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고요 향락* Luxe, calme et volupté
김경미 방을 옮겨야해요 통장을 다 부셔서 3백만원을 찾아야해요 11월이 다 가기 전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말 거예요 요즘 첫눈은 영 볼품없죠 빈 캐리어 들고 부동산엘 들리죠 첫눈을 다 쓸어담으려던 광란은 잊고 머리 벗겨진 마네킹들 나뒹구는 가발 가게를 지나 폐쇄된 화장실도 지나 전재산을 가진 은행엘 가죠 은행직원이 묻네요 어디에 쓰실 건가요 백만원 이상은 기록하게 돼있어서요 첫눈은 올해도 문짝처럼 아슬아슬 합니다 눈송이들 주워 담을 거 하나 없이 흩날리고 11월이 가면 세상은 모자이크 처리됩니다 전재산 용도를 자꾸 추궁하는 직원 그게 그렇게 큰 돈이었군요 고개들어 조용히 대답합니다 쇼핑하려구요 은행직원은 / 동행하듯 / 웃고 첫눈은 캐리어처럼 벌써 비어갑니다
* 보들레르의 시에서 차용한 마티스의 그림 제목
ㅡ계간 《포지션》 2024 겨울호 --------------------------- 김경미 / 1959년 경기 부천 출생. 1983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쉿,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 심사』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