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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위로가 된 일꾼들 4:10~11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신실한 일꾼 에바브라 4:12~18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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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 에바브라, 누가, 데마의 안부를 전합니다. 라오디게아의 형제들과 눔바와 그 집 교회에 문안하며, 서로 편지를 돌려 읽으라고 합니다. 아킵보에게는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힌 것을 상기시키며 은혜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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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위로가 된 일꾼들 4:10~11-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바울은 동역자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인사를 전합니다. 첫째, ‘아리스다고’입니다(10절). 3차 전도 여행 때 합류한 아리스다고는 에베소 전도 중에 폭동이 일어나자 가이오와 함께 바울 대신 잡힌 적이 있습니다(행 19:29). 둘째, ‘마가’(요한)입니다(10절). 마가는 1차 전도 여행 때 중도에 이탈했으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바울의 신뢰를 회복했습니다(행 13:13; 15:38; 딤후 4:11). 셋째, ‘유스도라 하는 예수’입니다(11절). 바울은 이 세 일꾼이 할례를 받았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임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자들로, 바울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11절). 신실한 동역자는 사역자에게 위로요 기쁨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바울에게 어떤 사역자들이었나요?
삶에서 나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어 주는 이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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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일꾼 에바브라 4:12~18
신실한 사역자는 교회의 힘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라를 소개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성도들이 세상 초등 학문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뜻에 확신을 가지고 서기를 ‘항상’(시간), ‘애써’(태도) 기도했습니다(12절; 2:8). 바울은 에바브라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했다고 증언합니다.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게 하라는 것은 두 교회가 동일한 이단의 유혹을 받고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16절). 바울은 아킵보의 분발을 촉구합니다(17절). 아킵보는 에바브라가 없는 골로새 교회를 맡은 사역자로 봅니다. 성도는 주님이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해 후일 주님께 칭찬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에바브라가 성도들을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내가 한 영혼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 힘써 행할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귀한 동역자들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론 의견이 충돌하고 마음이 어긋날지라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 오직 주님 사랑에 매여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18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며, 당신 안에서 완전하게 되고, 당신의 모든 뜻에 확신을 가지고 서기를 기도하면서 맡겨진 직분을 감당해 나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2024년 새해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하나님의 성실한 일꾼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그 모든 뜻에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서 세워가시고, 이루어 가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자
주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직분과 사역들을 성실히 잘 감당해 나가고, 또 완수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2024년 한 해가 되도록 하자
줄거리와 본문이해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현황을 알리고 아울러 동역자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안부를 전합니다. 적어도 8명 이상의 동역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을 걱정하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아울러 교회공동체를 세우는데 협력하라는 메시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부탁하는 말을 전하며, 축도로 이 편지를 마칩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아리스다고가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바나바의 조카 마가도 문안합니다. 여러분이 마가에 대한 지시를 이미 받았겠지만 그가 가거든 따뜻하게 맞아 주십시오. 그리고 유스도라는 예수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끝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고 곁에서 지지한 동역자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대표해 바울과 함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가지고 갔던 무리중의 한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조카 마가는 바울의 1차전도 여행때 동참했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 그 문제로 인해 2차 전도여행 시작시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어 따로 선교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성숙해져 베드로의 동역자로, 또한 바울의 아낌 없는 동역자로 거듭나니, 그래서 바울은 그를 영접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요한입니다. ‘유스도 예수’라고 한 것은 당시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구분하기 위해 앞에 로마 이름인 ‘유스도’라는 이름을 덧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에게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 ‘나는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라는 바울의 말입니다. 그는 에바브라로, 바울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인물입니다. 이 문장으로 보아서 학자들은 그가 골로새,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의 교회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데마’는 디모데후서에 따르면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눔바’는 아마도 여성으로 자신의 가정을 교회로 제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한 지역에 여러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는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임무를 받은 ‘아킵보’는 빌레몬 가정교회의 멤버로, 후에는 라오디게아의 감독으로 섬기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골로새서는 총 4장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4장을 대부분 동역자의 이름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그들의 현황과 안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까닭이 있다고 봅니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동역자들에게 감사해서 일 것입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이방 선교의 개척의 길을 같이 가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롭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할까요? 서로 의지가 되니까요. 함께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동역이 힘입니다. 하나님도 3위로 계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도 같이 가는 것입니다. 천국도 함께 가야죠. 우리는 기필코 좋은 동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전에 좋은 동역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해설과 묵상
