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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맥클린이 부르는 <빈센트>
* 고흐가 죽기 얼마전 완성한 작품 <까마귀 떼가 날으는 밀밭>(오베르 시절)
[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0~1890) ]
역사상 많은 예술가들 중 고흐만큼 고통스럽고 외롭고 불행한 일생을 보냈던 이가 있었을까요. 직업으로 택한 화상으로도,교사로도,서점상으로도,전도사로서도,그리고 화가로도 입신하지 못한 무능한 삶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모진 가난을 짊어졌어야 했으며 때때로 엄습해오는 정신적 발작을 감내했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에 실패하고 20대 후반부터,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죽기 전 10년간, 전력을 다하여 그림을 그렸으나 생전에 끝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단 한 점의 그림을 헐값에 팔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그렸습니다. 평생, 아니 28세부터 죽기까지 10년간 그는 약 1,250점의 유화와 1,000점 이상의 소묘를 그렸습니다. 정말 대단한 노력가였습니다. 그 중에서 1,100점 정도가 지금 우리에스 남아있습니다.그야말로 그냥 그리다가 죽은 것이죠.
* 고흐의 네델란드 집, 이 집에서 고흐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사랑을 갈구하다가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고흐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떤 여성도 그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동생 테오를 제외하고는, 멋드러진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처럼 수많은 여성들에 휘감기기는커녕, 너무나도 못생기고 전혀 꾸밀 줄 몰랐던 그는 평생 단 한 여자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사랑했습니다. 오직 사랑,그 자체를 위해, 사랑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자아는 부정되어야 했습니다. 술수도 조건도 타산도 없었습니다. 헌신적으로 사랑했듯이 희생적으로 살며 예술을 창조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처절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을 과연 불행했다고만 할 것인가요?
그를 패배자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 것인가요? 사람들이 측은해 한 것처럼 그의 삶은 결코 비극적 천재의 불행한 삶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요? 그는 처절한 삶을 살아 갔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인류의 가슴을 항상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감자 먹는 사람들(화가 초기 시절)
고흐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준데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형제가 많아 무척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겉으로는 내성적이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지만 한편으로는 불같은 성격을 간직하였습니다. 자기 주장도 무척 강하였다고 합니다. 어려서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나 그림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열 여섯살 때 숙부의 도움으로 벨기에의 헤이그에 있는 구필화랑에 취직하여 화상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이후 20세부터 23세까지 런던의 구필화랑 지점에서 근무합니다. 고흐는 그가 남긴 편지로 볼 때 네델란드어, 프랑스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또한 엄청난 독서를 통한 대단한 교양과 학식을 구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휘트먼, 칼라일, 키츠, 브론테, 엘리엇, 디킨스까지, 그리고 프랑스의 발자크, 보들레르, 졸라, 플로베르 등 작품까지 모두 설렵했고 고대 그리스의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독일의 퀘테와 하이네 등 세계적인 문호들의 작품들도 모두 섭렵했습니다.
* 슬퍼하고 있는 노인
런던에서 한 여자에게 실연당하고 비참한 몰골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고흐의 부모는 한없이 실망합니다. 시원치 않은 장남이라고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숙부는 그런 그를 런던에서 파리로 전근을 시킵니다. 이때부터 그는 성직자를 지망하게 됩니다. 아마도 집안 분위기 탓이 컸으리라 짐작됩니다.
영국에 있는 신학교를 다닌 후 그는 벨기에 보리나주의 탄광촌의 전도사가 됩니다. 임시직이기는 하나 전도사 자격을 부여 받은 고흐는 점점 열의를 더해 갔습니다. 참혹한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복음뿐이 아니라 자신의 의복과 돈마저 아낌없이 나눠 주었고, 진정한 기독교이길 자처하며 솔선수범했습니다. 이게 그의 성격이기도 했죠.
그런 그를 지방 전도위원회는 그를 해임해 버렸습니다. 고흐의 범상치 않은 봉사를 인정하긴 하지만 전도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설교에 필요한 어휘력과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또한 교회의 권위와 위엄을 유지해야 할 전도사가 그런 것들을 모조리 팽개치고 노동자들 사이에 뛰어들어 그들보다 더 누추한 옷을 입고 종교 활동을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 꽃피는 아몬드 나무(생 래미 정신병원에서)
이를 계기로 고흐는 그림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준 천직이라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세속적 권위에 침해당하고 있는 성직자들의 세계에서보다 제작 활동 속에서 진정한 신의 존재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880년 10월 고흐는 자신의 생애를 그림에 바치기로 굳게 결심하고 보리나주를 떠나 브륏셀로 향합니다.
