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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불
디모데후서 1장 6-7절 / 차명권 목사
➤“6. 그러므로 내가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게 된 [하나님]의 선물을 네가 불붙이게 하려고 너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노니 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만 센 수 120여 명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기도였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도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세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제자들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부터 영으로 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방언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했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영으로 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모여 있던 곳에서 나왔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입고, 방언을 하며,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새 술에 취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새 술에 취한 것 같다고 사람들이 제자들을 조롱한 까닭은 성령 충만을 입고 골방에서 나와 방언을 하고 복음을 전했던 제자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언을 받고 비명을 지르거나 공격적이나 실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이상한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이상한 불입니다
제자들에게 새 술에 취한 것 같다는 뜻은 성령이 임하고 방언을 하면서 제자들의 영혼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가 왔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따르던 예수가 처형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지냈습니다. 두려움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모든 두려움을 깨치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당연히 두렵고 염려하고 근심과 공포 속에 있어야 하는 예수의 제자들인데,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새 술에 취한 것 같은 참된 평화였습니다.
염려가 떠나갔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담대하게 입을 열어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막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과 평화가 제자들 가운데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상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음에 분노와 억울함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무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참 구원자를 알지 못하고 고통 당하고 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들이 만약 구원자를 알고 참된 평화를 얻고 행복했다면 예수를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고통 가운데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행복하다면 여러분을 공격하고 학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와 무지를 이해하고 용서하셨기에 예수님의 마음에는 분노가 머물 수 없었습니다. 상처가 자랄 수 없었습니다. 분노와 고통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예수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순절 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묶임과 두려움과 상처의 다락방을 걸어나와 사람들의 공격과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방언이 그 가르침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4장 13절입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는 뜻은 이제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과 비밀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의 기도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큰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신약의 성도들인 여러분 가운데, 불같은 성령이 임하시어 친히 가르치시고, 큰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상처와 궁핍이 떠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장래가 아닌 지금 이 시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씻겨 나갈 것입니다. 참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영으로 하는 기도가 있게 되면서, 여러분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잠언 17장 2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근심과 마음의 고통은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뼈를 마르게 합니다. 육체의 질병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시간 성령이 임하여 근심과 두려움과 고통이 물러갈지어다.
근심 대신 즐거움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마음에 즐거움이 있으면 그것이 약이 됩니다. 질병을 치유하는 힘이 됩니다. 성령을 받은 여러분이 생명의 호흡묵상을 통해 현재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 안의 참된 나를 만나고, 삶의 경이로움을 알게 되면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영으로 하는 기도가 불이 될 것입니다.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 성령 안에서 묵상할 때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진정 누구인가입니다. 죽은 옛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 말입니다.
에베소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새사람인지 잘 가르쳐줍니다.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바울이 쓴 서신서 중 가장 영적인 책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부유함을 드러냅니다.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1장에서 너희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 사함을 받았음을 기록하고, 5장으로 가면, 영적으로 아름다운 가족관계까지를 기록합니다. 그 사이에 기록된 내용은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이 고통과 상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복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입니다.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7.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
성경은 여러분의 자리가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임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존재입니다. 그 하늘의 자리에서 계단을 내려와 이 땅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은 자리에서 걸어 내려와 이 땅의 배우자와 자녀와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된 자들입니다.
에베소서의 구조처럼 에베소서 1장의 하늘의 부유함을 소유한 자가 여러분임을 알 때, 그 다음에 바른 걸음이 나옵니다. 그 하늘의 부유함 없이 바른 거름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우리가 영광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자기를 이 땅에 보내셨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주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입니다.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누군가에게 이 일을 하라고 하면, 마음에 쓴 뿌리를 가지고 고되게 하겠지만, 주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길 수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상한 마음을 품어줄 수 있으셨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는 영광을 느끼십니까. 비굴함이나 가식이 아닌, 영광의 모습을 느낍니다. 이 영광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결혼과 자녀와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시는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는 그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생명의 호흡묵상에서도 영과 혼과 육을 현재로 가져올 때 이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걸을 수 있습니다. 온전함을 드러내며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땅에서 하늘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땅으로 부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발걸음 묵상이 이러한 걸음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baptized of the Spirit입니다 이때는 거듭납니다.
둘째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baptized in the Spirit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면,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성령이라는 바다 안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 둘 다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인 것처럼, 성령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성령 안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요한 등 제자들은 언제 거듭났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거닐며 사역할 때였습니까, 아니면 오순절 성령 강림 때였습니까?
요한복음 20장 19, 22절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사역하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직 피를 흘리지 않으셨고 부활하신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입니다. 두려워 문을 닫은 제자들 무리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 성령을 받으라!!!
이때 제자들은 거듭났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baptized of the Spirit 하였습니다.
그들의 신분이 전환되었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 안에서의 세례는 아니었습니다. baptized in the Spirit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입기 위해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령의 세례는 받았지만, 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하며 기다리라. 마음으로 하는 기도 가운데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권능으로 입혀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이 되었고, 제자들은 성령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거듭났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으로 능력을 입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성령이 그들 안에 있게 되었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들이 성령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 있게 되는 것,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고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거듭났을 때는 방언을 하지 않았는데, 성령의 충만을 받자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을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방언을 통해 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가 마음의 힘으로 발휘되지 못할 때, 방언이 그 은사에 불을 붙이는 등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뭐냐면 하나님이 방언을 주셨는데, 그들이 입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방언의 선물을 주셨는데, 받은 자가 그 선물을 뜯지 않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 구석에 방치해둡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를 사모하고, 입술을 열기로 결정하세요. 하나님이 주시는 다른 모든 은사는 수동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방언의 은사만은 유일하게 여러분이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은사입니다.
여호수아 3장 13절입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마치 요르단 강에서 제사장들이 궤를 지고 강을 건널 때와 같습니다. 발이 물에 닿았을 때, 하나님께서 물을 가르셨습니다. 제사장이 믿음의 발을 떼기 전까지는 물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영으로 하는 기도를 말하기 시작할 때, 성령께서 방언을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에 대해 몰랐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거듭남을 주지 못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성령 안에서 세례도 받아 능력과 지혜로 입혀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를 안수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of the Sprit, 그리고 in the Spirit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5-6절입니다.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에언도 하니”
그들은 거듭났고, 성령 충만함을 받았고, 방언과 예언을 하였습니다.
안수함으로 방언이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세례, 즉 거듭남의 세례는 한 번이면 족하고 영원합니다.
그런데, in the Spirit 즉 성령 안에서의 세례, 곧 성령의 충만은 우리의 삶에 반복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매 주일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안수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안수 받을 때에 주시는 선물이 방언인데, 이 방언이 바로 여러분의 은사에 불을 붙입니다. 꺼지거나 식어 있는 은사에 불을 붙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6-7절입니다.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바울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제자 디모데에게도 그랬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구하며 안수했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받자 제자들은 은사들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안수와 다른 은사들이 붙 붙는 것 사이에 방언이 존재했습니다. 방언만으로 은사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방언은 유일하게 능동적으로 다른 은사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은사입니다.
은사가 불일 듯 다시 일어나면 7절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평화가 옵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자라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은 자가 있다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성령의 세례를 받고 거듭났다면,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늘 받으십시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통해 죄 사함과 의롭게 하심의 믿음이 더해지면 성령 충만을 경험합니다. 성령 충만 가운데 있게 되면, 여러분은 영으로 하는 기도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에 불이 붙어, 두려움이 떠나고 평화가 차오르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