바울 서신을 저술연대 순으로 대략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 데살로니가 전, 후서 < 고린도 전, 후서 < 로마서 < 골로새서, 빌레몬서,에베소서, 빌립보서 < 디모데 전서 < 디도서 < 디모데 후서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를 제일 먼저 작성하였고, 맨 나중에는 디모데후서를 남긴 것이죠. ‘골로새서, 빌레몬서,에베소서, 빌립보서’를 한 묶음으로 한 것은 그 작성연대가 비슷비슷해 그렇습니다. 이른바 바울의 옥중 서신서들로 그 기록 시기가 고만고만해 쉽게 그 우열을 가르기 곤란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굳이 나눈다면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부각하고 있다면 골로새서는 당연히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위시하여 창조성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거하고 계신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골로새서에서는 복음의 적용 부분인 실천적인 면이 강하게 어필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신학 체계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신학이 현실 속에서 검증이 되고, 문제를 거치면서 체계화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골로새서는 공동체부분보다는 개인 영성면에서, 사도 바울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실례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성도들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잘 설명해 준 것이 다음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리스도가 죽을 때 성도도 죽었고, 살아났을 때 성도도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분이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타나실 때, 그때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도 영광중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존재 형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의 성도, 또 하나는 현재 땅의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원형은 그곳에 있고 땅에서의 삶은 그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전의 서신서에 있는 새사람과 옛사람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보다는 한층 격상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거룩한 장래의 모습을 비전으로 제시했기 때문이지요. 더 이상 무슨 사족을 달 수 있겠습니까?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요. 우리 원형이 저 하늘에 있는데 어떻게 옛사람, 겉 사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더는 핑계 댈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계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 원형을 곧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 원형이 되기 때문이지요.
죽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땅에 있는 지체를 말합니다. 버려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옛사람입니다. 아직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그리고 새사람과 옛사람의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도 하지만 지기도 합니다. 조급하거나 실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 있고 우리도 최선을 다할 때 바울이 말한 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계속되는 이 싸움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가슴 벅차게도 우리의 영광스러운 원형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이 싸움을 해야 하나요? 사도 바울은 그 도달점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이 오실 때에 우리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영광스러운 미래입니다. 우리의 찬란한 모습이 저곳에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평생 원형에 부끄럽지 않은 모형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르지만 한 아버지, 한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12:20)
누구는 할례파일 수 있고 누구는 무할례파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 하나입니다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골4:11)
그러므로 서로 문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골4:10~14)
또한 다른 지방에 있는 형제와 교회에도 문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4:10~18)
여기서 "문안하다"는 헬라어로 "ασπάζομαι"(아스파조마이)인데, "좋아하다", "존경하다", "동의하다", "경의를 표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즉, 문안은 단지 인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좋아하는 것이고, 인격적으로는 존경하는 것이며, 그의 다양한 의견에도 동의한다는 뜻이고, 그의 존재 자체로 존귀하기 때문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문안의 마음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흩어진 하나님 자녀를 다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1~22)
그러므로 우리가 "ασπάζομαι"(아스파조마이)의 자세로 주 안에서 하나되어 통일되기 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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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적으로 보면 높은 학문적 권위과 종교적 지도자의 삶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온갖 매질과 핍박과 끊임없는 자신의 민족과 이방 민족의 위협 가운데 평생의 고난을 짊어지고 살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의 삶은 부러워 할 만하지도 않고 지극히 궁핍하고 어리석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몇십 년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단 삶과 생명을 다해 주님의 증인으로 남긴 글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살아 숨 쉬고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 수많은 동역자, 그를 위로해 준 이들을 하나님께서 늘 공급하시고 예비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지내고 건강을 돌보아준 이들, 자신을 대신하여 육신을 옮기며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골로새에서 그 사역을 감당해 주고 자신의 깨달음과 주님으로 받은 깨달음을 대신 전달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룬 자들의 이름 한 명 한 명 친필로 써가며 하나님의 인도하셨음을 골로새서의 마지막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누구에게 위로를 전하고 말씀을 증언하며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눈물로 잘 동역하며 걸어가고 있는지 돌아보며 그 소중한 이들, 맡겨주신 영혼들을 향해 생명을 다할 때까지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0a절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서 나고 자란 유대인으로(행 20:4),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함께 하다가 같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행 19:29), 바울이 예루살렘을 거쳐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연금 상태에 있을 때도 함께했으며, 유라굴로 광풍을 이기고 로마까지 재판을 받으러 가는 길에도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바울을 돕기 위해 가택 연금을 자청하여 함께 갇혀 있는 중입니다. 나는 말씀대로 전하고 살려고 몸부림하는 일꾼들과 어떻게 함께하고 있습니까?
