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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2,1-4.6-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 입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며, 성탄시기와 주님 공현 주간을 마무리해 줍니다.
한편,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을 가르는 기점이 되고, 이제 성탄시기는 끝나고 연중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과 마침에서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곧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듯이, 공생활의 시작에서는 죄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일까요?
왜 죄 없으신 분이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도 이를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마태 3,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태 3,1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우리'라고 복수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하느님 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당신 구원의 동반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세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요한 1,10)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늘이 갈라지고 은총이 내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시대 왔음을 알려줍니다.
하늘과 땅이 화답하는 일치의 모습 안에서 그 기름부음의 성취는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이 선포의 내용은 셋입니다.
첫째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2장 7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임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곧 우리의 세례는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의 탄생’됨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서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란 ‘유일한 아들’임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하여 ‘사랑받은 존재’,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셋째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말하듯이, ‘마음에 드는’ 이란 ‘주님의 종’임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구원의 협조자로, 제 2의 예수님으로, 구원의 도구로 소명을 지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그 은총을 입었기에 그 사랑, 그 용서를 베풀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하여 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
(마르 1,10)
주님!
하늘이 갈라지고 은총이 내리게 하소서.
하늘이 땅에서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게 하소서.
기름을 부으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소서.
사랑받은 존재, 은총을 입은 존재로 살게 하소서.
당신의 영과 함께 아들의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죄인들인 군중 틈에 끼여서 아주 평범하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죄인도 아니시면서 죄인들 속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세상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들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특별하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0-11)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강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과 육신이시므로 성령과 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티토 3,5-7)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요한이 하고, 그 그릇을 채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인데,
그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회개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사도 22,16)
우리는 가끔 세례 주신 분을 기억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 신부님, 수녀님, 대부, 대모를 기억합니다.
다들 고맙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데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갈라 4,6)
그러므로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의 세례를 기억하고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세례명을 자주 불러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일깨우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 받은 사람은 아침을 이런 기분으로 시작한다>
1946년 정월 초하루, 경북 금릉군 조마면에서 제사를 준비하던 김씨 문중 사람들은 종손 며느리의 출산 진통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제사도 늦추며 기다린 아이는 종갓집 첫 딸이 되었습니다.
“내 눈물을 채우자면 한강도 넘칠 거예요.
항상 ‘너는 안 돼’ 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정월 초하루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누나를 지키려다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런 환경을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그녀는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왔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를 누가 좋아했겠어요?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쓴 종이를 들고 100군데 넘는 집을 돌아다녔어요.
딱 세 군데에서 문을 열어 주더라고요.
끊임없이 두드린 결과,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 주었어요.”
미국인과 결혼 후에는 시댁 식구들에게 “역시 미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은 별수 없다니까” 라며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두 번의 유산, 그리고 오래가지 못한 결혼생활...
이후 살아남기 위해 청소부, 웨이트리스, 주유소 직원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열심히 사는 와중에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커다란 교통사고까지 당해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태권도를 할 줄 알았는데 그 덕분으로 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었고 그 덕분으로 아이들을 아홉이나 입양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었습니다.
창업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청소 일을 할 때였습니다.
자주 보이는 곰팡이를 보며 ‘저 곰팡이를 모두 없앨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양아들 둘과 함께 이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설립한 ‘라이트하우스’는 반도체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미세 먼지 측정, 화학적 오염 등을 만들고 정화하는 시스템으로 미국 100대 우량 기업으로 동종 업계 세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그녀의 구호는 이것입니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녀가 인터뷰한 곳 뒤에는 성모님의 사진이 있고 십자가 목걸이를 하는 것을 즐깁니다.
아마 천주교 신자일 것 같습니다.
동생의 죽음도 분명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누나의 목숨을 지켜 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교도 분명 한몫 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은 이의 하루는 어떨까요?
김태연 회장은 152cm의 작은 키이지만, 한국이 낳은 여자 삼손으로 불리며 천재들이 몰려있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자기 회사 직원들을 호령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는 일을 힘들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너무나 저를 반짝 반짝하게 해주고 제 가슴을 설레게 하고, 또 무슨 연애를 하는 것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또 신부가 된 것처럼 그냥 이렇게 마음이 막 들뜨기도 하는 거죠. ”
이것이 세례를 받은 이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물론 자녀로서의 일도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일을 할 능력도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을 증명해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운동선수들에게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기자들이 묻습니다.
“지금 긴장되지 않나요?”
그러면 선수들은 말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흥분됩니다.”
이것이 성공을 보장하는 기분입니다.
그만큼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고 믿는 대로 됩니다.
한 직원은 김태연 회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알아요? 그녀는 세상을 볼 때 엄청난 장애물을 보지 않아요.
그녀는 허들을 보죠. 모든 사람이 넘을 수 있는 그런 허들을요.”
그녀도 맞받아칩니다.
“절대 포기하면 안 돼요. 당신 꿈을 다른 사람이 훔쳐 가게 두지 말아요.
그 꿈은 당신 거예요. 오직 당신 거죠.”
