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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혁신의 가장 큰 적은 사실에 근거한 현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 페이스북, 구글, 인공지능”은 30년 전에는 이해할 수 없거나,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에는 개인의 책상에 컴퓨터가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전화기에 컴퓨터를 넣는 것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화기는 걸고 받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너무 느렸고, 사용하는 사람도 적었고, 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페이스북, 구글 , 인공지능은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진실에 입각한 꿈, 과학에 근거한 꿈은 함께 할 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2억이라는 큰돈을 기꺼이 기부한 남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매의 나이는 이제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유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매는 생전에 어머니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기억하였고, 어머니의 뜻을 따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동생은 아이의 돌을 축하하며 생애 첫 기부를 하였고, 5살이 된 딸은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고, 재판까지 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상속세를 아끼기 위해서 불법으로 회계를 조작하고, 투자한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주는 기업인도 보았습니다. 부모의 유산은 당연히 나의 것이고, 상속세는 가능하면 내지 않으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낌없이 어머니의 유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부한 남매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는 치욕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국가에 반역한 사람, 중죄를 지은 사람이 십자가 형벌을 받았습니다. 며칠씩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야파에게 끌려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형시키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의 폭동이 두려워서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벌을 선고하였습니다. 죄목은 ‘유대인의 왕’으로 반역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 명예, 업적, 능력’이 내가 해야 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 헌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고,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었지만 신앙인에게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가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명장은 숙련된 자기만의 무기가 있다>
복음: 요한 3,13-17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매달아 죽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현양 축일은 주님의 십자가를 현양하고 감사하는 날일까요? 물론 그것도 맞겠으나, 내가 어떠한 십자가를 매고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만 보며 나의 십자가를 내려놓는다면 그것만큼 십자가 현양 축일과 어긋나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이유는 불뱀에 물린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치유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장대에 들어 올린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내가 뱀에 물려 죽어갈 때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구리뱀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모세는 구약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셨듯이, 모세도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불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자신을 죽여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아무리 자아라는 불뱀에 물렸더라도 모세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은 다시 살았습니다. 구원은 자기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이뤄진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워 와서 우리 자신을 매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것입니다. 지금 불만 가득한 나의 자아를 죽이는 나만의 도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자아를 매달면 이제 자아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가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도구들이 모두 십자가가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아내의 머리를 자신의 모자라고 착각한 사람이 나옵니다. 유명한 성악가로서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는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내의 머리를 모자로 착각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도 자아에 지배당하면 사람을 물건처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 이상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자아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모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바로 노래가 십자가입니다.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가 정상적으로 살려면 쉼 없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원인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더라도 손이 있고 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어떤 수술을 받고 나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 것이 아니고 자신은 몸이 없는 사람처럼 된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눈으로 손과 발이 있음을 확인하고 머리로 명령을 내려야 그것이 움직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자아입니다. 이 자매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일일이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몸을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사라져버린 몸의 의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의 특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각자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이기는데 사용하는 무기들이 다 똑같지만은 않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장대를 이용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이용하셨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어떤 장수는 창으로, 어떤 장수는 칼로, 어떤 장수는 표창으로, 또 어떤 고수는 부러진 칼에 줄을 매달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선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관우, 장비, 여포의 무기는 모두 창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비는 쌍칼을 휘둘렀습니다. 몸이 창을 쓰기에는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는 마더 데레사가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무기를 쓰면 안 됩니다. 각자의 삶에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면 그 무기로 싸우면 누구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숙련시켜야 합니다. 그 무기로 누구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저도 나름대로 무기를 찾고 연습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호흡과 이명을 이용합니다. 특히 이명이라는 저를 괴롭히는 질환을 이용합니다. 자아에 휩쓸려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이명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명을 의식하면 들립니다. 그리고 이명이 들릴 때마다 주님과 함께 있음을 의식하려 합니다.
이명이 생기면 이명을 안 들리게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는 그것을 오히려 저의 무기로 담금질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각자의 십자가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를 이기는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자아를 이길 때, 다른 이들이 그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로 현양하는 삶입니다.(전삼용신부)
2020년 09월 14일 월요일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대영광송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입당송
갈라 6,14 참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불평을 하던 이들에게 불 뱀을 보내시고, 구리 뱀을 만들어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8(77),1-2.34-35.36-37.38(◎ 7ㄴ)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내 백성아, 나의 가르침을 들어라. 내 입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입을 열어 격언을,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언을 말하리라. ◎
○ 죽이시던 그때서야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다시 돌아와, 하느님이 그들의 바위이심을 기억하였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
○ 그 입으로 그분을 속이고, 혀로는 그분께 거짓말을 하였네. 그분께 마음을 굳건히 두지 않고, 그분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네. ◎
○ 그분은 자비로우시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셨네. 당신 분노를 거듭 돌이키시고, 결코 진노를 터뜨리지 않으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성자께서 십자가 제대에서 온 세상의 죄를 없애 주셨으니
이 거룩한 제사로 저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5 :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승리(9월 14일)>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또는>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2,3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님,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생명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저희가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고통과 슬픔의 상징인 십자가가 영광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요한 복음입니다. 구약의 구리 뱀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특효약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에 불 뱀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간청으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고자 구리 뱀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요한 복음에서 구리 뱀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이상 죽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의 상징으로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삶의 고통과 슬픔을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얼른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고통과 슬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영광과 기쁨 속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즐거이 함께하셔야 한다는 강박이 신앙을 괴이한 처세의 도구로 타락시키고 맙니다.
요한 복음이 쓰인 당시 교회 공동체는 늘 박해의 위협 속에 살아갔습니다. 얼른 박해가 끝나고 고통이 없는 행복의 나라에서 주님을 섬기고자 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을까요. 그러한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세상의 구원은 십자가의 희생, 바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려울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나의 자그마한 희생 안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거기에 참된 행복과 영광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요한 복음은 짚어 냅니다. 지금을 불평하는 것은 지금을 죽이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서로 나누고 토닥이고 보듬어 주는 것은 지금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삶의 고통이나 슬픔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마저 함께하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