27세의 늦깎이 화가가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한 푼도 벌지 못한 그에게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동생 테오의 형에 대한 헌신적인 지원이 이어집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테오만이 형의 그림을 이해하였습니다.
이후 동생 테오(그는 당시 파리에서 화상으로 있었다)가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히 그림공부를 하면서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전전하던 고흐는 32세에서 34세까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당시 파리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했는데 비록 그들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그들과 같은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회화 제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그들과 달랐던 것이죠. 동생 테오가 곧 결혼을 하게 되자 같이 있을 방도 없게 되고 당시 인상파가 휩쓸던 파리 화단과의 관계도 소원해지자 그는 탈출구로서 남부 프랑스(아를 지방)로 옮길 것을 결심합니다.
< 밝은 태양과 색채를 찾아, 프랑스 아를 지방에서의 생활(34-36세) >
밝은 태양과 짙푸른 하늘 등 지중해에 면한 아를 지방의 멋진 풍경 속에서 고흐는 질풍 노도처럼 작품 제작에 매달리게 됩니다. 테오가 보내주는 돈이 형편없이 적어 물감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하였지만 물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는 그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세상에 알려진 것들이 많습니다. ’해바라기’연작’, '도개교', '과수원’연작’, '밤의 카페 테라스',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노란 집', '우편 배달부 로랭’ 등, 고흐의 절정기 작품들이 이 때 죄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 때문에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한 그의 몸은 점차 쇠약해 갔으며 이러한 신체적 쇠약은 섬세한 그의 정신세계를 점차 병적인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 고흐의 방(아를 시절)
이때 고갱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고흐가 파리의 가난한 화가들에게 이곳으로 와서 같이 작업을 하자고 계속 편지를 보냈는데 고갱만이 찾아 온 것입니다. 고흐보다 다섯 살 위인 고갱은 유년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천성적으로 모험심이 강해 그 동안 선상 노동자나 주식 중개인 등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가정을 꾸민 다음 마음을 바꿔 화가의 길을 선택하고 팔리지 않는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처자는 수입이 없는 그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 해바라기(아를 시절)
두 사람의 동거 생활은 불과 두 달밖에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과 예술관은 완전히 달랐고 게다가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대립을 계속하던 두 사람은 드디어 188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크라이막스에 도달하였습니다.
대판 싸움을 하고 난 다음에 면도칼을 들고 고갱의 뒤를 쫓던 고흐가 어느 골목길에서 고갱이 휙 돌아보자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자기 자신의 귀를 짤라 버렸습니다.
* 귀를 자른 뒤의 자화상(아를 시절)
극도의 가난과 처절했다고 해야 옳을 장기간의 제작활동으로 심신이 지쳐 있던 고흐에게 거칠은 성격의 소유자인 고갱이 그의 예민한 신경을 더욱 건드렸으리라고 보여집니다. 병적인 광기가 아니라 극도의 정신적 긴장이 고흐에게 면도칼을 쥐게 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그는 강한 자극을 받거나 피곤하면 발작이 재발하는 증상이 더욱 심해져 갑니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을 일으킨 미치광이가 퇴원 후에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는 정보가 마을 사람들에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 주었고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선량한 시민들에게 언제 다시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급기야 ‘미치광이 화가를 강금시키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흐는 아를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당했습니다.
<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천상의 그림을 >
아를에 머물기를 싫어한 고흐는 아를 북쪽 25km에 위치한 생 레미 정신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여기에서도 계속 작품에 몰두하게 됩니다.
당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간만 자꾸 간다.내게는 시간이 없어. 그래서 촌각을 다투며 계속 제작하고 있어. 만일 더 심한 발작이 엄습하면 영원히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릴 수 있을 때 전력을 다해 그리고 있어. 지금 나는 오랫동안 갈구해 왔던 것을 얻었고 시간은 지금밖에 없어.”
* 의사 가셰(오베르에서 고흐와 친했고 그도 미술에 일가견
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흐는 점차 자기의 병세에 대하여 점차 초조감을 갖게 되며 테오는 이런 글을 써서 보낸 형의 제작에 쏟는 극단적인 정신 집중이 다시 발작을 유발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합니다. 이 병원에서 고흐는 그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제작합니다.
