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산신령
신라시대에는 오악의 산에 국가에서 주관하여 산신제를 올렸다.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방법은 오늘의 무속신앙 형태였을 것이다.
소도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산신제도 북을 치고 춤을 추는 형태였을 것이다. 오늘의 무당이 굿을 하는 방식이리라. 이것은 근대 종교로 발전하기 이전의 원시신양에서 행하는 일반적인 양식이다. 원시종교는 귀신을 달래므로 이적을 바라는 형태이다.
신라시대에 제사를 지낸 오악 중에 토함산을 제외하고는 여신이 산신령이었다. 큰 제사를 지냈다는 삼산(三山)의 산신도 김유신 장군의 전설에 의하면 여신들이다. 서약의 선도산은 사신이 서술신모이고, 윤제산은 운제신모, 치술령 산신은 박제상 부인의 전설로 유명한 망부석 즉 치술신모가 산신이다. 지리산은 노고 할미이고 영취산은 판재천녀이다. 토함산의 산신인 석탈해도 본래는 여신이었는데 후대에 와서 부권이 강화되면서 변형된 것이라고 말한다.
팔공산의 산신에 대해서는 꼬집어서 말할 자료가 별로 없다. 그러나 여신의 면모도, 남신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일반적인 흐름과 마찬가지로 아득한 옛날에는 여신이 산신령이었고, 부계사회가 되면서 남신이 산신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다. 다시 불교가 득세한 후에는 불교적 색깔로 각색되었을 것이다.
오악의 신이 여신이었던 시절에는 팔공산 산신도 여신이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부인사에서 봄에 아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올리는 선덕여왕 숭모제에서 여 산신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다. 불교 이전에 여신을 모시던 흔적이 아닐까?
동화사의 창건 설화에 의하면 심지대사가 법주사의 영심대사에게 종통을 이어 받아 불간자를 갖고 팔공산에 왔다. 팔공산의 산신령이 심지대사를 영접하였다. 절의 창건 설화이니까 이야기의 내용에서 절과 스님의 위상이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설화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아직은 삼국시대가 배경인 김유산 장군의 설화에서는 산신을 여신이라고 분명하게 말 하였다. 삼산의 여신이 나타나서 김유신이 위기를 넘기도록 도와 준다. 동화사의 창건 설화에 나타나는 산신은 남신인지, 여신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느낌으로 남신이리라 추측된다. 두 번 째는 남신이더라도 불교의 존재 앞에서 이미 권위가 떨어진 산신의 모습이다.
고려의 무신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경주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고려의 중앙 정부에서 토벌군을 내려 보냈다. ,이때 따라 온 이규보가 팔공산에 올리는 산신제에 제문을 지었다. 제문에서 팔공산 산신령을 ‘대왕’이라고 불렀다. 무속신앙에서 보면 남신의 존칭이다.
제문에 의하면 산신제를 올리는 방법에서도 ‘깃발을 높이 달고 흰 칼날을 세우고, 종을 울리고 북을 치면 젓대를 불고 비파를 탔다. 거기다 백희(百戱)의 재주를 즐겼다.’라고 하였다. 이규보의 제문에 의한 산신제는 작은 마을 단위의 산신제가 아니다. 국가 단위의 제사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말고기도 올리고, 소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마을 단위로는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의례의 기본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고려시대에 올린 산신제에서 보면 팔공산 산신은 남신이었다. 여신에서 남신으로 바뀐 것을 보면 신령님도 영원히 장기 집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산신 사이에 권력 이양이 일어날 때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작용한다. 민중들의 의식 수준도 큰 역할을 한다.
고려의 건국신화에서 여신이 남신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신화를 통하여 팔공산 산신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성골장군 호경(고려 태조 왕건의 7대 조이다.)이 하루는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에 사냥을 나갔다. 날이 저물어 크다란 바위 굴에서 밤을 보내려고 하였다.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굴 앞을 가로 막았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잡아 먹으려 한다면 두려움에 떨었다. 마을 사람은 모자를 던져서 희생 당할 사람을 정하기로 하였다. 모자를 던지니 호랑이는 호경의 모자를 취하였다. 호경이 마지 못하여 굴 바깥으로 나오니 굴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 안의 아홉 사람은 모두 죽었다. 범도 사라져 버렸다.
이후에 호경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려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 여산신이 나타나서 ‘나는 과부이다. 다행히 장군을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고 이 산을 다스리려 하니 장군은 이 산의 ’대왕‘이 되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신과 호경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을 사람은 호경을 대왕으로 모시고 사당을 지어서 산신제를 올린다고 하였다.
이 신화는 고대에는 여신이 산신이었으나 남신으로 바뀌면서 대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 전설은 고려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지만 산신의 내력을 말해준다. 이 신화는 신라에서 고려로 권력 이동이 일어나면서 여신에서 남신으로 바뀌는 과정을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배경을 말해준다.
산신 신앙은 다시 불교와 결합한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 군대를 대파한 후에 연산에 개태사라는 절을 짓는다. 그때의 발원문에 ‘부처와 신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신은 토속신을 말한다. 즉 산신이다. 산신과 불교가 결합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부처와 토속신이 평등의 관계는 아니다.
팔공산 동화사의 창건 설화에도 불교와 산신이 대립 관계가 아니고 결합의 관계를 보여준다. 역시 평등이 아니다. 이미 불교가 산신에 대해 우위에 있었다. 따진다면 산신은 팔공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예전부터 모셨던 박힌 돌이고 불교는 외래에서 들어 왔으므로 굴러 온 돌이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꼴이다. 박힌 돌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뽑혔을까? 아니다. 틀림없이 저항하였다. 힘이 모자라서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손쉽게 정착하기 위해서는 토속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속신앙과 친화력이 높은 불교 교파가 유리하다. 바로 밀교 계열이다. 팔공산에도 불교가 들어 올 때는 밀교 계열의 불교가 앞장을 서므로 토속신의 저항을 약화시켰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