10b,11절 바나바의 사촌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려서 바울이 바나바와 결별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마에서 바울과 동역하고 있고, 바울은 자신을 대신하여 마가를 골로새에 보낼 것이니 잘 환대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는 모두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많은 유대인이 반대하는 중에 그들만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인간적인 차이와 서운함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역사하는 일에 참여합시다.
12-14절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지금은 바울과 함께하는 동역자로 있습니다(몬 1:23).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를 잊지 않고 그들이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도록 분투하며 기도하고, 자신이 개척한 근처의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의 교회들을 위해서도 수고하고 있습니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섬기던 교회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멀리서도 수고하는 종이었습니다.
15-17절 바울은 눔바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안부를 전하고,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사본으로 전하고, 또 거기에서 전해진 편지도 공동체 앞에서 낭독해 주길 부탁합니다. 또 새롭게 지도자가 된 아킵보(몬 1:2)가 맡은 직무를 잘 완수하도록 당부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여러 교회와 일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되도록 주선하고 있습니다. 2024년 새해, 우리도 이 복음으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1:24)에 동참하기를 열망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본문/ 골로새서 4:10-18
오늘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입니다.
1.함께하는 공동체
바울은 감옥에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10-11절)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5명의 동역자를 언급합니다. 아마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골로새 교회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아리다스고처럼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었고 잠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다시 회복한 마가가 있었으며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이기도 한 에바브라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그의 사역이 그렇게 외롭고 춥기만 한 것이 아닌 이유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은 한 가족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르나 동일한 그리스도가 주로 계시기에 하나입니다. 세상에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는 같은 취미로 모일 수 있고, 목적을 가지고 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같은 주로 인하여 모인 사람들입니다. '주'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취미나 목적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지만 우리의 주는 결코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같은 분을 주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달라도 가장 근본적인 동일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감옥에 있거나 자유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같은 그리스도가 주로 계시기에 그들은 하나이고 동일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마치면서 많은 사람을 언급하면서 감사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를 떠나 멀리 있다면 우리는 교회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까? 교회가 있어 감사하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떤 면에 있어서 교회공동체는 가족 공동체보다 더 강합니다. 더 따뜻합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의 서로 다른 모습 때문에 때로는 교회생활에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랑스럽고 따뜻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사랑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따뜻합니까? 인간적인 따뜻함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따뜻함은 많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근본적인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공동체들의 연합
한 개인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주 되심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더 나아가 공동체들 안에서의 주 되심으로 더욱 확장될 수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15-16절) 바울은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물론 이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모든 교회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셨다는 사실에 있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명백하고 분명하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어 공교회(보편교회)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정치와 지역과 생각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교회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하여 교회가 여러 교단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모든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교회를 억지로 조직적으로 하나로 만들려고 하여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라는 것이 너무 강조되어 그리스도를 주로 하지 않은 단체조차도 조직의 교세를 위해 하나로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사도신경을 공유하는 그리스도를 주로 하는 교회라면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교단이 조금 교리적으로 틀리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교회에서 다른 교회를 제외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공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조직에 속하였는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하여 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작게는 우리는 우리 주변의 교회들을 인정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섬기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안디옥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웃 교회를 격려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부족함이 있는 교회라도 교회를 결코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내 교회를 위하여 다른 교회를 해롭게 한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교회를 위해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로 하여 바르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한 교회가 그리스도를 주로 한 사랑스러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함께 하며 함께 격려하고 세워주어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공교회도 역시 그리스도를 주로 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교회와의 한 몸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지 그것에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주의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러면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는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짜 그리스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오직 그 분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확장해가는 동역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골로새서 4:10~18 그리운 사람, 부르고 싶은 이름
말씀요약:
바울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인 유대인에게 안부를 전하라 한다.
