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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깡쇠
사라졌던 글을 재업합니다
내 동생 깡쇠 1편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깡다구가 좋아 본명인 강소보다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인 깡쇠로 통했다.
아홉살에 육이오를 당한 나는 당시 평양에서 살다가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폭격으로 주저앉은 대동강 다리 교각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 월남을 했었는데 그때 어린 깡쇠를 등에 업으신 아버지가 교각위를 앞에서 기어 가시고, 나도 뒤에서 따라 오시는 어머니 앞에서 앞서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엉금엉금 그 뒤를 따라 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어머니가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하셨던 간증데로 “뭔지 모를 커다란 손 같은 것에 번쩍 들려서” 그 아슬아슬한 교각 위를 무서운줄도 손시린 줄도 모르고 건너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후 서울 변두리 마포 국민학교 옆 무허가 판자촌에 정착을 해서 훗날 미국에 이민을 올 때까지 거기서 살았었다.
삼팔 따라지 1.5세인 우리형제는 단둘이 고생하면서 자란 덕에 유난히 우애가 좋았고, 특히 동생 깡쇠는 밖에 나가면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다가도 일단 집에 들어오면 내게는 깍듯이 경어를 썼으며, 내 말이라면 토 한번 다는 일 없이 절대 복종이었다.
워낙 가난하고 무식한 집안에서 태어나신 탓에 어리셨을 적 이웃집 어른을 통해 한글이나 겨우 깨우치신 아버지를 따라 공사장 날품팔이와 넝마주이, 지겟벌이등 완전 막노동으로 끼니꺼리를 마련 하느라 온 식구가 분주한 중에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결국 만 열여덟 살이라는, 반에서 제일 나이 많은 학생으로 겨우 초등학교 속성과정인 공민학교를 마치는 것으로 나의 가방끈은 끝이 났는데 나는 그것이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정도로 한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가기 싫어하는 내 동생 깡쇠를 두들겨 패서 강제로 학교를 보냈다.
그 덕에 깡쇠는 최 하류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포구 남쪽 변두리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깡쇠는 문자 그대로 깡다구 하나로 깡패 학교 중에도 으뜸 간다는 그 시궁창 같은 고등학교에서 짱으로 날리면서, 교내는 물론 학교 남쪽의 한강로 일대에서 멀리 북쪽 마포 텍서스 골목 일대까지 평정을 하면서 이름을 날렸었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술담배나 마약 등을 일체 안 하는 것이 신기해서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대답이 기가 찼었다.
깡패도 몸을 쓰는 스포츠맨인데 무절제한 생활로 몸을 망가트리면 선수 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우기 술이나 마약에 취해 헤롱대고 있는 사이 어떤 놈이 치고 덤빌지 모르니 힘이 모자라 싸움에 실패할 수는 있어도 정신이 흐트러져 경계에 실패할 수는 없다는 맥아더의 격언까지 인용하면서 썰을 푸는데 “과연 내 동생이로다” 하고 감탄이 저절로 나와 당시에는 우리 가족 이틀 생활비가 넘는 오백원짜리 한장을 꺼내준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과부가 되신 후 해장국 집 식모 살이를 하시던 중 다섯 살이나 아래인 미군을 만나는 바람에 우리 형제는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다행이 체격이 좋고 힘이 셌던 우리 형제는 미국 땅을 밟은 직후 양코백이 계부의 권유와 알선으로 얼른 미군에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한국주둔 시 기지촌에서 술을 따르던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지만 동생은 나 만큼 조차도 여복이 없었던 탓인지 설흔이 넘어서도 아직 미혼이었다.
학교라고는 문전도 가보시지 못하고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 한글이나 겨우 깨우친 덕에 떠듬 떠듬 성경이나 겨우 읽을줄 아시는 깡 무식쟁이 어머니와 목포 부둣가에 위치한 어느 초등학교를 그저 말석이나 겨우 면할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한 내 마누라는 편지 문장을 제대로 만들 줄 몰라 한국의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편지 대신 카셋트 테이프를 만들어 보내야 했었는데, 그 테이프를 틀어 놓고 듣고 있으면 신의주가 고향이신 어머니와 목포가 고향인 마누라의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두가지 사투리가 어울려 라디오에서 나오는 코메디 같았다.
