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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하는 자와 순복하는 자 (렘2-21)
2026년 10월 10일 (토요일)
찬양 : 겸손히 주를 섬길 때
본문 : 예레미야 21:1-14절
☞ https://youtu.be/qFEb_Ga4ae8?si=TdUyIQy9_KhRuuDY
한글날, 공휴일로 설교 준비를 하고 나의 삶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우리의 말과 글을 가지고 있음은 엄청난 축복이다. 우리가 감정과 삶을 우리 글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굴곡 속에서 선조들이 땀과 눈물을 흘리고 생명까지 바쳐 지켜낸 덕분임을 기억한다.
거룩한 주일을 준비하는 오늘, 선포할 설교를 PPT로 정성껏 제작하고, 내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될 교회를 위해 엎드려 기도하며 깊은 영적 교감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은 시대적 배경이 요시야 왕, 여호야김 왕을 지나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시대(주전 589~588년경)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즉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겹겹이 에워싸고 숨통을 조여오던 국가적 최후의 위기 상황에서 펼쳐진 내용이다.
이때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두 사람을 보내 유다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2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드기야 왕은 제사장 스바냐와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을 예레미야에게 보낸다. 여기 나오는 바스훌은 20장에서 예레미야를 때린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는 다른 사람이다.
왕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과거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하룻밤 새 18만 5천 명이 몰살당했던 그 '기적'을 기대한 것이다.
시드기야는 평소에 들려진 말씀에는 듣지 않다가 다급해지니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철저한 회개는 없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려는 얄팍한 종교적 기대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하나님은 4-6절에 걸쳐서 충격적인 대답을 하신다.
바벨론 군대를 물리쳐 주시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서 친히 무기를 드시고 바벨론의 편에 서서 유다를 치시겠다는 선언이다. 특히 압권은 5절이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본래 구약성경에서 '편 팔과 강한 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주로 사용하신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유다를 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 진노란 거친 숨을 내쉬는 콧김을 묘사한 단어다. 반면 분노란 히브리어 헤마란 단어로 거친 콧김을 넘어,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맹렬한 열기를 뜻하는 단어다. 그리고 이어진 대노는 케체프 가돌이란 단어로 화산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주변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고 부수어버리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폭발력을 의미하는 단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심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리신 것이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이방인 바벨론에 대한 항복은 매국노요 배신이며 극도의 수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너희의 생명을 전리품처럼 얻는 길"이라고 외친다.
즉, 징계의 매를 달게 맞는 것, 내 고집과 뜻을 꺾고 그 수치를 감당하는 것만이 곧 진짜 생명을 얻는 '순종'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분명한 사실을 확인해 주신다. 10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지금 하나님이 유다를 향해 얼굴을 드심은 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하시기 위함이니 헛된 고집을 버리고 항복하여 하나님의 징계에 순복하라는 엄중한 선고다.
그리고는 유다 왕의 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1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에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을 알려주신다. 그것은 화려한 성전 예배가 아니라, <아침마다 공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건지는 것>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긍휼과 정의를 상실한 신앙은 아무리 골짜기와 평원 바위, 즉 요새 위에 세워졌다며 "누가 우리를 치리오" 하고 교만하게 외쳐도, 결국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선포하신다. 13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나는 네 대적이라>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대적이 되어 그 행위대로 벌하고 모든 것을 불사를 것이라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시드기야는 선지자를 이용해 눈앞의 위기를 모면할 기적만을 구했지만, 하나님이 진정 원하셨던 것은 '아침마다 행하는 긍휼과 정의로 압제받는 이들을 건져주는 구체적인 삶'이었다. 이 일상의 순종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은 친히 대적이 되어 맹렬히 진노하시며 그들을 앞장서서 심판하신다. 죄악을 결코 방관하지 않고 매를 드시는 이 무서운 공의야말로, 역설적이지만 그들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집은 끝내 이 정의를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집에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그가 왕이 되어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렘 23:5).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은 탈취당한 우리를 죄와 사망이라는 압제자의 손에서 건지시려고, '나는 네 대적이라' 하신 그 진노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셨다.
유다가 끝내 거부했던 수치의 길을, 주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끝까지 걸어가셨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걷는 항복과 순종의 길은 살아남기 위한 굴복이 아니라, 나를 위해 먼저 그 길을 가신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오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묻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과 삶의 이면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포장에 속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내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신앙은 참으로 철없는 신앙이며, 주님을 가장 슬프고 분노하시게 하는 일임을 뼈저리게 새기는 아침이다.
오늘 나의 삶은 어떠한가?
거룩한 주일을 하루 앞둔 오늘, 혹시 나 역시 시드기야처럼 주님을 이용하기 위해 주님 앞에 서려는 사람은 아닌가? 진정 나의 삶과 사역이 주님의 뜻을 향해 온전히 순복하며 동행하고 있는가?
주님, 이 종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전히 당신 앞에 섭니다. 당신이 부르신 뜻대로 '오늘'이라는 삶을 묵묵히 살아내게 하소서. 내게 부여된 이 하루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하여, 내 헛된 고집을 꺾고 겸손히 주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위기의 순간에만 기적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실천하려는 십자가 지는 순종이 진짜 신앙입니다.>
적용 질문 :
1. 나는 평소에는 주님의 뜻에 무관심하다가, 위기가 닥쳤을 때에야 시드기야처럼 기적을 구하며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유다에게 '생명의 길'이 수치로 여겨지던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었듯이, 오늘 내가 '항복'해야 할 순종의 길은 어디일까요?
3. 오늘 하루 내가 돌아보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탈취당한 자, 연약한 자'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