또 에바브로, 누가, 데마에게도 안부를 전하라 하신다.
라오디게아와 눔바의 집 교회에 문안하고 서로 편지를 돌려 읽으라고 당부한다.
아킵보에게 삼가 직분을 이루라 권면하고 바울 자신이 매인 것을 위하여
중보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묵상:
생명의 삶 말씀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그리운 사람, 부르고 싶은 이름.
바울은 현재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이다.
그동안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1차, 2차,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4차 로마로 압송되는
모든 여정을 마치고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지난 전도 여행 때 함께 했던 동역자들
너무나 부르고 싶은 이름이고, 그리운 얼굴들인데 오늘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이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난히 많이 기록하고 있다.
1. 아리스다고(10)이다.
바울이 전도 여행 할 때 함께 했던 사람이다(행27:2)
데살로니가에 살던 마케도니아 인이다.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요에 휘말려 바울과 함께 체포 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적이 있었던 자이다.(행19:29~41)
바울은 이사람을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라고 표현했는데(10)
바울은 이사람을 동역자로 생각하고 있다.
2. 마가(10)이다.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이다.(10)
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지만 가장 먼저 기록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 중간에 포기하고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인간이 마가다.(행13:13) 이 사건은 바울과 바나바의 분쟁이 되었다.
2차 여행에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행15:36~41)
그러나 그 이후 마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바울은 마가에게서 진정한 위로를 발견했고(골4:11)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그리워하여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 올 것을 부탁했다.(딤후4:11)
사도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 마가'라고도 불렀다.(벧전5:13)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120여명이 모여 기도했고 오순절 성령이 임한 장소도
바로 이 마가의 집이였다. (행1:13,15)
3. 유스도(11)이다.
유스도라하는 예수이다.(11), 로마 이름으로 의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히브리어 이름 예수에 라틴어나 헬라어 이름인 유스도를 덧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역시 바울의 동역자이다.
4. 에바브라(12)이다.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골1:7)
그리스도 예수의 종(골4:12)
나와 함께 갇힌 자 (몬1:23)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다.
역시 바울의 동역자이다.
5. 누가이다(14)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인물이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14)이다. 직업이 의사였던 것 같다.
비록 성경 두권을 남겼지만 바울이 기록한 13권의 편지보다 분량으로는 더 많은 기록이다.
신약 성경의 가장 많은 분량을 기록으로 남긴자가 바로 이 누가이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방인 저자이기도 하다.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이다.
6. 데마이다(14)
훗날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버린 인물이다.(딤후4:10)
이 당시 까지만 해도 바울의 중요한 동역자 였던 것 같다.
7. 아킵보이다.(17)
빌레몬서에 언급된 '병사된'(몬1:2)자이다.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성도인 것 같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권면을 듣는다(17)
골로새 교회를 돌보던 사역자인 것 같다.
요즘 성경의 말씀 가운데 인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 졌다.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나 소중하고 보배로운 사람들이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많은 필요한 것이 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사람이지 않을까
내 인생 여정 끝날 때 나에게 남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여기고 그렇게 대하자.
서로에게 그리운 사람, 부르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해가 다 가기 이전에 동역자들에게 전화라도 꼭 드려봐야 겠다.
