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완주여행] 600년 은행나무와 동학혁명기념관.........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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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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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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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유랑자는 만경강 옴서 감서정에서 발길을 돌려 한옥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피곤에 지친 탓일까 조
금 늦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오자 시절에 어울이지 않게 겨울비가 비가 추
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서 아~오늘의 여행은 야외는 틀린 것 같아 일단은 실내를 도는 일정으로 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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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가 지난날 코로나19로 인해서 문을 닫았던 한옥마을을 위주로 돌아보리라. 마음먹고 서둘러 한옥마
을로 들어선다. 골목 한편에 주차를 해 놓고 우산을 들고 미리 선정해 두었던 곳을 찾아 골목길을 어슬렁거린다.
아직 오픈시간이 아니라 기다려야 하는데 비 때문에 딱히 들러볼 곳이 없는지라 이곳저곳을 기웃 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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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년된 은행나무는 전주 한옥마을 대표하는 상징적은 은행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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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거리를 동쪽으로 올라와 오른쪽으로 돈다. 한옥마을의 은행로 북쪽이다. 한옥마을의 경기전에서 오목대 밑
에 이르는 길이 태조로, 북쪽 동부시장서 남쪽 전주천 청연루에 이르는 길이 은행로이다. 한옥마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나무가 한 그루가 있는데 바로 은행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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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로 북쪽에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전주 최가인 월당 최담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정사를 창건하
고 심은 64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그래서 ‘은행로’라 한다. 그런데 640여 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나무 밑
동에서 2005년부터 새끼 은행나무가 새로 자랐다. 고목에서 새싹이 자랐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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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革命記念館(동학혁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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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옛 정신의 뿌리로부터 새로운 정신이 돋아난 것은. 분명 상서(祥瑞)로운 일이다. 과연 법고창신(法古創
新)이다. 즉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 한다는 뜻이된다. 이는 다시 개화(開化)가 아니고 다시 개벽(開闢)이다.
혹자는 개화파의 좌측이 민주주의이고 우측이 산업화라고 한다. 2018년 병통의 근대를 개벽하는 생각을 해본
다. 개벽은 알다시피 동학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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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가 있었고 개벽파가 있었다. 개벽파는 지금의 근대가 아닌 또 다른 천하를 기획했다고 생각해본다. 개화
파의 근대를 ‘개화근대’라 한다면 개벽파의 시대를 ‘개벽근대’라 할 만하나 그 말을 쓰지 않는다. ‘개벽천하’라 한다.
그런데 우연(偶然)일까?, 필연일까?, 암튼 우연치 않게 바로 이 은행나무 앞에 동학혁명기념관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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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10시 10분전 동학혁명 기념관 오픈만을 기다리며 비를 맞으면서도 먼저 기념관 외관 벽면의 사진과
글들을 읽어본다, 건물의 둘레 벽에는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들인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 김덕명 등의 인물
화가 붙어 있다. 이 기념관은 1995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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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봄이 아니건만 그러나 곧 동방에 봄이 올 것이다. 봄이 오면 온 산천은 꽃으로 얼룩지겠지만 아직은 추
운 겨울이라 쌀쌀한 날씨속에 옷깃을 여민다. 그러나 세기(世紀)를 앞질러 때 이르게 핀 꽃이 있었다. 동학이다.
동학은 때 이른 시대의 봄을 찾아 피었다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한때 꺾였으나 640여 년 된 은행나무
에 새나무가 자라듯이 신 동학을 생각한다. 신 동학을 ‘다시 개벽천하’라 이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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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의 백산봉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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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월의 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는 내리고 1월의 날씨답게 제법 바람도 쌀쌀하다. 우중충한 날씨 을
씨는 스럽고 한기를 느낄때 쯤에서 유랑자는 시간에 맞추어 문 앞에 다가선다. 그런데 헐~~코로나19로 인해서
휴관이란 안내 글이 유리창에 붙어있다. 이런 낭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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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돌아서려는 그 찰나 때마침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분이 안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오신다. 그저 반가움에
아~` 선생님 휴관이네요? 하고 묻자 네…….시 당국의 결정이라서.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유랑자는 아 그럼 혹
시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는데 내부 사진만 찍고 나오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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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대신사 존영 :1933년 고희동 화백이 그린 선생의 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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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울에서 이 기념관을 보려고 일부러 내려 왔는데 그냥 가기에는 넘 억울해 서리.. 하면서 설명을 하자, 난
감해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긁적 하시면서 서울이라 하시면서 조금 고민하시다가 승낙해 주신다. ㅎ얼마나
고마운지. 유랑자는 재빨리 내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유랑자는 인사말을 건네고 실내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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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천도교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기념관이다. 동학군의 전주성 입성을 기념하
며 천도교인들의 성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지어졌다."이 기념관은 1994년 말에 착공하여 1995년 5월 31일 준공
되었다. 동학과 천도교 관련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동학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현장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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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은 1894년 동학 지도자
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이 운동은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
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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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
(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 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
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 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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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손화중, 전봉준, 손병희 선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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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중 일부
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
대를 못마땅하게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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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 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
해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
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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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동학란, 동비의 난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
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
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 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 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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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던 1894년 나라 안팎으로 밀어닥친 위기 앞에서 자주와 개혁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반봉건 반 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분연히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 전주성 입성은 동학농민군이 거두었던 최대의 승
전이자 근대적인 폐정개혁을 단행한 농민군 자치기구 집강소 활동의 단초가 돼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리고 1894년 11월, 전남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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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엄청났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동학혁명 치고는 기념관 내부는 솔직히 좀
허술한 기념관 이었다. '동학혁명기념관'이라기에, 힘줄이 불거진 굵은 팔뚝의 동학군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
이는 역동적인 장면을 재현해 놓았으리라 잔뜩 기대 했었건만. 그런데 웬걸, 보이는 건 왠지 눈에 익어 보이는
동상 몇 점과 책자 등등 관련된 서적들로 전시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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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머무른 시간은 고작 30여분 남짓, 아주 짧은 시간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보고 싶었지만
휴관의 시간에 겨우 동의를 얻어 보았던 처지라 그리 오래 머물 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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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도 목판화(박홍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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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竹槍)
되자하네
죽창(竹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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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혁명을 꿈꾸었던 농민들은 관군 및 일본군과 치른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부분 죽었다. 아~니 차라리 몰
살에 가까웠다. 몸이 왜소해 녹두장군이라 불렸던 전봉준은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고, 최시형은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
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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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농민인 혁명군은 관군과 청군 왜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후에 조선사회 개혁
의 밑바탕이 됐고,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이어 졌으며,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
로 계승 발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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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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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은행로 34
(지번) 풍남동3가 76-1
영업시간 화~일 10:00 ~ 17:00
대표번호: 063-231-3219
홈:www.1894.or.kr/main_kor/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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