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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모퉁이의 머릿돌 말씀/ 마가복음 11:27-12:17 요절/ 마가복음 12:10,11 | 2024. 8. 4 | |
마가복음 제 19 강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버려진 돌 임용근 스토리’의 저자 임용근은 한국인 최초 미국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오리건주에서 5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공산당의 자식이라는 낙인과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폐결핵으로 생사를 오가야 했습니다. 이런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청소부로 시작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삶의 지표로 붙들었던 말씀이 오늘의 요절 말씀입니다. 그는 “버려진 돌이라도 하나님은 요긴하게 쓰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권위를 문제 삼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이 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증거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위로와 큰 소망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장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거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물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여기서 이런 일이란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당신이 누구기에 감히 이런 일을 저질렀냐며 따지러 왔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답을 주시는 대신 도리어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세례수여자격증’을 받아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한 이사야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면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백성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두려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나라 국회 청문회에서 자주 듣는 답변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33) 이에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33b)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 드러내셨습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기름진 땅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주로 산에 포도원을 만들었기에 많은 돌을 골라내고 여우나 들짐승이 침범하지 못하게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가장 품종이 좋은 ‘까베르네소비뇽’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즙을 내리는 틀도 만들고 도둑을 막기 위해 망대도 지었습니다. 이 사람이 포도원을 만든 것은 돈을 많이 벌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양질의 일 자리를 많이 만들어 포도원 농부들을 채용하고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그들이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도록 타국으로 갔습니다. 극심한 실업난 속에 다 갖추어진 포도원에 ‘vineyard manager’로 취직한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것도 주인의 간섭 없이 포도원을 관리하고 수확의 때가 이르면 소출의 얼마만 내면 된다고 하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타국으로 떠난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의 카톡 메시지가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음과 힘을 다해 포도원을 잘 관리하고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겠습니다. 우리 포도원 주인 최고! 엄지척! 하트뿅뿅"
일반적으로 포도원은 열매 맺기까지 3~4년은 기다려야 했기에 그 기간 주인은 세를 받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세로 받고자 한 종을 보냈습니다. 주인은 세와 함께 첫 포도 열매로 담근 와인과 감사의 손 편지를 기대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세는 커녕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맞고 돌아온 종 뿐이었습니다. 주인은 너무 황당하였습니다. 주인은 혹시 종이 거칠고 무례하게 세를 요구하여 농부들이 이렇게 대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겸손하고 온유한 문이사야 목자님 같은 종을 다시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도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습니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옷이 찢겨 능욕을 당하고 돌아온 종을 보며 주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동료 종들은 당장 무장하고 쳐들어가 무도한 농부들을 쓸어버리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농부들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을 또 보냈습니다. 그러자 농부들은 더욱 완악해져서 이번에는 아예 죽여서 돌아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다 보냈지만 농부들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포도원 농부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 없이 오랫동안 포도원을 관리하면서 주인에 대한 감사가 식어졌습니다. 자신들은 뙤약볕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주인은 유럽수양회에 간 것이 아닌가 불평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신들이 포도원을 오랫동안 관리했으니 실질적인 주인은 우리라는 교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포도 열매를 보았을 때 소출의 얼마를 드리는 것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포도원 메니저로 취직해서 대출로 집도 사고 중형마차도 구매해 씀씀이가 커졌는데 세를 내야 한다니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의 수확을 모두 가지고 싶은 탐욕이 생겨 결국 세를 받고자 온 종을 때리고 죽인 것입니다.
이쯤 되었으면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사랑하고 처음 아름다운 관계를 너무나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딱 한 사람, 남은 아들을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 뿐인 아들을 그 위험한 곳에 보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만큼은 농부들이 존대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주인의 진심과 인내와 노력을 어떻게 짓밟았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그들은 아들을 존대하기는커녕 유산을 노리고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을 보며 농부들의 결말을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주인은 무골호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결국 농부들을 심판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과연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완악한 농부들이 있는가? 또 이렇게까지 인자하고 인내심 많은 포도원 주인이 있을 까 생각하게 합니다. 농촌 출신의 이모세목자님도 이 같은 일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농부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현실에서도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이런 일이 창조주 하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맡은 자들로 감사함과 두렵고 떨림으로 직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과 탐욕에 빠져 성전을 시장 바닥으로 만들고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를 정결케 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꾀하였습니다.
