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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로마 16,3-9.16.22-27
복 음 : 루카 16,9ㄴ-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과로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에 빠졌거나
자존감이 낮은 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정신과 의사는 무언가를 돌 볼 것을 권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렇게 항의한다고 하네요.
“나를 돌볼 힘도 없는데 어떻게 무엇을 돌 볼 수 있겠어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한 돌봄의 노력이 자기를 돌 볼 힘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해야 남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를 돌보는 일은 나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남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역시 돌보지 못합니다.
남을 보기가 더 쉽도록 우리는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치료를 많이 사용합니다.
사회 심리학자 프랭크 리스먼도 ‘도움 치료’ 이론을 정립해서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자신도 치유된다는 이론을 발표했고, 학계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돌 볼 힘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돌 볼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돌봄이라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있어서 힘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돈을 다루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합니다.
그렇다면 그 수법과 재주를 하느님 나라를 얻는 데 쓴다면 얼마나 거룩한 일이겠습니까?
그 재주를 발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을 돕는 일입니다.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것을 남을 위해 쓴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바보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라고 하시면서,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남에게 이득을 주는 것 같지만,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얻는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불의한 재물을 잘 다룰 줄 모르면
하느님도 참된 것인 천상 재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십니다.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이 큰일에도 불의하다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름지기 올바른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까지 행한 사랑의 실천을 두고서 셈을 요구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을 하느님 뜻대로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 제자의 사명입니다.
사랑과 봉사로 살라는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돌봄이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어제 들었던 '약은 집사' 비유의 결론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어제 우리가 보았듯이 주인이 맡긴 재물은
관리인이 주제넘게도 자신만을 위해 쓸 때는 낭비이고 불의합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될 때,
즉 주인의 뜻에 맞게 사용되면 관리를 맡은 이에게는 어떤 기회가 주어질 수 있게 됩니다.
그 불의한 재물로 인해 도움을 받은 이들이 그 관리인을 친구로 여겨
그를 위해 전구하고 빌어주게 되면 그가 비록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며
그다지 많은 공로를 쌓지 못했더라도 영원한 거처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재물이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사용됨으로써 사람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물질주의, 황금만능 시대, 소비 과시,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 젖어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외면하고픈 불편한 진실일 겁니다.
재물이 주는 안정과 쾌락에 더해 종교적 보상까지 누리고 싶다면 번지수가 영 틀렸다는 뜻이니까요.
하느님은 재물을 허락하실 때 많이 받은 이나 적게 받은 이나
거리낌 없이 돕고 나누며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누구는 이런 게 더 많고 누구는 저런 게 더 많아야
서로를 보완하는 상호적 사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지 않은 재물, 즉 자신과 가족만의 안위와 사치를 위해 사용되는
불의한 재물은 하느님과 도무지 병립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손에 넣으려 한다면 하느님마저 재물 안에 끼워 넣으려는 자가당착일 뿐이지요.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은 사람에 대한 평가를 인격이나 심성, 선행이나 희생 등
그의 알맹이에 의거하기보다 재물을 기준으로 하는 듯 보입니다.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일들, 외모와 몸매를 가꾸고 치장과 명품으로 과시하는 이를
관리 잘 한다 치켜 올리며 닮고 싶어 하지요.
온통 껍데기에만 정신이 팔린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럽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혐오스럽다"는 강한 표현까지 쓰신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걸 누리면서 이기심과 탐욕을 벗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겠지요.
재물이 있다면 그 귀한 선물이 불의하게 썩어 악취를 풍기지 않도록
하느님 뜻에 맞게 선용해야 하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들 이름이 등장합니다.
"프리스카와 아퀼라, 에패네토스, 마리아,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 암플리아투스,
우르바노와 스타키스, 테르티우스, 가이오스, 에라스토스, 콰르투스..."
바오로 사도는 맨 땅에 헤딩하듯 불모지인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것 같습니다.
