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1936 -2024)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학사 학위하였으며, 1956년 《문학예술》 잡지에 〈갈대〉, <낮달>, <석상>를 비롯한 시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때 건강이 나빠서 고향에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고 다시 서울로 와 잡지사·출판사 등에 취직해 지내며 10년 동안 절필했다.(시 쓰기를 중단했다.)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창작하여 <원격지>, <산읍기행>, <시제> 등을 발표한다. 197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농무(農舞)〉,〈전야(前夜)〉,〈서울로 가는 길〉 등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출발 이후 그의 시들은 '시골의 흙냄새에 묻어서 풍기는 생활의 땀냄새와 한(恨)과 의지 등'이 짙게 풍겨 이른바 민중시인의 이름을 얻게 했다. 농민문학·민중문학 등을 주제로 평론들도 발표하였다.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이는 1990년 10월 4일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 수사에 협조해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그의 시 경향은 첫 시집 농무(農舞) 1973)를 통해서 잘 나타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초기의 작품들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들의 삶의 현장을 실감 있게 묘사하였다. 숙명적으로 땅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농민의 고통과 가난을 시인은 감싸안으면서, 그들에게서 우러나오는 삶의 소리를 시에 담으려고 하였다. 그는 농촌을 하나의 정원으로 그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농민의 모습을 그려냈다.
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오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메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첫댓글 가장 쉬운 언어로 시를 쓰고자 했던 시인...
땅과 사랑하는 농부들의 삶에서 그의 시어를 찾아으니...
그의 장수한 삶도 그냥 얻은 것은 아니리라, 그의 시들은 가슴을 파고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