* 아를 시절에 그린 <밤의 카페>
< 고호의 마지막 거처, 프랑스 오베르,37세 >
1890년 5월 21일 고흐는 잠깐 파리에 들렀다가 그의 마지막을 기록한 오베르에 도착하였습니다. 1890년 7월 27일에 권총 자살을 기도하고 이틀 후인 29일에 절명할 동안 고흐는 거의 소묘를 포함하여 50점에 가까운 경이적인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운 셈입니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는 고흐가 불타 오르는 듯한 황금색 밀밭에서 권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고흐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고흐가 말년에 그린 음산한 분위기의 작품‘까마귀 나는 밀밭’을 보고 대충 짐작했을 뿐입니다.
* 오베르 교회
사건 당일 날 고흐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여관집 라부 부부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해가 진 후 드디어 현관문을 열고 고흐가 돌아왔습니다. 옆구리를 구부리고 들어 온 고흐에게 라부 부부가 웬일이냐고 묻자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고흐는 총탄이 관통한 심장 근처의 상처를 이들 부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연락을 받은 테오는 즉시 형에게 달려왔습니다. 29일 오전 1시 30분 동생 테오는 형과 나란히 누워 형의 머리를 안았습니다. 잠시 뒤에 고흐는 “이대로 죽고 싶다”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왜 고흐는 자살했을까요? 유언을 남기지 않아 확실하게는 몰라도 자꾸만 발작 증세가 도지면서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계획적으로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에서는 완전히 지칠대로 지쳐있던 신경이 극도로 흥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지만…
* 별이 빛나는 밤(아를 시절)
이 사건이 있은 후 테오는 빈센트 회고전을 개최하는데 그도 곧 심각한 정신 착란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6개월 후에 신장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이 두 형제는 현재 오베르에 있는 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묘지 울타리 너머에는 한없이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두 형제는 아무런 성공에 대한 보장도, 일체의 원조도 없이 각자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패잔병처럼 사라져 간 것입니다.
< 인간 고흐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고흐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보다도 흔히 ‘스스로 귀를 자르고 타는 듯한 밀밭에서 결국은 자살한, 태양과 같은 정열을 지닌 미친 천재 화가’라는 식의 전설로서 말이죠. 이에 대하여는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기 전 발작 증세가 심해진 마지막 몇 년과는 달리 대부분의 생애를 고흐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냈습니다. 요컨대 그는 미치지 않았다는 얘기죠. 따라서 ‘미치광이 화가’라든가 ‘광화사’따위로 가볍게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정신 질환은 그의 그림과 무관하다는 의학적 연구가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 밤의 카페 테라스(아를 시절)
또한 그는 참으로 책을 좋아했던 뛰어난 지성인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모국어인 네델란드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에도 능통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공부한 바 있어 각 나라들의 문학과 종교서들을 섭렵했습니다. 그가 남긴 많은 편지(특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타고난 천재적인 화가였던가요? 아닙니다. 그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정도의 그림 재주정도 밖에는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재주를 보이기 시작하는 일반적인 천재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스물 여덟살 때에야 본격적으로 뎃상을 시작했고 이후 10년 동안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는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그림만 그렸습니다. 요컨대 노력을 통해 자기 그림을 완성한 화가라는 점입니다. 그는 무턱대고 남의 화풍을 따라가기 보다는 자기만의 미술 세계를 추구한다는 고집이 아주 유별났고 결국은 이 점이 그를 불후의 화가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고흐의 작품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요? 그는 애당초 처음부터 보통 사람들을 주제로, 보통 사람들을 위하여,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그리겠다고 결심했고 평생 그 서약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보통 인간이면서도 온갖 불행에 굴하지 않고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켰기 때문입니다.
* 별이 빛나는 론강(아를 시절)
고흐에게서 우리가 감동 받는 이유는 이런 참다운 인간에게서 전해지는 풍부한 인간미 때문이지 결코 지금가지 알려진 대로 그가 미쳤다거나 광기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의 그림은 단순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힘이 있습니다. 구도도 색채도 형태도 묘선도 단순함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인공적인 조작에 의한 가식적인 조화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 정물, 인물을 간단하고 쉽게, 그리고 빠르게 그렸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보게끔, 누구나 좋아하게끔 말입니다.
