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352년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는 432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됨으로서 교회에 성모 마리아 명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352년 8월 성모 마리아가 아들을 원했던 로마의 귀족인 조반니 부부의 꿈에 발현하여 ‘내일 아침 눈이 내리는 곳에 성당을 지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꿈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자신도 같은 꿈을 꾼, 8월 5일 한여름 아침에 일어나보니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이에 교황은 360년경에 이 언덕 꼭대기에 리베리오 대성당(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또 다른 이름)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성당이 완공되자, 매년 축일 미사에는 돔에서 흰 장미 꽃잎을 눈처럼 떨어뜨리는 것으로 기적을 기념하고 있다. 최초의 성당이 있었던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며, 현재의 교회는 교황 식스토 3세(432-440) 시대의 것이다.
마조레(Maggiore, major)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붙어진 성당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라는 뜻이며, 로마 4대 성당 가운데 하나인 이 성당은 증개축을 거치면서 시대별로 다양한 장식과 문양들이 덧붙여졌다. 성당의 화려한 정면은 174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며, 성당 위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75m의 높이를 자랑한다. 성당의 뒤쪽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식스투스 5세가 1587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당 앞 분수대에 있는 코린토식 기둥은 포로 로마노에 있는 막센티우스 공회당에 있던 것을 1614년에 교황 바오로 5세의 지시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 14m의 기둥 정상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청동 성모상은 베르텔로의 1614년 작품이다. 성당 천장에 도금으로 된 격자무늬 장식은 르네상스의 건축가 줄리아노(Giuliano)가 만든 것으로, 16세기에 스페인의 정복왕 부부가 스페인 출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헌정한 잉카에서 채광한 황금으로 도금되어 화려하기가 짝이 없다. 나폴레옹의 친여동생인 빠올리나 보르게제의 묘와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의 무덤도 대성당에 있다.
대성당 정면 위 안쪽에 있는 모자이크 성화는 교황 니콜라오 4세 때 필리포 루스티라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왼손에 복음서를 펴 보이며,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주는 그리스도를 천사들이 감싸는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 작품 아래쪽의 모자이크는 대성당을 세우게 된 유래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첫 모자이크는 교황이 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귀족 조반니의 꿈 내용이다. 세 번째는 조반니가 교황에게 꿈 내용을 아뢰는 장면이며, 네 번째는 에스퀼리노 언덕 위에 쌓인 ‘눈의 기적’을 표현하고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도 로마의 다른 성당처럼 몇 세기 동안 비바람에 부대끼며 풍화(風化)를 입었다. 도시가 뿜어내는 공해와 높은 습도는 옛 성당들과 성당들이 보유한 예술품들이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16세기 말엽에는 바티칸에 있는 성당 대다수가 새로 개축되었다. 대성당 자체는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 여러 교황에 의해 개축되고 확장되었으며, 1740년에는 교황청의 의뢰를 받은 페르디난도 푸가가 현재의 정면의 외관을 세우고 내부도 대폭 수정하였다.
5세기 작품인 통로의 열주를 따라 있는 벽과 제단 앞의 아치의 천사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모자이크는 ‘성모의 대관식’으로, 시칠리아의 몬레알레 두오모와 라벤나의 산 비탈레 교회의 그것들과 더불어 고대 모자이크의 백미로 불린다. 내부에 총 36개의 기둥들은 이오니아식으로 전부 그리스에서 직접 공수해온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기둥 위에 있는 모자이크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대성당 내부는 길이가 86미터로 4세기 때 지어진 성당의 전형이며, 모자이크 장식과 벽화와 부조는 대성당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내부의 많은 부속 예배당도 볼거리며, 여기저기에는 수많은 예술품이 즐비하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1348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고 여러 번 추가적인 건설 작업을 거쳤음에도 원래의 구조를 보존한 로마에서 유일한 대성당으로, 성모승천축일에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 참고로 1506년 이 성당 부근의 포도밭에서 트로이 전쟁 때 신들의 목마작전에 반대하여 두 아들과 함께 뱀에 물려죽었다는 라오콘 조각이 발견되었다.
