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15일
인천 바다에는 수백척의 연합군 군함이 인천 바다를 꽉 채웟엇다
함포는쉴세없이 불을뿜엇고
우리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가 그날 새벽을 기회로 인천상륙을 시작햇다 .........
약 3개월전 6월 25일은 인민군이 쏘련 탱크를 앞새워 이남을 쳐들어온 날이다
9월15일 인민군이 남침하기 시작한지 3개월 후
인민군은 이미 낙동강변에까지 도달하여 대구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엇다
그때 인민군 포탄이 대구지역까지 날나와서 폭팔하고있엇다
낙동강 도강만 하면 그때 이나라 대한민국은 이지구상에서 사라질 찰라에 임한 광풍앞에 등불같은 운명에 처해 있엇다
수도를 제주도로옮기느냐 또는 대마도로 우선 옮기고보느냐 하는 찰라에 있엇다
이때 한미 해명대와 미 제7 보병사단이 인천상륙을
64년전 오늘 한것이다
그후 13일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이 다시 우리손에 들어오게 되어서 그동안 6월 28일 부터 9월 28일까지 약 3개월간 피란을 못간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의 구두발밑에서 혹독한 고생을 한것이엇다
625의 3년 간의 전쟁중에 가장 우리가 승전을 할수있든 최상의기회가 바로 인천상륙이엇다
인천상륙이 없엇드라면 아마 625는 대한민국은 물론 이북까지를 통털어 더 많은 피해를 입엇을것이다
이말은 무어냐 하면 만약 우리가 승기를 탓다 할지라도 낙동강변에서
평양까지전투를 하면서 밀고 올라갓드라면
인천상륙으로인한 전쟁터의 축소가 없엇을것이기 빼문이다
인천상륙으로 인하여 전선이 북상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는 그래도 전쟁터를 면햇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오늘날의 이남에서의 동서간의 분쟁의 씨가 될줄은 몰랏다 ???
이때 우리군에 카투사라는것이 처음 편성 되엇엇다
인천 상륙을 기회로 우리나라 카투사는 지금까지 미군과 같이 임무를 담당하고 복무 하고있다
육이오 전쟁중에 전사한 카투사는 약 일만 오천명 가량이다
인천상륙하면 가장 뜨 오르는것이 맥아더 장군 하겟지만
우리는 먼저간 우리 전우 카투사를 잊을수가 없다
앞으로 우리는 9월15일을 성전의 날로 정하여 기념행사를 더 크게 햇으면 좋겟다
625 전쟁 발발날 이나 휴전일 보다 승전의 기회를 갖인 날이 더 의미가 잇지 않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