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7월 27일, 한국에서 그의 출연작 중 처음으로 개봉된 <정무문>
오늘은 불세출의 스타, 이소룡의 51주기이다. 이소룡은 배우인 아버지 이해천에 의해 한 살 때 홍콩 영화계에 데뷔한다. 배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천은 그의 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보낸다. 19살에 미국을 유학을 간 이소룡은 갖은 고생을 하며 드디어 미국 드라마에 출연한다. 유색인종의 출연이 금기시 되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단역이나 조연이 아닌 아시아인 최초의 스타 등극을 꿈꾸었다. 보수적인인 할리우드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고 홍콩의 신설 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와 두 편의 출연 계약에 응한다.
그는 태국으로 가서 열악한 조건에서 <당산대형> 촬영을 한다. 처음 감독을 맡은 이는 이소룡의 상대가 아님을 알고 본사에 연락해 노장 나유 감독이 투입되어 어렵사리 영화를 완성한다. <당산대형>은 1971년 홍콩 흥행기록을 경신한다. 흥행 거장인 장철 감독이 동시기에 태국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강대위, 적룡 두 톱스타의 출연작인 <권격>의 기록을 제낀 것이다. 이소룡은 <당산대형> 한 편으로 톱스타에 오른다. 그는 차기작 <정무문>으로 다시한번 흥행기록을 경신했고 해외 로케이션으로 <맹룡과강>을 촬영한다. 이 영화 역시 홍콩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한다.
이때가 이소룡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는 <사망유희>를 기획하고 해외 무술인들을 초청해 활영에 들어간다. 그는 매번 새로운 뭔가를 보여주었고 그만의 개성으로 끝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만의 자신감으로 정면돌파하였다.
촬영 중 이소룡의 활약을 주시했던 할리우드에서의 러브콜은 당연한 것이었고 워너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의 합작 제안이 들어온다. 그로서는 구름 위를 걷는 심정이었을 것이고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 영화를 찍었다. 건강 이상을 느꼈지만 그는 쉴 수가 없었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 그는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쉴 틈은 없었고 계속해 다음 영화작업을 위해 <007과 여왕폐하>의 주인공 조지 라젠비를 초청했다.
문제의 7월 20일, 그는 오전 회의를 마치고 이상을 느껴 여배우 베티 팅페이의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여배우가 준 진통제를 먹고 죽음의 긴 잠에 빠져든다. 늦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골든하베스트사의 레이몬드 초우 사장이 팅페이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이소룡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소룡의 사인은 약물에 의한 뇌부종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반 세기가 흘러 올해 51주기를 맞았다. 그는 불세출의 배우로 각인되어 레전드 배우로 기억되고 그와 관련한 문화콘텐츠가 양산되며 이소룡 문화현상을 이어가고 있다. 마를린 먼로나 제임스 딘이 요절했지만 반 세기를 넘어 회자되며 끊임없는 문화현상을 보여주는 예는오로지 이소룡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