이 완악한 농부들과 오래 참는 주인의 모습이 역사 속에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게 되어 죄와 우상숭배의 들 포도만 맺고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자들로 변해갔습니다. 이를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 많은 선지자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름다운 자연을 주시고 교회와 가정과 직장 등의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이는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죄범한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명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인간은 포도원 농부들처럼 끊임없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고 심판의 길을 갑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쉽게 잊고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내 노력과 지혜로 된 것처럼 마음이 높아지고 주님께 소출의 얼마를 드리는 것을 아까워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포도원 농부들 같이 심판받지 않는 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잘 감당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출의 얼마를 기쁨으로 드림으로 주인 되신 하나님과 지속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관심은 포도원을 더 키워 세계 제일의 와인 생산지가 되게 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물질이나 큰 역사에 있지 않고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으십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주님과 물질생활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합니다. 주일예배는 시간과 삶의 우선순위의 바른 관계를 맺게 합니다. 말씀 전파하는 삶은 말씀을 먼저 받은 자로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합니다. 우리가 종교지도자들처럼 되지 아니하고 받은 은혜를 감당하여 주인 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하여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당시 건축은 모퉁이에 크고 견고한 머릿돌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돌같이 여겼습니다. 성전에 둘 수 없어 영문 밖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삼일만에 다시 부활시키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기초석이요 교회의 머릿돌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건물 성전 시대가 가고 예수님이 참 성전인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 아닙니다. 구속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누구든지 이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믿는자는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받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6a절은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버릴 때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존귀하게 쓰임 받는다는 역설적 진리를 배웁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움켜쥐고 주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세를 남용하여 사익을 추구하다가 영적인 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주로서의 권리를 내려 놓고 이 땅에 낮아져 오셔서 십자가에 생명을 버리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고 집착하고 놓지 않고자 할 때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집착을 버릴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성도들도 작은 버린 돌 같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대상인 당시 로마 성도들은 로마 사회에서 버린 돌 같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죄악 된 문화를 따라 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권세자들은 그들을 반로마 세력으로 규정하고 중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회의에 빠지고 위축되고 무력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런 로마 성도들에게 예수님도 건축자의 버린 돌같이 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심으로 모퉁이의 머릿돌 같이 되게 하셨음을 드러냈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핍박 가운데도 담대히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실제 지하 처소인 카타콤에 거하며 버린 돌 같았던 그들을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 같이 쓰셔서 로마 복음화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저는 세 달 전쯤 기분이 많이 다운되고 마음이 침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살았는데 계획했던 것들이 마음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고 영적인 열매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기도하며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에게 의사는 뭐라고 할까 궁금하여 상담을 한번 받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갱년기’라고 하였습니다. 의사 의견은 저에게 잠시 웃음을 주어 우울감을 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건축자들에게 버린 바 되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참 위로와 힘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내게 생명 주시고 건강 주시고 가정과 섬길 교회와 양 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동역자의 큰 교통사고도 있었고 아들이 아파 한주 동안 입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잘 타던 전기차가 배터리 손상으로 폐차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모퉁이의 머릿돌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흔들리지 않은 영원한 반석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요동하지 않고 계속해 힘차게 믿음의 길을 가겠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완전히 추구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책잡으려 이들을 함께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들이 판 함정이 무엇입니까? 14절,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먼저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장황한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만약 세금 바치는 것이 옳다고 답하면 바리새인들이 책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인정해야 하는데 로마 황제도 인정하고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하였다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헤롯당들에게 납세 거부를 선동한 죄목으로 로마 당국에 체포당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도 큰 곤경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악한 꾀를 다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앞면에는 “신(神)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무슨 뜻입니까?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은전은 가이사에게 되돌려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입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어서 황제가 호의호식하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세금은 로마 제국 내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복지 정책을 펼치는 데 쓰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혜택의 일부를 누리는 만큼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데나리온에 새겨져 있었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새겨져 있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죄악 된 인간은 가이사의 것도 내 것, 하나님의 것도 내 것으로 욕심을 부리고자 합니다. 뉴스에 국세청 강제 조사팀들이 고액 체납자의 집을 수색하여 현금다발과 귀금속을 압류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때 그들은 왜 내 돈을 가져가냐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몸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천국 시민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맺혀질 때 그 안에서 국가와 가정과 사회와의 모든 관계성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의 국민으로서의 의미를 다할 뿐 아니라 하나님 것인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위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청지기적 자세로 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예수님을 바라보고 세상이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작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