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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나라 추천 0 조회 323 15.01.22 05: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첨성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대한민국국보
Cheomseongdae-1.jpg
지정번호 국보 제31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제작시기

신라시대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때에 세워진,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1]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구조[편집]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2]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3] 높이는 9.17미터[4]로 바탕의 지름은 5.17미터, 상층부의 지름은 2.5미터이다. 2미터에서 4미터의 고려조선시대의 현존 천문대보다 큰 규모이다.

 

2층의 기단이 있고, 대략 30센티미터 두께의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5]

보존상태[편집]

2005년 언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있다.[6]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또한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7]첨성대는 천문 관측을 위해 지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나, 수미산 또는 우주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 하늘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가설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8] 옛날에는 자연재해가 사람의 잘못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흉년이나 전염병도 사람들이 잘못해서 하늘에서 벌을 내리는 것 이라고생각했어요. 그리고 *일식; 만들어 자연현상을 관찰했어요 뜻(달이태양을가리는것이나달이태양의일부를가리는것을말함),달무리,이상한별이 나타나면 나라에 전쟁이나 흉년,돌림병 등의 재앙이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천문대를 만들어 자연현상을 관찰했어요.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은 첨성대도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였을 것이라고 추축하고있어요. 하지만 첨성대가 정확히 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건립 시점[편집]

첨성대에 관한 최초 기록인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 이후의 사서에서도 이에 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덕여왕대(632~647년)에 첨성대가 건립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9] 정확한 건립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 및 견해가 존재한다.[10]

  • 선덕여왕 2년(633)설:<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록은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 所築累石爲之"라고 했다. 당의 연호인 정관(貞觀) 7년은 계사(癸巳)년이며 633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준에 따르면 계사년은 선덕여왕 재위 2년(633)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선덕여왕 원년(633)에 해당한다.[11] <세종실록지리지>가 첨성대 건립연도를 이와 같이 설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조형물일 가능성이 높다.
  • 선덕여왕 초년설: 민영규(1981)[12]는 첨성대가 분황사(634), 영묘사(635), 황룡사구층목탑(645)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할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 건립시점을 선덕여왕 몰년(647)으로 보는데,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알천공, 김춘추, 김유신 등이 화려하게 선덕여왕을 보좌하고 있던 시절에 첨성대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첨성대 선덕여왕 초기 건립설"은 "첨성대 선덕여왕 말기건립 부정설"로 볼 수 있다.

 

  • 황룡사 구층목탑(645) 동시 건립설: 경주 첨성대는 직접적으로는 백제 천문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하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 축조 연대에는 많은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황룡사(皇龍寺) 9층탑 등이 건립된 시기이며, 그로부터 얼마 후인 675년에는 백제 천문학자들의 영향과 직접 지도 아래 일본에도 점성대(占星臺)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音)으로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천문대도 주비의 법(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였을 것이며,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첨성대가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唐)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再建)을 보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종석(2007)[13]은 "황룡사가 건립된 해에 축조된 첨성대도 이러한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첨성대 축조는 선덕여왕 646년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4년(645)에 착공되어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14] 그는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목적이 "대외적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보았으며, 첨성대의 건립목적이 "대내적으로 당시 종교적인 갈등과 혼란을 무마시키고 화합하려는 의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 선덕여왕 말기(645~647)설: 김기흥[15]은 "분황사와 영묘사 그리고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바 있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평생의 신앙과 소망을 엮어서 이 첨성대를 건축했던 것"으로 보았다. 즉, 첨성대 건립시점을 황룡사9층목탑 건립 이후로 본 것이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건립한 이유는 "첨성대를 통해 제석신이 이 땅에 강림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고대"했기 때문에 혹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에 "도리천으로 환생하기 위한 통로"로 세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기흥에 의하면 첨성대는 현실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우주 우물"이다.