성당의 중앙제대 위에는 세바스티아노 토레지아니가 만든 청동상이 네 개 있고, 아래의 지하 경당 입구에서 만나는 예수 탄생의 설화가 담긴 구유 통을 향해 무릎 꿇고 경배하는 교황 비오 9세의 거대한 석상은 1880년 이나치오 야코메티가 조각하여 레오 3세가 설치한 작품이다. 인자한 미소의 그는 1854년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공식 선포한 교황으로 32년이라는 재위에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말 구유였다는 나무 조각이 큰 은잔 같은 상자에 모셔져있는 유물함은 1290년에 포르투갈 대사가 기증한 것으로, 발라디예의 작품이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Santa Maria del Popolo)
유대인들이 던진 돌팔매에 죽은 스테파노가 최초의 성인으로 시성된 후, 초대 교황 베드로부터 31명의 교황이 순교하여 이들 성인의 이름을 단 교회가 곳곳에 설립되어 로마의 교회 수는 천개가 넘는다. 이처럼 교회가 많다보니 제마다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성(聖) 유물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었고, 그들이 모시는 순교 성인의 순교 장면이 프레스코, 유화와 모자이크 등으로 그려져 있어 글을 몰랐던 대부분의 옛 신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예수의 행적과 성인들의 흔적을 찾아 지근거리에서 성 유물을 보려는 순례가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편리한 이동 수단도 거의 없고, 태어난 고향에서 죽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에 봇짐을 지고 나선 사람은 사후 영생을 갈구했던 순례객이었다. 7세기 마호메트의 예루살렘 지배로 성지 순례길이 막히자, 로마는 대체 성지로서 떠오른다. 16세기에 건축되어 17세기 중엽에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방문에 대비하여 새 단장을 했다는 포폴로 문은 지금의 테러미르 역이 생기기 전 까지는 로마로 들어오는 첫 통로였다.
지하철 플라미니오 역에 내리면 바로 포폴로 광장으로 가는 포폴 로 문을 지난다. 좌측에는 성당처 럼 보이지 않는 건물이 외관은 청 빈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투스회 성 당답게 허름한 포폴로성당 이고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광장에 서 코로스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쌍둥이 성당이 교황 알렉산 더 7세가 세운 종탑과 8각의 둥근 지붕이 잘 조화되는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 교회와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교회다. 먼저 두 교회를 가봤으나 별로 볼 것도 없고 마음이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어 로마 방문객에게는 필수코스인 포폴로 성당에 가있어, 대충 보고 포폴로 광장의 분수 가에 잠시 앉았다.
민중 광장이라는 의미의 포폴로 광장에 서면 양쪽에 이국적인 스핑크스가 물을 품어내는 넵튠 분수가 보인다. 광장 중앙의 해시계 역할을 하던 36m 높이의 키 큰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 정복 시에 헬리오 폴리스에서 가져온, 나이가 삼천 삼백년이 넘는 것으로 1589년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이 광장으로 옮긴 것으로 라테라노 대성당 앞의 오벨리스크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민중의 광장이라는 의미의 포폴로 광장에서는 집회도 많이 열렸지만 19세기까지 공개처형이 행해진 끔찍한 곳이라 한다. 관광객이 석양을 즐긴다는 핀투 언덕에 올라 시내를 조망한다.
광장 오른쪽의 외관으로는 수수해 보이는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는 로마시민들의 성금으로 1099년에 교황 파스칼 2세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경당을 도미티아 가족묘 위에 세웠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3세기 초에 이 경당은 성당으로 승격시켜 지금도 아우구스티노회에서 관리를 맡겼다. 1472-1477년에 안드레아 브레뇨에 의해 재건축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본보기로 인정받는다.