누구는 재산으로, 누구는 재능으로, 누구는 시간으로, 누구는 노동력으로,
누구는 자기 권력으로 사도의 소명에 힘을 보탰겠지요.
굳이 이 발음도 어려운 이름들을 옮겨 적어 지면을 할애한 이유는
우리에게 신앙이 전해지기까지 자신의 재물을 사심 없이 내놓았던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들의 나눔과 헌신을 통해 사도 바오로와 그들과 우리는
서로서로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일 영혼의 친구들로 엮이었습니다.
재물은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유혹과 근심을 끌어옵니다.
많건 적건 재물에 초연할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이 더 수월해지지요.
재물만 잘 사용하면 부유해도 행복할 수 있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집중하는 이에게는 가난도 부요도 축복이랍니다.
한 번 살다 가는 삶,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잘 사용하고 잘 되돌려드릴 수 있는 벗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저도 사도 바오로처럼, 저의 협력자가 되어주신
말씀사랑 벗님들을 한분한분 떠올리며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봉헌하겠습니다.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어제 복음의 불의한 집사는 주인에게 영리함을 칭찬받았다.
주인을 사기 친 그 집사가 칭찬을 들은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자기 소유가 될 것들,
즉 친구와 지지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소유가 아닌 것으로 자기 것이 아닌 것,
곧 가시덤불과 고통(창세 3,17-19)을 얻었다.
아담의 후예들인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없어질 것들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사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절)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선을 베풀 때 우리가 상대를 골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너그러워야 한다. 늘 문을 열어 두고 나그네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잘 활용하라고 하느님께서 대출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재물을 잘 사용하여 백 배, 즉 현재 대신 미래, 없어질 것 대신
영원한 것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필요한 사람이 쓸 수 있게끔 그것을 나누고, 장차 그들의 도움을 받기를 기대해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재물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더 큰 재물, 영원한 재물을 우리에게 맡기시겠는가?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몫을 내주겠느냐?”(12절)
여기서 ‘남의 것’이란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가리킨다.
우리는 재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알몸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라는 말씀대로이다.
우리는 그 재물에 대해 관리인에 불과하다.
땅의 재물로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하느님의 법에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을 따르는 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인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하느님과 함께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하셨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는 것은 주인은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재물이 그 사람을 노예로 옭아매고 있다.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재물에 대해 주인이 되는 삶이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맞게 재물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돈의 집착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의 연속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재물이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나의 것으로 여기면 나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경쟁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 것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도 사귀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특징은 돈을 좋아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경쟁하며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모순된 길을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우상 숭배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 좋아하는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종이 됩니다.
여물을 먹으면 밭을 갈아야 하는 소가 됩니다.
그래서 돈 좋아하며 주님을 섬긴다는 말은 우상숭배를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정한 우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까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변호사에게 80대 할머니가 이혼소송을 하러 왔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으면 바뀔까, 자녀가 결혼하면 바뀔까, 나이가 들면 바뀔까 기다렸더니
여든이 넘어서도 자신의 친구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에 이런 예도 있습니다.
여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를 신앙을 가지고 용서하였다고 합니다.
딸아이를 낳고 큰맘을 먹고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딸도 추행했다는 것입니다.
딸의 상처를 알고 딸의 용서를 받은 아버지이지만 손녀딸까지 추행한 것입니다.
정말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닌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합니다.
고치지 말고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고쳐집니다.
문제는 내 안의 주인 때문입니다.
행동을 이해시키고 변화시키려 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벼랑 끝, 상담』의 또 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한 어머니가 청년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청년은 쓰레기를 버리지도 못하고 샤워 물을 내리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변을 닦은 화장지도 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유치원 때부터 어머니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접대부와 외도를 한 사실을 알고는
보복하는 마음으로 줄곧 여러 남자를 만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보낼 나체사진을 딸에게 찍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딸을 데리고 다니며 그런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딸은 자신을 그런 공범자로 만드는 엄마도 싫었고
그런 것도 모르는 아빠도 바보처럼 여겨졌습니다.