할줄 아는 것이라곤 어려서부터 뒤 따라다니며 배운 토수쟁이 일과 군대에서 배운 운전이었기에 제대 후에 동생과 함께 여기 저기 일꺼리를 찾아 웰더나 플러머를 하면서 한편으론 돌파리 자동차 정비와 바디샵을 해서 죽어라고 돈을 모은 덕에 몇 년 안가 그런데로 집도 마련하고 정착을 할수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생활이 안정 되었다 싶었을 때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서 였다. 마침 일요일 오후여서 집에 앉아 있는데 깡쇠가 아주 다 죽은 얼굴로 찾아왔다.
집안에 들어 서자 마자 닷자곳자 내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형님, 이놈이 오늘 죽을 죄를 지었쉬다, 죽을 죄를 지었쉬다” 하면서 꺼이 꺼이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동생이 생전 안하던 짓을 하는 통에 어리둥절 해진 내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묻는 동안, 날 때부터 목포항 영번지 사교계(?) 에서 온갖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고 살아온 아내는 이미 무언가 눈치를 챈듯, 이웃이 듣지 못하게 얼른 얼른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나는 동생의 입에서 문자 그대로 완전히 귀가 의심이 될 만큼 청천벽력 같은 고백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나가시던 교회의 목사님의 사택의 온수 보일러가 수명이 다 되어 그것을 새 것으로 바꿔 달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동생이 그 집엘 갔었던 모양이었다.
하필 동생이 한창 작업을 하고 있는 그 때 목사한테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신도가 위독한 상태여서 급히 심방을 와 달라는 전화 요청이 있어 목사 혼자 떠나고 사모 혼자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을 마친 깡쇠가 떠나려고 하자 사모가 차 한잔 하고 가라고 붙드는 바람에 잠시 앉아 쉬겠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모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널부러 진채 반 기절 상태에서 울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콰아아아아--ㅇㅇㅇㅇㅇ...)
당황한 깡쇠는 허둥지둥 그 집을 뛰쳐 나와 나한테로 온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난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맞은듯 눈 앞이 캄캄해 지면서 숨조차 쉴 수가 없어 한동안 입을 벌린체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돌아오자 “야 임마아!”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엎드려 울고 있는 동생의 덜미를 붙잡아 방바닥에 매다 꼱으려고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아내가 “오오메에, 이양반이 되롬(도련님의 전라도 사투리) 죽이것네, 되롬 죽이겄어” 하면서 필사적으로 내 팔에 매달리며 늘어지는 바람에 그 무게 때문에 할수없이 도로 내려 놔야 했다.
그러자 아내는 “사모도 그렇제, 일 끝나고 가겄다는 되롬을 남편도 어디 가고 혼자 있음시로 멜갑시(이유없이) 왜 붙들어 놓는당가? 더우기 여자인 나도 반허게 생기신 분이…” 하고 은근히 “사모가 먼저..” 하는 식으로 암시를 하면서 시동생 편을 들었다.
내가 펄쩍 뛰면서 “머이 어드레? 사모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너 같으면 이런 산돼지 같은 놈이 눈이 뒤집혀서 뎀비는데 무서워서 가만히 있지 별수 있갔네?” 하고 쏘아 붙이자 모욕감을 느낀 아내가 “옴마, 이 양반이 왜 나는 거그다가 쑤셔 넣고 그려? 시방 먼 뜻으로 헌 소리여? 응? 먼 뜻이여어어어-?” 하고 악을 쓰면서 대들었다.
앗차 싶으면서 당황한 내가, 방금 뱉어낸 말을 취소하느라 애를 쓰는 동안 모두들 이성을 회복하면서 그 바람에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갈아앉았다.
