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남조 (1)
1.
수정(水晶)의 각을 쪼개면서
차차로 이 일에
겁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리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명등(明燈)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옥(玉)과 같은
진정한 시인(詩人)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며
그 공막(空幕) 그 정숙(精菽)에
첫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시인 /김남조 (2)
그는 어릴때부터
춥고 무섭고 외로웠다
자라면서 다른 사람들도
춥고 무섭고 외로워함을 알았다
멈추지 않는 눈물처럼
그에게 말과 글이 솟아났다
그는 시인이 되었다
시인에게/김남조 (3)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어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씁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나의 시에게 / 김남조 (4)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선창(船窓)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씁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하나
그 명칭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주언(呪言)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주겠는가
*김남조(1927) 시인. 경상북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교수(1955~1993)와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대표작으로 [목숨], [나이드의 향유] , [나무와 바람] , [정념의 기] , [풍림의 음악], [겨울 바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