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생각
지워졌던 글 재업하는 중
나는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에 있는 산골의 작은 마을의 교회의 나이 많은 권사입니다.
오래전에 신학교를 갓 졸업하시고 새내기 전도사로 부임해 오셨던 분이 그후 이 교회에서만 사십년이 넘는 세월을 봉직해 오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시어서 어엿이 원로 목사가 되시었고 연세도 올해 칠십둘 이시지만 부임 때부터 통기타를 치시며 늘상 부르시던 노래 “오빠생각” 은 여전히 십팔번이십니다.
이 “오빠 생각” 은 나에게는 참으로 잊지 못할 가족사 같은 노래 이기에 여기다 우리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봅니다.
우리오빠는 내가 디섯살 나던 해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 면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아버지 농사일을 돕고 살던중 육이오가 나서 징집되어 간 후 육십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돌아 오지 않은체 행방불명자로 기록되어있고 나의 부모님께서는 오빠가 돌아 오기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다가 지쳐서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홀로 남은 나 혼자 부모님을 같이 모신 옆에 오빠의 가묘까지 곁들여 만들어서 해마다 정한 날이면 세분 합동으로 목사님을 모시고 남편과 자식 손주들까지 모여 추모제를 지냅니다.
우리오빠와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나서 사람들이 농담으로 딸이냐고 묻기도 했다는데, 사실은 나와 오빠 사이에 다른 언니 오빠들이 많았지만 모두 돌림병으로 죽고 나만 남았다고 합니다.
오빠는 나를 무척 예뻐했고 나 또한 오빠를 항상 졸졸 따라다녀서 때때로 면사무소에 데려다가 옆에 앉혀 놓고 일을 보시기도 했답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막 입학하고 두어달 남짓 했던 어느날 이른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골목 길에 나와 웅성거리면서 무언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마을 지서의 순경이 찾아와서, 오빠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가더니 다음날 새벽 어딜 가는지 작은 보따리 한 개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나서는 오빠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두운 표정으로 뒤따라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오빠 어디가? 나도 같이 갈래” 하고 매달리자 오빠는 “지금 서울가는 길인데, 오는 길에 이쁜 비단신발 하고 맛있는 찹쌀떡 사다 줄게” 하며 나를 달래서 떼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빠를 마지막 보는 순간이 될것이라는 것을 어린 나는 전혀 짐작도 못했습니다.
저녁 때 부모님께서 찾아온 동네 사람들과 구름이 잔뜩 끼신 표정으로 이야기 하시는데, 동네 청년들 모두가 마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군인들의 인솔하에 읍내로 갔다는 말과 읍내에서 디른곳에서 온 장정들과 함께 곧바로 일선으로 갈 것이라는 말슴을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후 얼마 안 지나 멀리 산넘어에서 처음 들어보는 “쿵 쿵 따다닥 따다다다..” 하는 무서운 소리가 들려오자, 부모님은 어린 나를 데리고 동네를 떠나 피난길에 오르셨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렸던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을 따라 다니기에만 바빴고 이곳 저곳 피난을 다니면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이상한 사투리와 거치른 눈초리가 그저 무섭기만 했었습니다.
인민군들을 피해 도망치는 끝없는 피난길 끝에 부산까지 갔었던 우리 가족이 겨우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왔을 때의 마을은 피난을 가기 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변해 있었습니다.
마을은 굵은 나무 울타리와 흙담 으로 완전히 둘러 쌓이고 곳곳 마다 초소가 세워져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들에 나가 일하던 마을 사람들은 해지기 전에 모두들 서둘러 집에 돌아와 문들을 잠그고 일체 바깥 출입을 안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총소리가 심하게 들리고 밖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씨는 우리 마을 말씨와는 달리 피난지에서 듣던 것 같이 이상했습니다.
어머니는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온 인민군들을 잡기위해 출동한 기동타격대 대원들이라고 하시면서 무서워 하는 나를 이불로 덮어 놓으셨습니다.
그런일이 있고나면 가끔 기동타격대들에의해 사살된 인민군들의 시체가 지서 앞에 전시되기도 했었고 한번은 우연히 그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셨던 어머니가 마구 토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후 기동타격대도 철수하고 마을을 둘러쌌던 울타리와 흙담도 사라지면서 모든것은 전쟁 전과 같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남자들도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몇은 끝내 못 돌아 왔습니다.
못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우리 오빠도 끼어 있었읍니다.