아기들은 걸음마도 제대로 못 할 때부터 이미 부모처럼 뛰어다닐 수 있음에 가슴 설렙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게 될 그 목표를 위해 오늘 할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이 세례 받은 이가 아침을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렸으며 갈구해왔던 주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첫 만남의 순간 예수님의 파격적인 모습에 깜짝 놀라는 동시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의 순간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꿈꾸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나?
그분을 만나면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하나?
그분께서 나를 보시고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처신하실까?
혹시라도 선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질책하시지는 않을까?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나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시면서 잘했다고 칭찬하실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자마자 다른 죄인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으려고 무릎을 털썩 꿇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강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종인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무릎을 꿇고 묵묵히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굿간 탄생부터 시작된 일관된 겸손의 덕을 계속 유지하셨습니다.
주인이시지만 종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한 인간 앞에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하늘 아버지께서도 깊은 감동을 받으신 나머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한없는 겸손 앞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를 예수님의 모습에서 온몸으로 배웁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무대 위로 올라가시도록, 그분의 빛이 떠오르는 강렬한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도록 자리를 마련해드리는 것, 그리고 자신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용히 사라지는 석양처럼 조용히 물러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의 겸손한 모습, 우리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 생활, 내 삶의 모습을 통해 회개의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를 받으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들 위치로 내려오셔서, 인간들과 같아지신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의 위치로 내려가 주는 것이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이리 올라오너라.” 라고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인간들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함께 영원히 사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6-17)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6-11)
여기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다.” 라는 말은 겉모습이 하느님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라는 말도 겉모습만 종의 모습으로, 즉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다는 뜻이 아니라, “참 사람이 되셨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1코린 8,6)
세례자 요한의 말에서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이고,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는 말은 “메시아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뜻인데, 세례자 요한이 그런 말을 한 것은 그 자신도 ‘구원받아야 할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면’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이라는 말은 “내가 주는 ‘물의 세례’는 구원받을 준비를 시키려고 주는 ‘회개의 세례’일 뿐이지만”, 즉 “나는 너희를 회개시킬 뿐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세례는 너희를 구원하는 ‘성령의 세례’다.”, 즉 “메시아께서는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갈라지다.” 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늘이 열리다.’ 라고 표현할 때도 많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이 따로 떨어져 계시다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로소 성령이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인간들의 눈에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본 것입니다.
“비둘기처럼”이라는 말은, 성령의 모습이 비둘기 모습과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 마치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비움의 여정 - 주님을 따름과 닮음>
“그리스도 왕이 이 지상에 나타나실 때
요르단강의 물이 성화되었도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성화시키셨으니
우리는 구원의 샘에서 물을 마셔야 하는도다.”
제가 늘 감탄하며 많은 영감을 받는 것은 가톨릭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에서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아침성무일도시 두번째 후렴 역시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사제의 부족한 강론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깊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전례임에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어제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고 내일부터는 평범한 일상의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두서없이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요즘 임윤찬 피아니스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가의 풍모가 보이는 아주 젊은 분입니다.
영혼과 사랑이 담긴 동영상 쇼팡의 녹턴이 너무 아름다워 어제는 들으며 위로와 치유의 거룩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배경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과 너무 잘 어울린 곡이었습니다.
또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리흐테르’의 <회고담과 음악수첩>을 틈틈이 읽으며 그의 대가다운 고귀한 인품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사제서품 후 35년 동안 아마도 가장 많이 꿨던 꿈은 “하느님 꿈”일 것입니다.
바로 강론 꿈입니다.
꿈속에서 강론을 완성하고 너무 좋아해서 꿈이 깬 후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의 별을 본 후 허전한 맘을 추스르며 강론을 쓴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이를 복된 ‘하느님 꿈’이라 일컫고 싶습니다.
참 많이도 꿈중에 썼던 강론들입니다.
저는 여전히 일어나면 작년 8.15일부터 시작된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후 강론쓰기로 하루를 시작하면 마음이 아주 상쾌합니다.
얼마전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만세삼창을 들었습니다.
2024.1.1.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미사시 강론 맨 끝부분 말마디가 저에게는 교황님의 성모님 만세삼창으로 들렸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세 번 외치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Holy Mother of God! Holy Mother of God! Holy Mother of God!)”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인류의 빛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로 우리는 세 신비를 기리는 데 바로 어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이를 잘 요약했고 곡도 가사도 참 아름답고 흥겨웠습니다.
“오늘 별이 박사들을 구유에로 인도하였고,
오늘 혼인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하였으며,
오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도다. 알렐루야!”
바로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더불어 그분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세례와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미사시 화답송 후렴 역시 어제 대축일 미사 화답송 후렴처럼 아름답고 흥겨워 하루 기도노래로 바치려합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스치듯 떠오른 말마디 “비움의 여정; 주님을 따름과 닮음”을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시종여일 비움의 여정을 사셨던 주님의 거룩한 생애였고 하느님은 충만한 생명의 부활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비움의 여정을 사셨던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삶을 살라는 모범입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른 두편의 비움을 갈망하는 자작시입니다.
