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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과 도피를 넘어 (렘2-20)
2026년 10월 9일 (금요일)
찬양 : 어둔 밤 쉬 되리니
본문 : 예레미야 20:1-18절
☞ https://youtu.be/H7fH4P3YtOg?si=WgZbK9n-tLAhygUM
어제 목회사관학교 5주차 수업을 은혜롭게 마쳤다. 사관생도들의 뜨거운 열정에 감동과 박수를 드리고, 이들을 위해 헌신해 주시는 강사님들의 헌신에 진심으로 뜨거운 박수와 존경을 보내드린다.
오늘은 한글날로 금요기도회가 쉬는 날이다. 오늘은 나도 조용히 주일 설교를 마무리하고 나를 정비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은퇴’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잘 안다. 그런데 은퇴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면 볼수록 부끄러운 것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어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만난다.
은퇴하면서 이 문제를 넘어가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는다.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잘한 것도 내려놓아야 하고, 실수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유독 실수한 자리가 자꾸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내 안에 주님의 주인되심과 그분께 나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뭔가 나를 완전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어제 목회사관학교 묵상 강의를 하면서 전도서 4장에 나오는 "나의 수고는 누구를 위한 수고인가?"라는 전도서 4장의 질문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메아리친다.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수고하고 달려왔는가? 진정 주님을 위한 수고였는가?
이런 나를 정비해야 하는 날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까?
오늘 본문은 19장에서 예레미야가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서 옹기를 깨뜨리며 예루살렘의 끔찍한 파멸을 선고하자,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 치안 책임자였던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 격분하며 시작된다.
거짓 평안과 성전 불패 신앙을 외치던 종교 기득권층에게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은 묵과할 수 없는 성전 모독이자 반역으로 들렸을 것이다.
결국 바스훌은 하나님의 대변인인 예레미야를 구타하고, 성전 윗문(베냐민 문)에 있는 나무 형틀에 채워 밤새도록 공개적인 수치와 육체적 고통을 가했다.
이곳은 성전 뜰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하고 번화한 출입구였다. 당시 성문 앞 넓은 광장은 재판과 행정이 이루어지는 법원 역할을 했기에, 즉각적인 형벌을 집행하기 위한 형틀을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설치해 두는 것이 관례였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곳, 즉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에서 공개적인 망신과 조롱을 당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공식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 처음으로 신체적 폭력을 당한 이 참담한 사건이 오늘 본문의 시작점이다.
이는 "누구든지 예레미야처럼 성전의 멸망을 입에 올리는 자는 이처럼 철저히 짓밟고 수치를 주겠다"는 기득권층의 무서운 경고이자 본보기였다.
그런데 다음 날 풀려난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이렇게 예언한다. 3절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형틀에서 풀려난 예레미야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타협하지 않고, 자신을 핍박한 바스훌에게 곧바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고한다. 그는 바스훌의 이름을 여호와께서 <마골밋사빕>, 즉 ‘사방으로 두려움’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바꾸셨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 그에게 거짓 예언을 들은 모든 친구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비참하게 죽어 묻힐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이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저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수치심 앞에서도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라, 헛된 평안으로 백성을 속인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을 대언한 것이다.
외부의 핍박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복수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것이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참된 종의 모습임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본문은 이렇게 대외적으로 당당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내면에서는 얼마나 깊이 흔들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7-8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음으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하기만 하면, 그 소식이 늘 파멸과 멸망의 경고였기에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로 돌아온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려 해 보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자신을 뼛속까지 태우며 견딜 수 없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9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종으로 걷는 자가 겪는 뼈아픈 딜레마다. 말씀을 전하자니 세상의 조롱과 핍박이 쏟아지고, 전하지 않자니 내 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불붙는 것 같아 나를 태워버리는 기막힌 사명자의 고독인 것이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방이 들려오고, 심지어 친한 벗들조차 그가 실족하기만을 기다리는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결국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11절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이 처절한 탄식의 순간에도, 그는 크고 두려운 용사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신뢰하며 최고 재판관이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억울함을 온전히 위탁하는 신앙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사명자의 내면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처절하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이 대목에 너무나 깊이 공감한다. 지금 나의 내면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14절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8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분명 11절에서 최고의 신앙 고백을 올려드렸던 예레미야인데, 곧바로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바닥 난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이토록 인간의 처절한 현실을 얄팍하게 미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참 좋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철저히 신뢰하며 찬양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하지만 오늘 당장 내 피부로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의 대변인'이라는 현실은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인간의 얄팍한 언어로 덮고 넘어갈 수 없는 무거운 자리다. 예수님조차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숨 막히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기막힌 현실이 예레미야의 삶에 끝없이 계속될 것을 알기에,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사역의 은퇴를 앞두고 있는 지금, 나는 지난날 나의 실수와 연약함들로 인해 마음이 한없이 위축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그러나 어쩌면 주님을 따르는 종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훈련의 자리가 바로 이런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내 실수로 인한 '위축', 고난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도피'의 유혹, 그리고 알량한 성과로 인한 '교만의 착각'이라는 자리다.
예레미야는 이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고 탄식하는 한없이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 뼈아픈 고백이 바로 예레미야의 본모습이며, 동시에 바로 내 모습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깨닫는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초라한 인간의 밑바닥 자리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진정한 종은 자신이 이토록 무력하고 초라한 인간임을 철저히 아는 자여야 하며, 또한 이런 나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자임을 이 아침에 다시금 기억한다.
내 지난 실수로 인한 부끄러움에 갇혀 위축된 채 주저앉아 있는 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십자가 용서와 크신 사랑을 무시하는 무서운 '불신앙'임을 깊이 깨닫는다.
아울러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는 내가 세상 사람보다 뛰어나거나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토록 기가 막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있음을 내가 먼저 뼈저리게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을 향해 전하며 악한 길에서 돌아오도록 외치게 하심임을 분명히 마음에 새긴다.
내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다가올 사역의 후반전에는 영혼을 향한 심판자의 자리를 내려놓기를 다짐한다. 오직 하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깊이 경험한 자답게, 그 큰 사랑으로 함께 울어주며 포용하되 하나님의 뜻만큼은 단호하게 전하는 종으로 서고 싶다. 주님, 이 종을 받아 주소서.
한줄 묵상 :
<자신의 초라함과 뼈아픈 실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기가 막힌 용서와 사랑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서는 것이 사명자의 진짜 믿음입니다.>
적용 질문 :
1. 주님의 뜻대로 살려다 세상의 조롱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예레미야처럼 깊은 딜레마와 침체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섰습니까?
2. 나의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사명의 자리에서 위축되거나 도망치고 싶은 '도피'의 유혹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부끄러움에 주저앉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무시하는 무서운 불신앙'임을 인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