그는 동양의 화가처럼 자유로운 선을 구사했습니다. 아니 더욱 거칠게 그어진 선은 동양화의 선보다 더욱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빨강, 노랑, 파랑을 거의 원색에 가깝게 사용했습니다. 구도도 원근법과 음영법을 파괴하여 멋대로 그렸습니다. 그림자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형태와 색채를 명백하게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단순미의 추구였습니다.
물론 이런 화풍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거부당했습니다.그 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고흐가 증오한 전통적이고 귀족적인 그림에 매료 당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릅니다. 지금 어떤 아이가 그처럼 그린다면 미술 대학에 입학하기는커녕 초등학교 미술 수업에서도 쫓겨날 것입니다. 그만큼 이미 1백년 전에 고흐가 구사한 것은 당대의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을 거부한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 화구를 메고 이동하는 고흐(아를 시절)
고흐의 사후 11주년이 되던 1901년에 회고전이 열렸을 때 인간의 정념과 혼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 실로 어마어마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작품들을 접하고 깊은 감동과 무한한 계시를 받은 포비즘(이른바 야수파)의 거장 블라맹크는 “이날 나는 아버지보다 고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블라맹크나 마티스 등의 야수파 화가들이 과감한 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회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은 고흐 예술을 한 차원 더 발전시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고흐는 과거의 아카데미즘을 완전히 청산하고 참신한 인간성을 회복시켜 현대 회화의 육중한 문을 열어젖힌 혁신적 화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 고흐와 그의 작품에 대한 마지막 정리 >
그는 위인도 천재도 거장도 대가도 사표도 도사도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으며 약지도 못했으며 또한 슬펐습니다. 지독하게 못났고 어설펐으며 서글펐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오직 약간의 손재주와 감각으로 예술가연하고 짐짓 미친 체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있는 것도 이 세상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들이야말로 순수하지 못한 정신적 사기꾼이고 또한 그들은 똑똑하고 영리하며 재빠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가짜로 미친 체한 적이 없는 고흐는 결국 진짜로 미쳐버린 것처럼 보인 것은 그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술수를 부리거나 사기를 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정신이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고흐의 친구 중 한 사람인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고흐에게는 선천적으로 신앙심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그의 인격을 드높였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고흐 성격의 일부를 정확히 드러내 준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심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민과 사랑이었습니다 주위의 불행한 사람들을 대하는 연민과 사랑은 그의 삶과 예술을 구성했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어째서 인간은 단지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평생 슬픔과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하고 탄식했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생명력이 흘러 넘치면서도 아름답고, 항상 격조 높은 참신함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슬픔과 탄식, 그리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고흐의 그림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무덤
* 돈 맥클린이 부르는 <빈센트> 노래 가사
별이 많은 밤입니다.
빠렛트에 파란색과 회색을 칠하세요.
내 영혼에 깃들인 어둠을 알고 있는 눈으로
여름날에 바깥을 바라보아요.
언덕 위의 그림자들
나무와 수선화를 그리세요
미풍과 겨울의 찬 공기도 화폭에 담으세요.
눈처럼 하얀 캔버스 위에 색을 입히세요.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광기로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로와지려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그들은 이제는 듣고 있을 거예요.
별이 많은 밤입니다.
이글거리는 듯한 꽃들의 색이 불꽃같이 여겨집니다.
보랏빛 연무 속에 소용돌이치는 구름들은
빈센트의 푸른 눈빛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색조를 바꾸는 빛깔들
황금색의 아침 평야
고통 속에 찌든 얼굴은 예술가의 사랑스런 손길로 달래지네요.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아직도 당신의 사랑은 진실합니다.
이 별이 빛나는 밤, 내부에는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을 때
당신은 연인들이 종종 그러듯 자살을 택했죠.
빈센트, 당신에게 어떤 세상도 당신만큼 아름답진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별이 아름다운 밤
당신의 초상이 빈 벽에 걸려있습니다.
틀도 없이 이름도 없는 벽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당신이 만나왔던 이방인처럼
누추한 옷을 입은 누추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순백의 눈에 부서지고 상처받은 새빨간 장미의 은빛 가시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광기로 당신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로와지려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그들은 이제는 듣고 있을 거예요.
첫댓글 고흐에 대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디테일한 인생 역정에 대한 설명
완죤 읽는데 감탄사가 절로 나네요
고흐는 미술사의 성인(聖人)같은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음악사의 베토벤처럼...
고흐의 모든 것은 돈 맥클린의 노래 <빈센트>의 가사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변대감!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봄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