욕심도 이보다 더 큰 욕심은 없을 것이나 거룩한 욕심이라 생각하며 자위(自慰)합니다.
“커져서 텅빈 공(空)이 되고
작아져 무(無)가 되어 살수는 없을까
물러나 하늘 배경이 되고
내려와 땅 마당이 되어 살 수는 없을까
온전한 사랑이 되어
예수님처럼!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무아(無我)의 삶이겠다
진아(眞我)의 삶이겠다
하느님같은 사랑이겠다”
-1999.12.
무려 25년전 시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로우니 진리는 영원한 현재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다음해 주님 부활 축일 다음 파공날 다 외출한 후 주방 앞에 환하게 핀 민들레꽃의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한달간 저를 위로하고 치유했던 “민들레꽃”이란 시입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닮고) 있다”
-2000.4.24.
비움의 충만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닮아갈수록 비움의 충만의 역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비움은 그대로 겸손과 순종으로 직결되어 표현됩니다.
말 구유 안에 뉘어 계셨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니 정말 파격적이요 비움과 겸손의 절정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표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시니 하느님의 기꺼운 화답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예수님의 신원은 우리의 고귀한 신원도 확인시켜 줍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본격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비움의 여정에 들어선 우리 하나하나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는 예수님과 우리를 통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가며 닮아가야 할 내용입니다.
다음 주님의 종은 예수님이자 여러분 하나하나에 해당된다고 믿으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우리 믿는 이들은 한몸의 운명공동체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은 물론 우리들의 신원이자 사명입니다.
“그”를 “너”로 바꿔 읽어 봅니다.
“내가 너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
너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너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너는 지치거나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아,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실현시켜 가야할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온통 깨어 있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고요하고 섬세한 모습입니다.
관상가과 신비가의 영성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결코 이기적 폐쇠적 자기 안에 갇힌 수인(囚人)이 아니라 주위에 활짝 환히 열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이웃을 위한 복음 선포의 사명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너를 빚어 모두의 계약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였으니,
1.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2.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3.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내기 위함이다.”
무지의 감옥, 무지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무지에 눈먼 중생들에게, 빛을, 길을, 희망을 잃은 중생들에게 우리 모두 주님의 빛이, 주님의 길이, 주님의 희망이, 주님의 해방자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사명이자 과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의 은총이 세례성사를 완성시켜 주며 우리 모두 날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론도, 하느님 나라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담아낸다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론이고, 바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의 삶일까요?
오늘 독서는 그 방법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그렇습니다.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것입니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신자로서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준 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변비가 심해서 도저히 관장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정말 죽을 것 같다고 호소했습니다.
저는 가운만 걸치고 환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환자의 딱딱하게 돌처럼 굳어있는 변을 파냈습니다.
환자는 울면서 고마워했습니다.
누구도 해 주지 않았던 일을 제가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자신이 전직 국회의원이었다고 하면서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 앞을 지날 때면 과일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는 어떻게 아셨는지 축의금도 보내셨습니다.
서울 숲 근처에 빌딩을 하나 사서 임대를 주었습니다.
임대료를 싸게 해 주었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습니다.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 드리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했습니다.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조카에게 무엇을 하면 좋겠는지 물으니 ‘치킨 집’을 하라고 했습니다.
인테리어를 하고, 드디어 치킨 집을 열었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습니다.
몇 년간 운영을 해 보니 매년 1월은 적자였습니다.
서울 숲은 겨울에 사람들이 적게 오기 때문입니다.
1월 한 달은 휴업을 하고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었습니다.
직원들은 건강검진도 받고, 자기 계발도 하고,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휴가를 마친 후에는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수익이 커지면 직원들에게 월급 이외에 상여금을 더 주었습니다.
직원들은 더욱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였습니다.
가게에 있으면 손님들이 원하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손님이 유아용 의자와 이유식을 먹일 수 있도록 전자레인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이 좋아했습니다.
와인을 가져와서 마셔도 좋은지 물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와인을 가져다 놓았더니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드러낸 간호사와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바로 그분들이 세례 받은 신앙인의 모범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노년기는 행복한 시기일까요? 아니면 불행한 시기일까요?
사실 노년기야말로 인간에 가장 행복한 시기여야 합니다.
많은 경험과 지혜의 축적으로 좋은 것을 극대화하고, 나쁜 것을 최소화하는 데 능숙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소한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으며, 어떤 일이 중요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게 됩니다.
감정으로 더 현명해지고, 그 지혜는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이 노년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남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늙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 곁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으로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늙음보다는 당연히 젊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노년기의 장점이 그렇게 많은데도 말이지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바로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시각을 줄여 나가고, 대신 긍정적으로 지금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관계가 소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관계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합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관계 개선을 그분과 하지 못한다면 더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웃에게 한 행동 하나하나를 하느님께 한 것으로 하겠다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이웃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십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 같습니까?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 가장 좋은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 즉 자신을 가장 낮춘 상태, 어떤 이와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태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굳이 받을 필요도 없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관계가 아닌 긍정의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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