1655-60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요구에 따라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 의해 내부는 수정되었고, 아프시스는 브라만테가 개축하면서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어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에서 좀 더 근대적인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개조되면서 로마 부자들의 유명한 매장지가 되었다. 성당에는 카라바조의 회화와 베르니니의 조각 그리고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많은 예술 작품을 소장되어 있어 미술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로마 시대의 대성당은 귀족이나 기부자에게 작은 예배당을 분양하여 예배당을 분양받은 사람은 이 예배당을 가문의 장례식장으로도 사용하였고, 자신의 예배당을 명화와 조각 등으로 치장하여 가문의 세를 과시하려 했다. 1513년 라파엘로는 성당 내의 키지 가문의 예배당을 만들기 시작하고 돔에 천지창조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으나 이 예배당이 완성되기 전에 라파엘로가 사망하여, 1655-60년에 교황 알렉산드르 7세의 명에 의해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르네상스 양식의 옛 성당을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내부를 개축했다고 한다. 이 성당이 들어서가 전에 이곳이 네로황제의 무덤이었으며 18~19세기에는 사형수의 공개처형이 이루어진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성당내의 체라시 예배당에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성모 승천이 가운데에 두고 좀 협소한 공간의 양쪽으로 카라바조의 그림 두 점이 걸려 있다. 마치 양쪽에 호위무사를 거느린 성모의 그림을 이 교회는 더 소중히 여겼을 것이나 지금은 호위무사인 좌우 벽의 카라바조 그림을 보려고 이 성단을 방문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으로 홀대를 받는다. 불이 꺼져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려고 기꺼이 동전 기계에 2유로를 넣고 불을 켠다.
‘베드로의 순교’는 카라바조가 이 교회의 주문을 받고 그린 그림으로, 인부 셋이 베드로의 손발이 박힌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단순한 구조는 이 명작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며 노인으로 표현된 베드로의 시선은 왼손에 박힌 목을 쳐다보고 있다. 검은 배경은 밝게 표현된 베드로의 몸체를 창백하게 보이게 만드는 사실적인 표현은 성화의 새로운 영역을 넓혔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선고 받자 집행관들에게 ‘나는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십자가를 돌려 내 머리가 아래로 오도록 매달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성 바울의 개종’은, 바울이 말에 밟힐 것 같은 위태로운 장면을 그렸다는 이유로 비난에 휩싸여 천대를 받다가 300년이 지나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예수의 사도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던 중, 하늘 에서 빛이 비쳐 강렬한 빛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사울(개종 전의 이름)은 말에서 떨어져 땅에 내팽개쳐지고, 빛의 방향을 향해 두 손 을 들어 항복하고 있다. 그 후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던 그는 암흑 속에서 개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가 교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첫 그림을 주문자가 거절하자, 구도를 다시 잡아 그린 두 번째의 그림이며, 첫 그림은 오데스칼키(Odescalchi) 콜렉션에 소장되어있다.
대성당에는 카라바조의 캔버스 그림인 두 명작 외에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 벽화와 본당 회중석(회중석(會衆席, Aula)의 좌측 두 번째의 키지 경당을 돋보이게 하는 베르니니의 조각상인 ‘하바쿡과 천사’와 ‘다니엘과 사자’을 볼 수 있다. 좌측 측면에 있는 키치 예배당은 라파엘로가 설계하면서 돔에는 모자이크로 천지 창조로 장식하였고, 100여년의 시간을 거쳐 후손인 키치가 교황에 올라 알렉산더 7세가 되면서 베르나르에게 마무리를 맡긴 걸작이다.
이 두 조각은 놓쳐서는 안 되는 명작으로, 예언자 하바국이 추수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중에 나타난 천사가, ‘주변의 시기로 이국(異國)의 사자 굴에 갇혀있는 다니엘에게 그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했으나 ‘가본적도 없는 나라에 다니엘이 누군지도 모른다.’ 하자 천사가 하바국의 머리칼을 잡고 단번에 하바국을 다니엘이 있는 사자 굴로 바로 데려갔다는 성경 이야기를 조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