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수복
영웅을 기린다
일전 9월 28일은 서울 수복 71주년이었다. 6.25동란에서 승패의 분수령이 된 이 역사적인 날을 회고하면 당시 감격의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6.25의 가장 기념비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의 숨 가빴던 극적인 상황을 돌이켜보자. 9월 25일 밤, 서울 탈환의 막바지 전투가 개시됐다. 최종 공격목표는 중앙청과 서울시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양동작전을 펼친 국군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는 며칠 동안 서울 연희 고지전투 등 격렬한 전투로 병력 손실이 많은 상태에서 북괴군의 최후 발악적인 저항으로 26일 새벽까지 전선이 고착될 정도로 치열하였다.
북괴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서울 시민을 동원해 주요 도로 요충지에 200~300m 간격으로 전진을 방해하는 바리게이트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했고 북괴군 병사들은 빌딩의 지붕이나 창문마다 득실거렸다. 그들은 전진하는 유엔군 부대원들을 저격하거나 휘발유로 만든 사제 폭탄을 던지는 등 격렬히 저항했지만 전차로 바리케이트를 깔아뭉개면서 진격로를 열어 나갔다. 바리케이트 1개 돌파하는데 1시간 남짓 걸릴 정도로 느렸다.
26일 오후, 조선호텔까지 진출한 제2해병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중소대장들에게 작전계획을 설명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기자가 귀띔해주었다.
“중앙청은 미군 제5해병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 한다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말씀하셨고 상금 3천만 원이 걸려있다”고.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6중대 제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 허락을 상신했는데 이를 두고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허락을 받은 박 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하며 중앙청으로 접근했다. 세종로 일대에서 북괴군이 구축한 마대 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박 소위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 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했다. 우선, 중앙청에 잔류한 적을 제압한 후 2개 분대를 중앙동 입구에 배치하고 1개분대로 근접에서 방호하도록 운용하며 2m 길이 깃봉을 든 두 명의 대원을 데리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사다리는 폭격으로 인해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로프 일부를 사용해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당할 뻔했다. 천신만고 끝에 동쪽 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때가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서울이 북괴군에게 점령당한 지 꼭 3달 만에 중앙청에서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다시 태극기를 새벽 포연 속에서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어서 9월 28일 유엔군은 북괴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고 서울은 완전히 수복됐다. 이로써 3개월 동안 적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 시민들은 귀중한 자유를 다시 찾게 되었고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을 구한 전환점이 된 것이었다. 그러고 분단된 조국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결국 분단되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9.28서울수복의 개요다. 그런데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극적인 비화가 있다. 사실 중앙청은 해병대의 작전구역이 아니었지만 이를 어기면서까지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유엔사령부의 군령에 따라 한국 해병대의 진격로는 시청-을지로였고 중앙청은 미국 해병대가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즉, 미국의 작전구역이었던 중앙청은 정상적으로 작전이 진행될 경우 미군에 의해 탈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중앙청 점령을 외국군에게 양보할 수 없었던 국군 해병대는 반드시 대한민국 정부의 상징인 중앙청에 태극기는 우리 손으로 걸어야 한다는 결기로 무리한 작전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아직 진격하지 못한 중앙청은 여전히 북한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 소대원들은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중앙청에 진입하여 잔존 북괴군을 제압하면서 중앙청 돔에 기어올라 태극기 게양에 성공한 것이다. 박 소위는 연합군이 지정한 작전지역을 벗어나 한 마디로 ‘파울’을 저질렀던 셈이다. 미군의 작전지역에 침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추후 양국 간에 분쟁을 일으킬 소지도 있었고 박 소위도 군법회의 감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1961년 대령으로 예편한 박정모 소위는 금곡전투, 원산상륙, 화천댐 탈환, 도솔산전투 등에 활약한 공로로 을지, 화랑, 충무 무공훈장을 받았고 2010년에 84세에 고인이 되었다.
여기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패배시킨 분수령이 된 전투를 살펴보자. 1945년 2월, 일본 남쪽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산 정상에 미군 해병대원 6명이 거대한 성조기를 꽂았다. 미군이 6만1천명 해병대를 투입해 최대의 전략요충지 이오지마를 점령한 순간이다. 미군 6,800명, 일본군 2만 명이 전사한 혈전 끝에 거둔 값진 승리였다. 해병대원들이 깃발을 꽂는 사진은 곧바로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1945년 이오지마전투 기념우표에 이어 1995년 승전 50년 우표에도 등장했다. 아마 박 소위의 태극기 게양이 없었다면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종료시킨 아오지마 전투처럼 중앙청에 미국 성조기를 꽂고 마치 자신들의 전과를 온 만방에 자랑했을 것이 뻔하다.
2006년 9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가 태극기를 게양하자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대원들은 일제히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지. 사선을 넘은 소대원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어. 80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장면만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어. 당시 내 나이 스물넷이었소. 장가도 못 갔고 고향에도 못 가고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온 국민이 열망하는 것을 저버릴 수 없었지. 온 국민의 갈망대로 우리나라 심장부에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직접 꽂았다는 벅찬 감격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