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로 보는 <마음건강을 위한 심리학여행> 2부의 네번째 글입니다.
글 제목에서처럼 지난 날과 오늘과 올 날의 나를 얘기해보는 시간가지겠습니다.
글 읽고 생각해보시고 오세요.
15일 아침에 줌주소 올리겠습니다.
지난날의 ‘나’ 그리고 날로 달라져가는 오늘과 올제*의 ‘나’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 세기를 넘기고 동창인 친구를 한 모임에서 만났다. 반가움이야 두말할 것 없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한 첫 마디 말이 “너는 학교 때와 똑같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이렇게 늙은 할머니였을 리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성형수술을 심하게 한 그 친구야말로 알아보기 힘들었으니 아마도 자신의 마음 속 표현이겠거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태어나서부터 우리는 누구나 자라고 바뀐다. 몸이 자라고 바뀌는 것은 알아보기 쉽다. 아기엄마들은 아기의 몸무게가 늘고 키가 자라는 것에 마음을 많이 쓴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아이가 자라는 속도가 늦다고 은근히 속태우기도 하고, 보통보다 잘 자라면 우쭐대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몸의 자람과 바뀜뿐 아니라 마음의 자람과 바뀜에 관심을 두는 심리학의 분야가 있다. 이른바 발달심리학이라는 영역이다.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우리는 자라고 바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마지막 자리에 함께한 두 강도 가운데 마음을 바꾼 한 사람은 구원의 자리에 들 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바뀔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언제나 열려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적극으로 호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전개가 달라지는 것이다. 모세를 찾아와 부르신 하나님에게 모세는 얼마나 발뺌하려 들었던가! 우리는 아예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 하고 타오르는 떨기나무를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귀 막고 눈 감고 사는 한 우리는 자라고 바뀌지 않는다.
발달심리학을 다룰 때, 태어나면서 사람은 누구나 프로그램된 대로 자라고 바뀐다고 생각하는 시각이 있다. 예닐곱 달 되었을 때 아이들 누구나 낯가림하는 게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한 보기이다. 그런데 대가족에서 자란 아이들과 핵가족에서 자란 아이가 낯가림의 정도와 양상이 다르다면 이는 환경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설에서 자란 아이라면 더욱 차이가 커질 것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간다는 이론이 설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행동발달에 미치는 요인 중에는 타고난 것도 있고 환경의 요소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임에서는 몇 해째 영아원에 맡겨진 아기들을 위한 목욕봉사를 하고 있다. 그날 태어난 아기부터 입양되었다가 돌아온 몇 개월 된 아이까지 조그만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고 있는 곳에서 봉사활동이 이루어진다.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아이들에게 각자에 맞는 적당량의 우유를 먹이고, 토닥여 트림하게 하고, 잠재우는 순서로 돌보게 된다. 아이들 수가 많아 돌보는 어른들이 한 아이씩 안아서 먹일 수 없으니 둘둘 말은 수건을 아기 머리 옆에 놓는다. 그 위에 우유병을 걸쳐놓고 아기 머리를 그 편으로 향하게 옆으로 해서 혼자 먹을 수 있게 해준다. 배고픈 아기들이 열심히 빨기도 하지만 아주 어린 아기들은 조금 먹고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면 뺨을 건드리거나 우유병을 흔들어 깨워서 더 먹게 한다.
그런데 언젠가 잊을 수 없는 아기가 그곳에 있었다. 조금 큰 아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너무나 흥분해서 우유를 먹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두 아들을 젖 먹이던 생각을 떠올렸다. 아이들과 내가 서로 눈 맞추며 젖 먹기와 젖 먹이기를 피차 얼마나 즐겼던가!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열심히 듣는다는 듯이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아이의 눈망울을 잊지 못한다. 정말로 편안하게 실컷 먹고는 만족스레 젖꼭지를 입에서 빼내는 모습은, 젖 먹여 아이 기른 엄마들이면 누구나 잘 아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품에서 눈을 맞추고 먹은 일이 없었던 그 아이는 그 순간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눈 맞추기에 목마르고 배고픈 아이였던 것이다.
심리분석가 E. 에릭슨은 사람의 발달의 토대가 되는 것이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라 했다. 그러기에 아기가, 돌보는 어른과 사랑을 충분히 주고받으며 자라기 시작해야 이후 평생의 발달이 차곡차곡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장수로 났다거나, 사람의 발달을 프로그램 짜듯이 만들어 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뜻에서 사람의 발달을 아주 공평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셨으니 더 바랄 것 없는 존재로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보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사람은 천차만별로 발달할 수 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왔어도 자살하고 말았지만(마 27: 5),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부인한 일에 대해 참회하며 통곡하는 반응을 했다. 값진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은 하나님의 딸로 태어나 죄를 지었어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한 일이 함께 전해질 것(마 26: 13, 막 14: 9)”이라는 기막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의 시아버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쉬운 마음이야 쓰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주무시다가 일어나시지 않은 평화스러운 모습을 뵈면서, 삶의 마지막 호흡을 들여마시고 내쉬는 순간까지 함부로 살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절절히 깨달았다. 우리 모두의 삶이 평생 어느 순간도 그냥 멈추거나 지나쳐버릴 수 없는 바뀜과 자람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초심을 강조하고,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영원히 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아흔두 해를 사신 아버님의 얼굴은 투명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신 본(model)이셨다. 칠남매와 가족들을 향한 유언이 따로 필요 없는 마지막 모습이셨다.
우리들 모두, 남은 시간에 계속 바뀌고 자라는 발달심리의 본보기들이 되려면, 진리의 말씀을 포함한 주어진 환경에 대해 그때마다 자기답게 성찰하고 반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린 시절 어려운 상황을 소화하지 못하고 그 순간에 고착되어 자람을 멈추기도 한다. 그러면 몸은 어른이 되어 박사도 되고 결혼도 하고 부모가 되어도 제대로 ‘대응하지(response)’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 사람은 맡은 본분(자신, 가정, 일, 공공)에 ‘책임지지(responsible)’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자기답게 매순간을 ‘대응하는’ 사람으로 발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아무에게도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신앙생활이 늘 진전하는 일상의 삶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님이 남기신 유언은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신 당신의 결정을 따라줄 것,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니 몽땅 바치는 것을 이행하라는 것 같은 구체스러운 것도 소중했지만, 한 번 하고 끝낼 수 없는 과업도 주셨다. 우리 개인의 평생뿐 아니라 대대로 후손들이 제대로 바뀌고 자라며 살아가야 할 지침을 주신 것이다. 우리 가정만의 아버님이 우리 가족에게만 남기신 유언이 아니라 발달심리를 말하는 예수사람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다. 끝에 찬송을 멈추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모두 철저하게 바뀌는 회개와 구원의 삶을 살면 절로 하게 될 것이 아닐까 한다.
* 올제 : 오늘의 바로 다음 날, 즉 ‘내일’을 뜻하는 순우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