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자는 상원(庠元), 호는 단애(檀崖), 경남 밀양(密陽) 출신. 일찌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밀양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 교사·대구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 교사를 지냈다. 1909년(융희 3) 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 등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했다. 그뒤 만주로 망명,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茂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밀양 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寧安)에 대종학원(大倧學院) 등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했고, 장백(長白) 등지에서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고 홍범도(洪範圖)·조맹선(趙孟善)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에 항전했다. 1923년 제2세 교주 김헌(金獻)의 유언으로 대종교 제3세 교주가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독립장 이 수여되었다. 단애(檀崖)는 호이고 본명은 세린(世麟). 자는 광원(廣元). 본관은 무송(茂松). 한학을 수학하고 대종교에 입대하여 지교사로 임명되어 대조요시교에 전념하면서 안희제(安熙濟), 곽재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형 윤세용을 도와 사립 신창학교, 대구 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청년학도들의 민족사상 함양에 전력하였다. 일본의 무단정치로 민족교육을 할 수 없게 됨에 형을 따라 가족을 인솔하여 서간도 망명길을 떠났다. 봉천성 환인현성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선비 기질인 윤세복은 젊은 세대에게 민족독립정신을 함양시켜야 된다고 생각하고 형 윤세용과 함께 망명 온 이원식과 협의하여 동창학교라는 중학과정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생들의 수업료를 받지 않고 숙식비, 피복을 제공해 가며 학생들을 배출했으나 일본 대사관의 사주를 받은 중국관헌들의 방해를 받아 결국 폐교되었다. 그후 무송현으로 옮겨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고 안돈(安頓)과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다시 대종교로 돌아갔다. 1924년 음력 정월 22일 대종교 3대교주로 취임하게 되었다. 봉천성장(奉天省長) 장작림(張作霖)은 일본의 사주를 받고 한국인의 대종교 포교활동의 금지령을 내렸다. 윤세복은 부득이 길림성 밀산현 당벽진으로 대종교총본사를 옮기고 포교에 힘써 10만의 교인을 얻었다 한다. 1933년 쯤에는 발해의 고도인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에서 발해농장을 경영하는 백산 안희제의 주선으로 대종교총본사에서 각 지방에 연락하여 신도(대개가 독립운동자) 수만을 모아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일본관헌은 대종교를 한국 독립운동자의 근원지라 보고 대종교서 발간한 서적들을 불온서적이라 하여 압수하고 대종교 간부 21명이 투옥되었다. 윤세복은 목단강(牧丹江) 고등법원에서 대종교는 국체변혁을 목적하는 단체이고 그는 그 주도자라 하여 내란죄로 무기형을 언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고초를 받다가 순국한 사람 10명을 임오10현(壬午十賢) 또는 순국10현(殉國十賢)이라고 하여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1962년 국가에서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임오10현:권상익(權相益), 이정(李楨), 안희제(安熙濟), 나정련(羅正練), 김서종(金書鍾), 강철구(姜鐵求), 오근태(吳根泰), 나정문(羅正紋), 이창언(李昌彦), 이재유(李再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