그런데, 못 돌아온 사람들중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전사자나 미 귀환 포로로 확인이 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 오빠만은 전사자 명단에도 국군 포로 명단에도 들어있지 않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청에까지 가서 탄원을 하여 겨우 알아내신 것이 동부전선 어느 곳의 전투에서 중공군과의 혼전증에 마지막 보인후 어떻게 되었는 알수가 없다는 것과 전사한 것이 확실 하지만 그 곳이 비 무장지대 안에 깊숙히 들어가 있어 접근이 불가능 한 곳이기에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고 꾸준히 오빠를 기다리시는듯 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방바닥을 치시며 “날아가는 기러기야 말물어 보자 우리 아들 정인이 어디 갔느냐? 동서남북 땅을 치며 불러를 봐도 무정한 산천초목 대답이 없네” 하고 노래를 부르시듯 넉두리를 하실 때는 완전히 실성한 모습 그대로여서 그것을 본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어 나와 마침 집 문앞에서 마을 이장과 이야기 하고 계시던 아버지를 불러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어느덧 자라서 읍내의 중학교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 사무소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중 스무살이 넘어갔는데, 오빠를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마음은 옛날이나 다름없이 한결같이 간절 그대로 였습니다.
어쩌다가 신작로에 군 트럭같은 차가 나타나면 혹시나 하는 눈치로 나가보기도 하시고, 버스나 택시가 마을 입구에 와서 서면 밭일을 하시다 말고 서서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 자세히 살펴 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마을 신작로 옆에 있는 밭에서 일하시다가 마을 앞 신작로에 정차한 시외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몸이 갑자기 왼쪽으로 기웃둥 하시더니 그대로 쓰러지셨습니다.
마침 같이 일을 하던 동네 청년들이 급히 아버지를 업어다가 방에 눕혀드리는 한편 마을 의원을 불렀으나 아버지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시고 그날 저녁을 못넘기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오빠도 아버지도 다 떠나시고 어머니하고 나만 남았습니다.
아버지를 산소에 모실때 아버지를 형님처럼 따르셨던, 그 마을 이장되는 분과 그 아들되는 최총각이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 주었습니다.
그후 나는 그전부터 자주 우리집에 전도하러 왔던 최총각을 따라 마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는 원래 마을 이장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 시작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도 정식으로 예배를 인도하실 분이 없어 가끔 읍내 교회의 목사님들이 와서 설교를 해주시기도 했었지만 대개는 마을 이장이 대신 예배를 인도 하고 설교도 맡아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나는 그 마을 이장의 아들 최총각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최총각, 아니 남편이 집사로 있는 마을 교회에 어머님을 모시고 출석 하면서 교회 서기와 성가대원으로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결혼하고 몇달 지나 교회에 서울에서 젊은 전도사님이 부인과 함께 부임해 오셨습니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하시고 ROTC 장교로 제대하신 후 좋은 직장을 마다 하시고 곧 바로 신학의 길로 들어 서신 분이라고 부임하시는 첫날 이장(시아버님)께서 소개를 하셨는데, 그분은 부유한 집 자제로서 교육을 많이 받으신 분답게 귀티가 넘쳤고 세련된 서울말씨와 깎듯한 매너가 시골 여인인 내 눈에는 마치 영화배우 처럼 멋있게 보였습니다.
그분은 찬양인도를 하실때면 의례이 통기타를 매고 나와 신도들 사이를 돌아 다니시며 우렁찬 목소리로 힘차게 노래하시는 것이 마치 학교 음악 선생님이 군가를 부르시는것 처럼 들렸습니다.
어머님은 그간의 충격을 차츰 신앙으로 극복하시면서 안정이 되어 가시는듯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남편의 인도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오빠가 징집되어 가신후 내내 집안을 무겁게 내려 덮고 있던 어두운 분위기가 차츰 가시면서 생활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께 드리신다고 어머니가 정성스레 만드신 삼계탕을 들고 교회뒤 목사님 사택으로 갔을 때 방안에서 목사님이 통기타를 치시며 사모님과 함께 이중창으로 노래하시는 소리가 들려 나왔습니다.
뜸북 뜸북 뜸북 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 새
숲에서 울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 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 . . .
. . . .
“꼭 네 오빠를 두고 하는 노래같구나”
나직히 말슴하시는 어머니의 음성에 그러나 더 이상 슬픔 같은 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完)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VUkpHxkOkuc
기러기 (윤복진시. 박태준곡) -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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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5HUf9215v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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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
축복으로 행복하세요.
감사충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