딸이 그런 쓰레기조차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강박증이 생긴 것은
자신도 어머니와 공범이라는 죄의식입니다.
죄의식이 강하니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도 자신의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더러운 물을 내려 보내지 않기 위해 샤워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너진 윤리의식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사라지게 할 정도로 인정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 원장은 명상최면치료를 통해 어머니의 부정한 행위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먹물로 칠하여 불에 태워버리는 명상을 자주 시켰습니다.
점점 나쁜 기억들이 사라졌지만,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강박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명상을 시켰습니다.
양손에 나를 더럽다고 질책하던 자아와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두 자아를 쥐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더럽다고 하던 자아에게 잘 말해서
우주 밖으로 떠나버리라고 한 다음 오른손에 있는 자아를 가슴에 집어넣었습니다.
나의 주인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만약 가톨릭교회를 믿었다면 고해성사로 나를 질책하던 자아를 벗어던지고
성체성사로 그리스도를 참 주인으로 모셔
나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로 믿게 되면 다 해결될 일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없다면 더 나은 자아를 주인으로 넣어주어 믿게 만드는
명상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청년은 이전의 자아가 사라지고 죄책감 없는 새로운 자아가
자신의 가슴에서 주인이 되어 살게 된 것을 믿게 되어 강박증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바뀔 때는 내 안의 주인이 누구냐는 믿음이 바뀔 때입니다.
그전에는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
“저는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대답을 하거나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할 때
그 사람이 변했다고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주인이 누구냐는 믿음에 따라 욕구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늑대라고 믿으면 날고기를 좋아하겠지만
내가 사람이라 믿으면 요리가 된 것을 먹는 편을 좋아할 것입니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욕구입니다.
욕구가 바뀌어야 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는 내 안의 주인이 누구냐는 믿음에 따라 결정됩니다.
뉴스에서 보니 베트남 다낭의 한 청년이 14억 슈퍼카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12cm 돌연변이 난초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사람은 나중에 이 난초가
14억보다 더 높은 가격의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을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14억짜리 차를 별 볼 일 없는 물건처럼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믿고 사는 것의 가치를 안다면 나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내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 살 때, 그래서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을 때 나는 변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고쳐 쓰려 하십니다. 성체로 하나가 되었다고 믿게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돈 좋아하는 마음은 돈 안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꿔야만 사라집니다.
그 마음이 성체로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체를 영한 사람은 돈 안 좋아하는 마음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과 같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갑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자막을 타고 올라갑니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곧 사라지는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물론 주인공들의 이름은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오고,
영화가 시작되면서 얼굴을 보기 때문에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알기 어렵습니다.
스치듯 지나가며 영화에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영화 속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의 이름이 자막을 타고 흐르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영화가 완성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주기가 되는 노회찬 의원을 기억하며 ‘노회찬6411’이 다큐로 제작되어 방영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영화 제작을 위해 후원한 사람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후원자들의 아낌없는 후원이 없었다면 ‘노회찬6411’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안부 인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에패네토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애를 많이 쓴 마리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나의 동포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뛰어난 사도로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내가 사랑하는 스타키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 편지를 받아쓴 저 테르티우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나와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 도시의 재정관 에라스토스, 그리고 콰르투스 형제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안부를 전한 사람은 13명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보다 먼저 복음을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와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대신 써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집을 공동체를 위해서 내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직자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역할은 바오로 사도의 몫이었지만 그 복음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지만 그 뒤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습니다.
미사 전에 방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제를 도와주는 복사가 있습니다. 독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미사를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라!’
잠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 짧지만 좋은 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재물을 좀 더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의사가 처방전을 주면 약국에 가서 약을 사는 것도 빨리 합니다.
건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아플 때,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보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이 재미없고,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즉시 영혼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피정을 하거나,
사제에게 면담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를 묵상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일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영적인 건강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과거의 일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과거 나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오늘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오늘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구하라 찾을 것이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내일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찾아오는 많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