로 장성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항상 붙드시기 때문에 결국은 이깁니다.
그러나 짧게 보면 이것이 육신적인 것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성화된 후에도 무의식중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갈2:13).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교훈합니다.
이렇게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않으면 이것이 우리를 실족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자르라는 것보다 조심할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18. 본능이 인격을 지배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7절에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했습니다.
여기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란 협의적으로는 이미 설명한바 있듯이 우리 전 인격 혹은 인격적 요소들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용에게 권세를 받아 본능이 인격을 지배하면 그것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인격과 그 요소가 온전히 다스려져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안일에 빠지면 영은 약해지고 육의 세력이 강해져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19. 성령 충만을 입으면 통제가 가능합니다.
8-9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했습니다.
여기 8-9절은 짐승에게 경배할 자가 누구일지를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으라는 말씀으로 주의 환기는 물론 이 짐승을 이길 힌트를 가르쳐 줍니다. 이 힌트는 몇 가지인데 먼저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면 이길 수 있다는 힌트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다음은 녹명 되지 못한 자들이 짐승을 경배했다는 데서 거듭난다면 이길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요일5:4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했듯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은 이기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5:16-18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다음은 땅에 사는 자가 경배했다는 점에서 하늘에 속한 자는 이길 수 있다는 힌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골3:2-3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는 다 짐승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자가 되면 경배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 이후라는 언급에서도 그 힌트를 봅니다.
이 말씀은 시기를 언급함이지만 이 역시 아담 안의 옛 창조로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라야 됨을 암시합니다(고후5:17). 그것은 육체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심령이 변화될 때 비로소 통제할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롬12:2).
20. 본능과 싸우려고 하면 반드시 지게 됩니다.
10절에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했습니다.
이 말씀이 육체를 뜻함을 알지 못했을 때는 심히 공포스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본능과 싸우려고 하면 반드시 큰 시험에 빠지게 됨을 교훈한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육체의 식욕이나 기타 본능은 창조 시 우리 육체에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당한 요구를 죄로 안다면 그 때 당하는 시험은 끝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본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한계선 안에서 충족과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범주 안에서 충분히 누리시는 것이 하나님이 기쁘신 뜻이요 범죄를 막는 길이기도 합니다.
본래 짐승이란 방치하면 본능의 존재이지만 길을 들이면 우수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본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과 율례 안에서 적절한 충족하면서, 훈련시켜 사단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절한 본능조차 억제함을 신령한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동안 역사 속에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본능을 죄로 여기고 배제했던 사람들의 결말은 크게 실패했거나 기형적인 신앙으로 변했거나 비참함 그것이었습니다.
21. 본능은 임종시까지 늘 관리되어야 합니다.
10절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을 강조함은 본능이란 천국에 갈 때까지 항상 주의해야 할 성질임을 암시합니다. 마치 씨름과 같이 일생 살아가는 동안 이것과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롬8:12-13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 이 짐승과 같고 괴물과도 같은 본능을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육신을 잘 사용하고 잘 관리합시다.
그래서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몸 드려 충성하는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하나님 앞에 큰상을 쌓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