 

  • 선덕여왕 몰년(647)설: 다수의 학자들은 첨성대 건립시기를 선덕여왕 몰년으로 보는데, 주로 <증보문헌비고>[16] 기록을 따랐다. 그런데 이보다 이전 기록인 <삼국사절요>에 비담의 반란 발생(647년 1월 7일), 첨성대의 건립,선덕여왕의 죽음(647년 1월 8일)이 차례대로 적혀 있다.[17]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 몰년에 건립되었다면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이는 곧 첨성대가 천문관측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통일이 이룩된 이후인 7세기 후반이다. 이는 <삼국사기> 新羅本紀, 文武王 14年, 孝昭王 元年, 聖德王 17年, 景德王 8年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문무왕 14년(674) 새로운 역법을 도입했고, 효소왕 원년(692)에는 당에서 천문도를 수입했고, 성덕왕 17년(718)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과 누각전을 설치했으며, 경덕왕 8년(749)에 .

 

 

옛날에는 문맹의 일반인들은 글을 봐도 읽을수도 없었고 읽어도 뜻도 알수가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자칭 학자와 종교인 들이었는데(종교라는 것은 없다),이들이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여 소설을 쓰고,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종교,문화,풍습이 되었고,이것이 잘 이해되지 못한것인줄 모르고, 21C 를 사는 오늘날까지 사실인줄 믿고,알고 살다 죽어 갑니다.우리 삶의 생활이 진실과 거짓이 혼재되어 있습니다.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이 깨닫고 눈을 뜨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옷을 입을때 첫 단추가 잘 못 되면 옷 모양이 잘 못 되듯이,지식이 잘못 입력 되면 모든게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경주의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선덕여왕 2년(633)설:<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기록은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 所築累石爲之"라고 했다. 당의 연호인 정관(貞觀) 7년은 계사(癸巳)년이며 633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준에 따르면 계사년은 선덕여왕 재위 2년(633)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선덕여왕 원년(633)에 해당한다.[11] <세종실록지리지>가 첨성대 건립연도를 이와 같이 설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원광(圓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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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圓光, 542년 ~ 640년[1])은 신라 진평왕 시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학자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중국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이름이 높았던 원광은 신라로 돌아 온 후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하였다.[2]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3]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2]

생애[편집]

원광의 생애에 대해서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간략히 나와 있다.[4]

제자백가(諸子百家) · 사서삼경(四書三經) ·춘추(春秋)》·사기(史記)》 등을 읽고 불경을 공부하여 진흥왕 27년(566년) 승려가 되었다.[2]

진지왕 3년(578년) 진(陳)에 건너가 《열반경》, 《성실론(成實論)》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2] 또한 원광은 수나라에 가서 여러 경전을 배웠다.[2] 589년에 수나라에 건너가 11년간 유학하면서 그는 소승 불교대승 불교 양쪽의 불경을 모두 공부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승려 담천(曇遷) · 혜원(慧遠) · 영유(靈裕) 등을 만나 《열반경(涅槃經)》·성실론(成實論)》·구사론(俱舍論)》·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3]

 

진평왕 22년(600년)에 신라로 돌아와 대승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했다.[2] 그는 자신의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복잡한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평범한 말들로 표현하였다. 귀산(貴山)등에게 화랑도 세속5계(世俗五戒)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3] 그 밖에 왕명을 받아 수나라에 보내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었고 황룡사 백고좌회에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하였다.[3]

 

원광은 대승불교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화랑도 및 근왕사상(勤王思想)[5]과 연결시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3]

 

사상[편집]

불교 학자로 한국 고대 불교를 연구한 고익진은 자신의 저서 《한국 고대불교 사상사》에서 원광의 사상은 다음 인용문에 나오는 것처럼 유식 계통의 섭론학이라고 하였다.[6]

원광의 이러한 수학 배경에서 그의 사상을 유식 계통의 섭론학이라고 하겠는데 그의 활동과 저술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광은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를 두어 항규로 삼았다는데, 이것은 종래의 무속적 점복행위를 《점찰선악업보경》의 점찰법에 의해 불교에 섭화코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점찰경》의 권하에는 심오한 대승교리가 설해져 있다. "대승에 향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실경계(一實境界)에 의지해서 신해(信解)를 닦아야 한다. 그 일실경계란 중생의 심체가 본래부터 불생불멸하고 자성청정하고 무장애한 것이다. 또 그 마음을 이르되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점찰경》 권하의 이러한 일실경계(여래장)는 섭론종에서 말하는 제9아마라식(amala-vijnana)과 동일한 것이다. 원광의 저술로는 다시 《여래장경사기》와 《대방등여래장경소》가 알려져 있는데, 《대방등여래장경》은 "일체중생은 여래장(tathagata-garbha)이요, 번뇌에 싸인 중생신(衆生身) 속에 여래신(如來身)이 있다"는 것을 아홉 가지 비유를 들어 쉽게 이해시켜 준다. 이 여래장 또한 섭론종제9식에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광은 섭론가라고 할 만한다. 그러나 그가 《섭대승론》의 복잡한 심식설을 설하지 않고, 통속적인 점찰법을 행하고, 또 교리 내용이 지극히 단순한 《여래장경》을 주석한 것은 당시의 신라 교학이 그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 오계[편집]

