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부대 월남 파병
그때가 1965년 쯤일 것이다. 당시 월남 파병은 십자성부대가 먼저 출발하고, 그 다음에 맹호부대가 출발했다. 처음 십자성부대 출발할 땐 다들 월남 가면 죽는 줄 알아 지원병이 없어 강제 차출 했는데 분위기가 살벌했다. 차출된 인원은 전방에서 기차를 타고 3부두에 왔는데, 엠원총에 대검 착검한 눈빛이 달랐다. 병력 이동은 229대대가 맡았는데, 조수석엔 헌병이 타고, 적재함에 호르 씌우고 싣고 다녔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으로 갈 신세인데, 월남 가면 한국돈 필요없다. 받은 봉급 떠나기 전에 다 써야한다. 마침 시내에서 구멍가게 보이자, 적재함에서 운전대로 착검한 총을 쑥 앞으로 들이밀고, 차 세우라 명령한다. 우르르 뛰어내려 가게를 약탈하듯 치약, 칫솔, 편지지, 볼펜 등 사서 따불백에 쑤셔넣었다. 실제 내가 근무한 229대대도 차출 인원이 5명인데, 그들 탈영할까봐 다섯 명을 한 내무반에 재우고, 철조망 근처에 보초 세우고, 밤에 전 차량 라이트 켜서 부대 안팍을 낮처럼 훤하게 밝혔다.
이런 분위기 보면서 나는 월남 가는 것이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남십자성 별빛 아래 베트콩이 밀림에서 총구 겨누고 있는 월남에 가고싶었다. 그 속에서 차 몰고 다니고 싶었고, 생과 사의 분수령 헤매고 싶었다. 헤밍웨이는 1-2차 대전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그래 파월 신청을 했더니, 차출 인원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중대에선 대환영, 네가 가준다니 밥갑다고들 한다. 그런데 신원조회인지 통지인지가 문제였다. 무슨 편지가 집으로 날라갔고, 그걸 받은 아버님이 깜짝 놀랐다. 가면 죽는다는 월남이다. 우리 큰형님은 6.25 때 백마고지에서 전사했다. 교육감 아버님은 한동네 하교장 찾아갔고, 하교장 큰아들은 군기사 감찰실 하중령이다. 하중령은 즉각 항만사령부로 전화했고, 항만사령부는 229대대장에게 전화했다. 이렇게 첫 파월 장병 명단에서 빠졌다. 그래 내가 다시 맹호부대 파월 때 신청했더니, 이때도 감찰실 하중령이 항만사에 전화하여,
‘이 사람들아! 제대병장을 왜 또 파월 명단에 넣어? 그게 말이나 돼? 누가 그 따위로 일해?’
하고 호통치고 쾅! 전화기를 꽃아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사령부는 229대대 정중령에게 신경질을 부렸고, 대대장은 800중대 신현표 중위를 대대로 불러올려 쪼인트 까버렸다. 이 바람에 나의 월남 꿈은 완전히 물 건너가고 말았다.
당시 파월 전투부대는 맹호, 백마, 청룡부대가 있고, 군수지원부대는 십자성부대, 의료 건설 지원단은 비둘기부대, 공군지원단은 은마부대, 탄약과 중장비 해상 수송엔 해군 백구부대가 있었다.
전투사단인 맹호부대 파견 때는 3부두 환송식에서 장병에게 여고생들이 꽃다발 걸어주고, 군악대가 ‘월남 파병 노래’ 연주했다. ‘자유 조국 위하여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을 위하여 님들은 떠났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길...’
나는 전방에서 끌고온 알록달록 위장막을 친 GMC를 LST로 옮겨주면서 그들이 그리 부러울 수 없었다. 거긴 전쟁 냄새가 나고, 전쟁이야말로 내가 얼마나 해보고싶던 체험인가.
미국은 맹호사단 파병 댓가로 155미리 포 200문과 사이드와인드 미사일을 한국에 보냈다. 미사일은 후방에서 쏘면 평양까지 날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3등분한 미사일을 GMC에 싣고 하동에 날랐는데, 선두 캄보이 차는 헌병 백차가 서고, 각 차 조수석엔 실탄 장진한 헌병이 탑승했다. 내 차가 3부두 정문 나설 때 이북 라디오에서 ‘지금 800중대 30호, 36호 트럭이 정문 나온다’는 방송 들을 땐 스릴도 있었다. 고정간첩이 3부두 근처서 무전을 친다고 했다.
155미리 200문 포 인수 때는 박대통령이 3부두에 나왔다. 포 200문 화력은 일개 사단 규모와 맞먹는다고 했다. 그때 3부두에 대한민국 별이란 별은 다 떴다. 육해공군 참모총장, 1,3군 사령관을 위시한 별들이 3부두에 가득하니, 별 하나 단 항만사령관은 똥별처럼 보였고, 우리 대대장 중령은 병장처럼 보였다. 그들이 직접 뛰어다니며 우리 차량 뒤에서 수신호를 해줬다. 운전병들은 전부 A급 피복 갈아입고 155미리 포를 GMC 꽁무니 고리에 걸었다. GMC는 물세차 해서 새차처럼 시다마리 밑까지 빤짝빤짝 광이 났다. 포는 자키로 괴어놓았는데, GMC가 후진하면서 그걸 걸지못하면 쿵 하고 괴였던 포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다. 박대통령은 이때 우리 대대가 차량 정비도 잘했고, 2백문 포 전부를 하나도 실수없이 걸고 나가는 걸 보고 칭찬한 모양이다. 그바람에 그날 작전 나간 운전병은 부대로 돌아오자 대대로 불려올라가 보상 휴가 3일 받았다.
이렇게 마지막 자살 기회 놓친 나는 66년 5월 제대했다. 그바람에 허리 날씬한 아오자이 차림 월남 처녀가 오토바이 타고다니는 것도, 밀림에 굴을 파고 대창과 덫으로 미군 괴롭히는 베트콩 구경 못했다. 그 해는 김신조 일당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전으로, 예비군이란 것도 생기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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