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비밀
방화자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고 있는 오월의 숲으로 산책을 나섰다. 코끝을 스
치는 싱그러운 냄새며 미풍에 춤을 추는 나뭇잎들의 율동이 여유롭다.
오월의 숲은 젊음 그 자체다. 그래서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고 싱싱하며
풋풋하다. 무한한 가능성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나는
오월의 숲을 사랑하고 또 나의 청춘시절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늘 향해 힘차게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은 나의 이십대를 연상하게 한
다. 높은 이상을 꿈꾸며 매사에 자신감을 가졌던 시절. 때묻지 않은 순수
한 사고로 마음껏 자유로웠다.
젊은 남녀 한 쌍이 다정스런 눈빛으로 밀어를 속삭이며 숲길로 걸어간
다. 희망에 부푼 저들의 모습은 마치 봄이면 제일 먼저 온산을 붉게 물들
이는 진달래의 꽃봉오리처럼 청순하고 아름답다. 나도 한때 저들처럼 부
푼 가슴으로 미래를 꿈꾸던 때가 있었을 텐데... 기억 저편에서 희미한 흔
적이 점점 크게 부각되면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선명하게 다
가온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이십대 중반에 꿈처럼 스쳐간 일들이 떠오
른다. 학교를 갓 졸업하고 모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고향 충주
에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비료공장이 세워져서 전국 공대 출신 엘리트
들이 많이 있었다. 친구중 누군가가 미팅을 주선하여 여덟명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남녀 각기 결혼 적령기였던 터라 가볍게 즐기는 만남으로 여
기지는 않았다. 매번 여덟명이 붙어다녔고 그러는 사이 서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젊음과 낭만이 함께 하던 그 때는 날마다 푸른 꿈이 하나 둘씩
쌓여만 갔다.
어느 따뜻한 봄날 토요일 오후에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호암지에서
뱃놀이하자는 제안에 합의를 했다. 한 배에 네명씩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보니 서로 호감을 갖는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알아차리게 되었다. 다행히
내 관심을 끌던 사람은 나와 같은 배를 탔었다.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연못 위에 가득히 울려 퍼지고 가슴 가슴엔 뜨거운 열정이 솟아올랐다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다보니 자연스럽
게 짝이 지어졌고 오붓한 둘만의 대화로 가슴이 뜨거워 졌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양 포만감에 휩싸였고 새소리 바람소리까지도 축복의
속삭임으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우리의 합동미팅은 끝이 나고
그날 맺어진 짝꿍끼리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학교일
보다도 정신은 온통 충주에가 있었고 그 친구 만날 생각에 가슴은 설레곤
했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한때의 내 인생을 장식했던 인연들.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들 가고 있을까. 그들도 그때의 추억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것일
까. 오월의 싱그러움은 다 사라지고 짙푸른 녹음의 계절인 여름을 성큼
지나 가을의 문턱에서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한 중년의 초조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지나온 날 보다는 살아갈 날들이 짧아서인지 나는 요즈음 차분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무엇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가는지 마치 쫓기는 듯한 절박감으로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청정하고 생기 넘치는 오월의 숲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을까.
꾀꼬리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나뭇잎 사이로 울려 퍼진다. 깃털처럼 일
렁이는 바람결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뭇잎들은 어쩌면 저리도 질서
정연할까. 어느 것 하나라도 뒤틀리거나 뒤바뀐 것이 없다. 위치의 높고
낮음을 탓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며 잘도 자란다.
이 푸른 오월의 숲도 이 모습대로 영원히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불도저에 밀려서 원치도 않는 변화 속으로 밀리고 또 밀려 갈
것이다. 우리 인생이 세월에 밀려 변해가듯이 그렇게 소리도 없이.
계절에 따라 깊은 의미를 던져주는 숲은 나에게 선견지명의 지혜를 가
르쳐준다.
겨울의 긴 침묵에서 깨어나 새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봄의 신록은
모든 이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폭염과 갈증에 시달려도 의연하게 자라 산소를 공급하고 그늘을 만들어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여름의 숲.
떠날때를 알아 마지막 남은 정열을 화려하게 불태운후 조락의 늪으로
잠기는 가을 숲은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순리대로 살아가라는 순명의
지혜를 일러준다.
나목으로 긴 겨울을 북풍과 싸우며 깊은 침묵 속에서 도를 닦는 스님의
정신으로 인고하는 겨울 숲은 새로운 삶을 위한 또 다른 준비 기간이다.
나는 오늘 이 맑고 푸른 오월의 숲 속에 묻혀 나의 의지가 아닌 숲이
전해주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싶다. 내 영혼까지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그런 소리를.
숲은 나더러 나무의 살아가는 법과 덕을 배우라고 한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말없이 온몸으로 감내를 하는 아량과 묵
묵히 따르는 의연함을 본받으라고 한다.
오월의 숲, 그대는 나의 스승이요, 지혜와 위안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큰 힘의 소유자다. 번뇌와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내게 평화를
준다.
오월의 푸르름이 오래 가지 않듯이 청춘 또한 잠깐 머물다 가는 인생
과정이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는 그리움으로 가슴깊이 간직했다가 오늘
처럼 살짝 꺼내어 음미해보는 맛 또한 커다란 즐거움이 아닐까. 이미 가
버린 젊음을 더는 슬퍼하거나 탓하지 않으리라.
숲 속의 맑은 향기로 목욕을 한 몸과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것
처럼 가볍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초록색 드레스로 치장한 숲 속의
요정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오늘부터 꿈을 꿀 것이다. 찬란한 오월의 숲처럼 향기로운 나의
미래를 위한 꿈을...
1999.
첫댓글 숲은 나더러 나무의 살아가는 법과 덕을 배우라고 한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말없이 온몸으로 감내를 하는 아량과 묵
묵히 따르는 의연함을 본받으라고 한다.
오월의 숲, 그대는 나의 스승이요, 지혜와 위안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큰 힘의 소유자다. 번뇌와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내게 평화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