원광은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한 후 《여래장사(如來藏私記)》·《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를 찬술하는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3]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3] 그는 귀산(貴山)과 추항 두 청년에게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윤리강령(倫理綱領)을 가르쳐 당시 신라 청소년들이 지켜야 할 실생활의 윤리를 제시하였다.[3] 세속오계는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③ 교우유신(交友有信),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이 덕목들은 후에 화랑(花郞)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3] 세속오계 중 특히 살생에 대한 조항은 불교 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 윤리로 요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광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3]

 

 

 

http://blog.daum.net/kelim/9036156 경주 삼기산(三岐山) 원광 법사 부도.

http://blog.daum.net/gjkyemovie/11314136 원광 법사 설화.

 

 

안홍安弘

 

 

시대 고대/삼국
유형 인물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업 승려, 유학승
작품/저서 동도성립기
성별
분야

종교·철학/불교

 

 

생몰년 미상.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615년(진평왕 37)에 수나라로 유학가서 불법을 구하였다. 호승(胡僧) 비마라(毘摩羅) 등 3인과 함께 귀국하면서 『능가경(楞伽經)』·『승만경(勝?經)』 등의 경전과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왔다.

이때 처음 가지고 온 『능가경』·『승만경』 등은 뒷날 원효(元曉) 등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연구하는 데 기초가 된 경전들이다. 또한, 그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지었으며, 『삼국유사』에 황룡사구층탑에 관한 기사가 전하고 있다. 그는 해동의 명현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안함(安含)이라는 설도 있다.

 

 

양지良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대 고대/삼국
유형 인물
직업 고승
성별
분야 예술·체육/조각

 

 

생몰년 미상. 신라시대의 고승·조각가.

[개설]

그의 출신이나 가계는 알 수 없으나, 선덕여왕대(632∼646년)에서 문무왕대(661∼680년)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가 살던 절을 석장사(錫杖寺)라 한 것은 석장(錫杖 : 중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 끝에 포대를 달아 두면 지팡이가 스스로 단월(檀越 : 施主)의 집으로 날아가서 재 지낼 비용을 거두어 다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하여 얻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여러 가지 예술에 능통하여 신기에 가까운 기예는 비길 데가 없다고 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조각 작품은 주로 소조(塑造 : 진흙으로 만듦)에 능통하였다. 그가 만든 작품으로는 영묘사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 그리고 전탑(殿塔)의 기와를 비롯하여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상, 법림사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이 유명하다.

 

또한 그가 살던 석장사에는 벽돌로써 작은 탑을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을 새겨서 봉안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 현존하고 있는 석장사터는 최근 발굴 결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와 같은 삼천불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벽돌에 불상과 탑을 새긴 수많은 조각상이 확인됨으로써 양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활동 무대는 주로 경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절터에서 수습된 각종 조각 작품의 유형은 서역적 요소까지 보이고 있어 그의 예술 세계는 매우 깊고 광범위한 지역에까지 수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당시 신라 도성에 있어서 폭넓은 교화력을 지닌 고승으로 추앙되었다.

 

즉, 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는 성중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고 한다. 이때 그가 지어 부르게 한 노래는 <풍요 風謠>라 하여 ≪삼국유사≫에 전래된다. 이 <풍요>는 혼자 노동할 때 고됨을 덜기 위하여 부르는 노동요라고 하나, 불상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진흙의 분량을 생각하더라도 이를 노동요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래의 성격으로 보아 오히려 공덕가(功德歌)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는 스스로 선정(禪定)에 들어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떠오른 부처의 모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중의 남녀가 더욱 그를 따랐고, 또한 공덕을 닦기 위하여 모여든 것으로 짐작된다. 일연(一然)은 양지를 평하여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하나 대방(大方 : 문장이나 학술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하찮은 말기(末技 : 변변치 못한 기술이나 재주)에 자취를 감추고 지낸 자라고 하였다.