정신이 들자 당장 목사 부부가 경찰에 신고라도 할 것이 걱정이 되었다.
일단은 동생을 집에다 붙들어 놓고 밖에 나가지못하게 단속을 하는 수 밖엔 없었다.
경찰이 찾아오면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무마할 터이니 절대로 도망치거나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잡혀 가라고 동생에게 일러두었다.
그러나 일 주일을 넘어 이 주일이 지났는 데도 경찰이 찾아오거나 전화가 오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게 (바디샵) 에서 일을 하던 중 가게 앞에 경찰차가 한대 와서 서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갔는데, 경찰의 입에서는 기대했던 최악의 소식보다 더 앗질한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내동생 깡쇠 2편
한 시간 후 나는 경찰서 시체실에서 동생의 유해를 붙들고 목을 놓아 대성 통곡 하고 있었다. (ㅠ….)
죄책감을 견디지 못 한 깡쇠는 혼자 집 근처의 숲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고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하면서 경찰이 건네 주는 쪽지에 는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듯이 저도 용서해 주실줄 믿고 주님 앞으로 갑니다.” 라고 쓰여있었다.
“아니, 세상에 예수님 앞으로 유서를 써 놓고 자살하는 놈이 다 있나?”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내 동생 깡쇠는 역시 남다른 데가 있음을 느꼈다.
동생의 장례식은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만 모여 지냈다. 가족이래야 나하고 아내 둘 뿐이었지만.
삼우제를 지내러 동생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을 하는 나에게 아내는 “되롬이 인자 예수님 따라가신 것이 분명헝게 천국에서 엄니랑 함께 잘 지실(계실) 것이요. 긍게 인자 고만 슬퍼헛시요” 하고 위로하다가 도리어 나보다 더 슬프게 울기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울다 말고 아내를 한참동안 정신없이 쳐다보다가 이번엔 반대로 내가 아내를 달래야 했었다.
다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던 중에 만난 인생들이라 어느 집 보다도 더 짙은 정으로 얽혔던 사람들이니 이렇게 떠나보내는 마당에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ㅠ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씨애틀에 머물 낯이 없어 부랴부랴 가게를 처분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멀리 동부 커넥티컷으로 도망치듯 떠나갔다.
그래도 어머니의 성묘는 해야 하겠기에, 매년 어머니 기일이면 남몰래 씨애틀을 찾으면서 동생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곤 했다.
매년 동생의 무덤을 찾으면서도 나는 이 사건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우리 가족들의 죄라곤 험한 환경과 싸우면서도 나쁘게 살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다인데 운명의 신과 무슨 악연이 얽혔기에 불쌍한 내 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만큼 그러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단 말인가.(오오 하나님, ㅠㅠㅠ...)
혼자 있을 땐 때때로 동생의 일이 생각키우면서 너무나 기가 막혀서 “어마니- 아바지- 두분이 기렇게 착하게 사셌는데 왜 강소가 그런 식으로 떠나야 했읍네까아?” 하면서 통곡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러는 나에게 같이 다시 교회에 나가자고 가끔 권하곤 했지만 그럴때 마다 나는 “난 이제 하나님 안 믿는다. 너 혼자 나가라우! 내 앞에서 교회 얘기 꺼내디도 말라우” 하고 도리질을 치곤 했다.
그러면서 이십 년이 지났다. 슬픔에 젖은채 흘러가는 세월 중에도 장사는 잘 되어 생활은 꽤 유복했지만 그럴수록 동생 강소에 대한 생각은 더해 갔다.
“지금 정도 재산이면 한 몫 뚜욱 떼어서 강소에게 그럴듯한 가게라도 하나 차려주고 어엿한 규슈 하나 구해 장가를 보냈으련만..” 하고 부질없는 미련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모처럼 동생의 기일에 맞춰 씨애틀에 왔다.
