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성 척추염’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척추의 인대가 뼈처럼 점차 굳어지는 질환입니다. 비교적 드문 질환이지만 병의 진행이 빠르다고 합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허리가 구부정하게 굳어 전방 주시가 힘든 상태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현재 강직성 척추염은 남성이 여성보다 2~3배 더 걸리는 질환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우열’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는 중위권 정도고 조용한 성격이었습니다. 서로 사는 동네가 다른 데다 내성적이다 보니 결석을 해도 모를 정도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풍이나 체육대회 같은 때도 어디 앉아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상고에서 중위권 실력으로 졸업을 하면 농협이나 축협이라든지 기업체의 경리 정도로는 충분히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껑충 흘러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어쭙잖은 꿈을 안고 귀향을 했습니다. 방위로 군복무를 마친 우열이는 집배원 모자를 쓰고, 빨간색 자전거 짐받이에 우편가방을 싣고 다니면서 편지 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집배원은 기피 직업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닌데, 왜 집배원이 되었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물어보고 싶었으나 경력이 벌써 10년이 넘은 상황이라서 새삼스러운 질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우열이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나 걸어 다닐 때 자세가 구부정하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예사롭게 봤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허리가 불편해 보였습니다. 우열이에게 직접 물어보기가 민망해서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소한 병명이라서 자세히 물어보니까 척추의 인대가 뼈처럼 굳어서 나중에는 곱사처럼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편물이 늘어나자 우편집배원들은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했습니다. 우열이의 증세를 모르는 사람은 멋있게 오토바이를 타느라 허리를 잔뜩 굽히고 달리는 모습으로 비쳤을 겁니다. 하지만 오토바이에서 내려서 굽은 허리 때문에 상대방을 쳐다볼 때 눈만 치켜뜨는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겁니다.
언젠가 집에 편지를 배달하러 왔길래 커피를 함께 마시며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허리도 아픈데 퇴직을 하고 쉬는 것이 안 좋으냐고 묻는 말에 우열이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우열이의 계획은 50세까지 근무를 하면 퇴직연금으로 생활비 걱정은 없을 것이다. 퇴직하는 해에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서 허리 수술을 하면 반듯하게 펼 수가 있다. 그때는 생활비 걱정 없으니까 포도농사나 지으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살아가겠다는 계획입니다. 그 말에 수술을 할 수 있으면 휴직을 하고 지금이라도 하는 것이 안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수술하면 허리는 반듯하게 펴지는데 굽힐 수가 없어. 막대기처럼 꼿꼿하게 서서 오토바이를 탈 수는 없잖아.”
우열이의 말에 저는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굽은 허리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은 좀 불편하더라도 견딜 수가 있는데, 뻣뻣한 자세로는 눈앞의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우열이는 허리가 점점 굳어져서 오토바이를 타지 않을 때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모임이나 여행, 서울이나 부산의 행사에 갈 때도 항상 빠지지 않았습니다. 허리가 굽어서 장시간 기차나 버스를 탈 때 불편할 텐데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걸어서 이동할 때도 천천히 보조를 맞춰주는 친구들과 즐겁게 대화를 하며 걸었습니다. 다들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우열이는 계획대로 5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서울에 있는 경희대학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수술하기 전의 우열이 표정은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참는 눈치였고, 고향에서 서울까지 올라간 동창들은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어서 일찍 물러섰습니다.
수술이 잘 돼서 허리가 반듯하게 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면회를 갔습니다. 그 무렵엔 저도 몇 권의 소설책을 출간했고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글 쓰는 것이 어느 정도 몸에 배어 있을 때입니다. 마침 신간을 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편소설을 한 권 들고 갔습니다.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살아가던 우열이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직은 일어날 수가 없어서 누운 자세로 동창들과 악수를 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축하한다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수술 결과가 좋아서 퇴원한 우열이의 인생 하반기는 더 이상 땅을 바라며 걷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습니다. 등뼈에 철심을 박아서 허리를 숙일 수는 없지만 포도밭에서 전지를 하고, 알을 솎아내고, 수확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성격이 차분하니까 포도농사도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잘 지었습니다. 농촌에서는 한 달에 백만 원 정도만 꾸준히 나와도 금방 부자가 됩니다. 우열이는 열심히 포도농사를 지어서 집도 새로 짓고, 남매뿐인 자식들도 결혼을 시켰습니다.
딸 결혼식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술잔을 내밀며 이제 자식 농사도 다 끝났으니 농사 그만두고 편히 살라고 말했습니다. “딴 친구들은 죄다 일하고 있는데 놀면 뭐 하냐?” 우열이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편입니다. 그날은 기분이 좋은지 얼큰하게 마신 얼굴로 빙긋이 웃었습니다.
지난달에 동창회 총무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우열이의 부음(訃音)을 알리는 글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 포도축제 때 같이 전어구이를 먹던 모습이 떠올라 총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병원에 입원해서 내일쯤 병문안을 갈 예정이었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우열이의 아들을 바라봤습니다. 올해 서른여덟 살이라는 우열이의 아들도 허리가 굽어져 있었습니다. 우열이처럼 키가 훌쩍 큰 데다 검은색 상복을 입어서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슬픔을 못 이겨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제 눈에는 젊은 시절의 우열이가 서 있었습니다.
조문객들이 앉아 있는 식당에서 동창들과 술잔을 주고받을 때였습니다. 우열이 아들이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우열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동창에게 우열이 아들도 같은 병이냐고 슬쩍 물었습니다. “유전병이잖여. 우열이 죽을 때까지 고생했지.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저 병이었잖아. 그래서 우열이 집배원이 된 거여. 편지배달 하다가도 어머니 일 생기면 집에 가 볼 수 있잖여.”
동창의 말에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영정을 바라봤습니다. 하얀 국화꽃을 수놓은 액자 안에서는 평생 부모와 자식을 위해 굽은 허리로 우편물을 배달하고, 포도송이를 솎던 40대 시절의 우열이가 착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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