 

따라서 양지는 대방의 고덕(古德 : 덕이 높은 중)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기에 가려서 고승으로서보다는 한 사람의 장승(匠僧)으로서 더욱 알려졌다. 그러나 양지의 참모습은 잡예(雜藝)와 같은 말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덕이 충만한, 즉 성중의 남녀가 다투어 추종하였던 수행자로서의 높은 정신적 차원에 있다.

 

또한 고덕의 승려임과 동시에 재예(才藝)를 겸비한 뛰어난 장승이었다. 특히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 석장사지에서 수습된 <연기법송명탑상문전 緣起法頌銘塔像文塼>은 7세기 후반 인도의 남해 지역을 여행한 당나라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 南海寄歸內法傳>에도 기록된 바와 같은 인도에서의 건탑에 따른 법사리(法舍利) 장엄 법식을 바로 신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 작품을 양지의 것이라고 한다면, 양지는 그가 활동하던 시기인 7세기경에 이미 인도의 문화적 배경을 수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장사지에서 발굴된 소조 불상의 조각 양식이 인도 간다라 지방 불탑의 부조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석장사지 출토의 고행상(苦行像) 벽돌 조각 역시 서방적 불상 조각 양식으로 판단 된다.

 

따라서 양지는 젊은 시절 적어도 인도를 여행하였거나 아니면 그 지방의 문화적 배경에 매우 밝았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경주 사천왕사지의 사천왕소조상 또는 최근 수습된 석장사지의 조각상들은 그 조형 양식에 있어서 서역적 색채를 짙게 풍긴다.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고 자신에 넘친 조각 수법이었음을 감안할 때 바로 양지와 같은 명장의 솜씨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양지(良志)와 그의 작품론」(문명대, 『불교미술』 1, 동국대학교박물관, 1973)
  • 「풍요(風謠)의 일고찰」(황패강, 『신라문화』7, 1986)
  • 「석장사지(錫杖寺址) 출토유물과 석량지(釋良志)의 조각유풍」(장충식, 『신라문화』 3·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7)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원광(圓光)은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를 두어 항규로 삼았다는데,《점찰경》의 권하에는 심오한 대승교리가 설해져 있다.

 

점성대(占星臺)

 

占차지할 점 + 星 별 성 + 臺돈대 대

 

3.지키다.

6.보다. 자세히 살펴봄.

 

1. 별.

8. 밤. 저녁녘.

 

돈대:
평지보다 조금 높직하면서 두드러진 평평한 땅.

사방을 관망할 수 있게 흙을 높이 쌓아 위를 평평하게 한 곳.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자세히 살펴 조형물을 보라는 메세지를주고 있는 것입니다.

 

 

 

2층의 기단이 있고, 대략 30센티미터 두께의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5]

 

점성대占星臺는 우물井을 상징하고,물에서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밝게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이 계셨는데,그 당시 사람들이 말을 해줘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자신의 지식을 전해야 하는데 전할수 없으니,후세後世가 보고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살으라고,조형물로 수천년을 메세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젊어서 당신 삶 앞에 건강이라는 문제 해결 않하고,매일 딩가딩가 하고만 살다간 고통과 죽음은 예고없이 닥칩니다.

 

늙으면 누구도 孤老病死에서 벗어날수 없고 벗어나려면 건강할때 건강 챙기며 사십시요.

 

20세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고 세월가면 갈수록 당신 몸은 병들어 고통뿐이 없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

물에 앉는것을 실행하시면,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

하루에 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하며,매일 습관을 들이는것이 중요합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이것도 못해 먹겠다고요?

아픈것도 못 아프겠다고 해서 않 아플수 있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죽는것도 않 죽겠다고 하면 않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병든자(者),장애인분들은 현대의학의 가장 적합한 치료방법과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브리태니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和田]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洪以燮)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洪思俊)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첨성대가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박동현(朴同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스스로 눈을 뜨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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