특별히 비싸게 주고 산 큼직한 화환을 사들고 동생이 누워있는 북 씨애틀의 아카시아 메모리얼 파크까지 렌탈카를 운전해 가는데, 파크 입구가 보이면서부터 벌써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차를 해놓고 차에서 내리려던 나는 얼른 다시 돌아서서 부리나케 차 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동생의 묘비 앞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누굴까?)
자세히 보니 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하얀 것이 아무래도 박목사 부부 같았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젊은 처녀였다.
나를 보지 못했는지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며 내가 숨어있는 렌트카 옆을 지나가는데 그 동안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새었고 얼굴들이 늙었지만 틀림없는 박목사 부부였다.
그 처녀가 깡총거리면서 뭐라고 수다를 떨면서 박목사와 팔장을 끼었다가 사모의 등에 매달렸다가 하고 어리광을 떨면서 지나 가는데 목사 부부를 “아빠,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이 그집의 딸인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 아이가 생겼구나… 잘 됬네)
그런데 가까이 지나가는 옆모습으로 보니 그 처녀는 키가 아버지인 박 목사보다도 크고 넓적한 얼굴에 눈이 째지고 살결도 검었다.
작은 키에 얼굴이 서양 사람 같이 하얗고 긴데다가 크고 우묵하고 동그란데다 쌍가풀 진 눈에 코가 우뚝하고 뽀족한 한 박목사 부부하고는 생김새가 전혀 딴판이었다.
박목사는 키가 내 귓가에나 겨우 닿을락 말락할 만큼 작고 마른 체구여서 내가 곧잘 장난으로 박목사를 “솔방울 목사” 라고 불러서, 그때마다 목사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모시는 어머니한테서 “거참, 마귀같은 소리레 하디 돔 말라우야!” 하고 꾸중을 듣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 보는 박목사는 하늘 높이 만큼이나 크게 생각되었다. 아니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부부가 같이 한국에서 최고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인데도 처음부터 신학에 뜻을 두어 미국 동부의 어느 이름있는 신학교에 유학해서 함께 나란히 목사안수를 받은 후 여기 저기서 손을 내미는 좋은 자리들을 마다하고 씨애틀 남쪽에 위치한 시끄러운 동네인 레겐스버그(가명) 지역에서도 특히 범죄와 마약이 들끓는 가장 위험한 곳을 찾아오신 분들이었다.
총소리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극도로 험한 지역의 한 복판에 위치한 낡디 낡은 집을 사서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수리한 후 그 집에서 검소하게 살면서 거리를 헤메는 숱한 청소년들과 한인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다니던 분들이었다.
처음에는 전도하러 나갔다가 강도질도 당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더니 드디어 갱단끼리의 총격전이 벌어진 십자로 가운데에 고립되어 사모님이 왼 손목에 총를 맞는 등 죽음의 문턱까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돌연 총소리가 뚝 그치면서 사면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 박목사 사모가 벌떡 일어서며 왼 팔목에서 피가 솟구치는데도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Please Stop Fightimg! Stop Fighring! Pleeeeeease!” 하고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날리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왼 팔에서 피가 땅에 뚝뚝 떨어지는데도 이번에는 두 손을 모으고 애원하듯 하는 사모의 모습에 그 잔인한 갱들도 질렸는지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출혈로 인한 쇼크때문인지 사모는 고개가 앞으로 꺾이면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순간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길 양 쪽에서 갱단원으로 보이는 두 젊은이가 두 손을 든채 일어서더니 사모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서 둘은 뒤로 쓰러지는 사모를 양쪽에서 부축하면서 웃옷을 벗어 그 위에 눕히고 둘이서 각자 자기 허리띠를 풀어 지혈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자 두 젊은이는 얼른 일어서더니 “High Five”를 하고는 자기들이 왔던 쪽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은 물론 타주의 신문과 티브이 뉴스에도 피를 흘리며 두 팔을 치켜들고 싸움을 그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모의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며칠 후 갱 조직들간의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는데 골치를 앓아오던 시장과 시 보안관의 부탁으로 박목사가 각 조직들의 두목들을 교회로 불러 중재를 해서 유혈사태를 진정시켜달라는 희한한 부탁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비록 갱들이지만 어렸을적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몸에 베인 사람들이었던지 박목사가 그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간곡한 부탁을 하며 중재를 하자 갱 두목들은 자기들끼리 어떤 조약을 맺었던 모양이었다.