오늘의 말씀요약
바울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예수의 안부를 전합니다.
또 에바브로, 누가, 데마의 안부도 전합니다. 라오디게아와 눔바의 집 교회에 문안하며,
서로 편지를 돌려 읽으라 당부합니다.
특히 아킵보에게 직분을 이루라 하며, 바울 자신이 매인 것을 생각하라 합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성도는 지체들과 동역하며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위로를 나누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마무리하며 동역자들의 안부를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고한 할례파 유대인들, 아리스다고와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에 대해 칭찬합니다.
또한 골로새 교회 개척자인 에바브라, 바울의 주치의 누가, 데마의 안부를 전하고, 눔바와 그 집에 있는 교회,
아킵보 등에게 문안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운 사람, 부르고 싶은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동역자들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나요?
- 적용 질문: 동역자들을 돌아보며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문:골 4:2-18 기도하며 지혜롭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잘 살고 있습니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3절) 바울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모두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것을 위하여 땀을 흘릴 때 그 땀은 때로 세상 사람들과 모양이 비슷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땅의 일을 위하여 땀흘리며 공부할 때, 우리들도 하늘의 일을 위하여 땀을 흘리며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하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공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독백과 같은 전혀 쓸모없는 일 곧 기도에 힘을 쏱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이 하늘의 일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요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를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힘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도할 때 중요한 두 가지 자세가 나옵니다. 첫째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늘의 것인지 알고 땀흘리며 또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의 일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을 찾는 우리는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어 있어서 우리의 주인이신 그 분의 뜻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의 일은 열매와 그 양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은 그것을 찾는다는 그것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하늘의 것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일을 찾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썩어질 땅의 일이 아니라 찬란한 영광의 하늘 일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지혜로워야합니다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5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외인이란 땅의 것을 욕심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것을 소망하며 그 일을 이루기를 소망하는 사람과 땅의 것을 찾는 사람들이 부딪힐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 말 그대로 충돌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충돌의 때에 우리는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늘의 것을 찾는 사람이라고 세상의 사람들 속에서 무례하게 자신의 주장만을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교에 역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의 것을 찾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도 저들과 함께 하고 오히려 저들 속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은 '소금으로 간한 것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곳에 소금이 들어갈 때 소금은 아주 적은 부분입니다. 나머지는 소금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금은 그들속에서 충돌하지 않습니다. 소금이 콩나물국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콩나물국맛을 냅니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잘 함으로 콩나물 국이 콩나물 맛이 나는 것입니다. 만약 콩나물이 소금 맛만 난다면 그것은 소금이 자신의 역할을 잘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이 세상에서 소금맛만 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추한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기피 일호가 되었습니다.
소금이 모든 곳에 꼭 필요하고 그곳에서 환영받듯이 우리 크리스챤들이 모든 곳에서 꼭 필요하고 환영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금 간을 잘 보아야 합니다. 지혜롭게 사람에 맞추어서 적당히 소금을 쳐야 합니다. 예를 들머 그들이 적대적일 때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욱더 적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전도지는 많이 뿌릴 수록 좋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명이라도 복음을 들으면 어디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전도지 때문에 복음에서 더 멀어지는 사람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전도해야 합니다.
하늘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감사하면서 그 길을 가십시오.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다고 고백(기도)하면서 사십시오. 하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그 길을 가십시오.
그 길을 가다 만약 세상의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때는 지혜를 구하십시오(기도).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이 있는 듯 없는 듯 지혜롭게 행하여 그들 속에 복음의 길을 여십시오. 오늘 내가 이루어가야 하는 하늘의 일이 무엇인지 기도하십시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세상속에서 지혜롭게 살도록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때에 따라 사람들을 통해 기도로 동역하고
도움의 손길을 뻗치심으로 늘 우리의 삶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공급하여 주시는 은혜를 기억합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몸 된 교회로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굳건한 반석 위에
터를 세우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 코 끝에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전진하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의 곳곳마다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그 복되고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예배와 찬양의 기쁨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의와 그 나라를 구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