그 때 설교에 인용된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 40절까지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을 통해 목사는 생명이 위험해졌던 목사 사모를 위해 총격전을 멈추었던 모든 갱단 멤버들과 자신의 아내에게 응급조치를 해 준 두 청년을 주님 앞의 가장 작은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던 사람들에 비유하면서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았던 사람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을 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로 자신이 저지른 사회적인 범죄 때문에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신앙의 불을 다시 지펴지게 하는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고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박 목사는 설교 도중에 강도질이나 약물거래, 성매매 등에 관한 말을 일체 하지 않고 오로지 급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한 직접적인 도움을 강조했다.
그 후로는 과거 매일 서너 명씩 사상자가 나는 통에 한인목사들이 모두 기피해오던 그 험악한 거리에서 다른 일로는 몰라도 적어도 갱들간에 영역다툼이나 지분다툼 때문에 서로 찌르고 쏘는 일만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고 만약에 분쟁이 생겨 타협이 안될 경우 박목사에게 중재를 부탁할 정도로 그 동네는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때 입은 총상으로 사모는 왼 손의 사용이 불편해졌는데도 남편을 따라 여전히 왕성하게 선교활동을 쉬지 않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동네 갱들도 박목사 부부와 박목사의 교회만은 건드리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여기게 될 정도로 박목사 부부는 그 동네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만약에 내 동생이 목사 사모한테 한 짓이 알려 졌더라면 경찰 보다는 그 갱들이 먼저 동생을 죽이러 찾아 왔을 것이다.
아직도 두 분은 매일 같이 사람이 죽고 다치던 그 적선 지역에서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저 박목사 부부는 자신들에게 천하에 몹쓸 일을 저지른 내 동생 깡쇠를 경찰에 고발하는 대신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그 힘든 기도를 했음이 분명했다.(아아- ㅠㅠ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기에, 깡쇠가 죄책감을 못 이기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러한 유서를 남긴 것임을 이십 년이 지난 이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슬하에 자식이라곤 없는 우리 부부가 죽은 후에 유산을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지 그 답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아니 하나님의 음성으로 내 가슴을 치듯 들려왔다.
커넥티컷으로 돌아가면 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저 두분 앞으로 유산상속 유언장을 작성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차를 타고 사라지는 박목사 가족을 바라 보는 내 입에서 저절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들이시다!”
순간 내 마음 속에 평생 처음으로 견딜 수 없는 무슨 회개 같은 것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런 것이 그간에 들을 때 마다 닭살 돋는 소리라고 비웃던 소위 “성령의 감동하심” 인가 보다 생각되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얼른 손수건을 꺼내 두 눈을 감싸는데 기도가 터져 나왔다.
“ㅠㅠㅠㅠㅠ....하나님! ㅠㅠㅠ....절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잘 믿고 말슴 안에서 동생을 잘 가르치라시던 어머니의 유언도 마다하고 동생을 제대로 지도하디 못해 큰 실수를 저지르도록 방치 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참으로 사악하고 못된 놈은 저 자신이었음을 모르고 이제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아온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부터는 아내의 권고를 받아들여 다시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열심히 잘 섬기며 살갔습네다. ㅠㅠㅠ….”
後記
눈을 뜨니 아내가 운전하고 있는 옆자리에 앉아 잠이 들었었나 보다.
차가 교회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는데 아내가 틀어 놓은 카 스테레오에서 우리 부부가 좋아해서 자주 부르는 찬송가 412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가 구성지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完)

첫댓글 오늘도 여호와 닛시... 영적전쟁에서 승리...
부활신앙, 영생복락...
모든 육신 질병 치유..여호와라파..
임마누엘
축복의 날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