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핀 꽃
조순희
곱게 물든 석양빛에 들판을 하얗게 물들이던 메밀꽃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그려진 고향의 그림이다.
오는가 기다려 보면 어느새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매년 오는 봄이련
만 올해는 그렇게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꽃을 바라보는 내 마음
이 지는 꽃잎이 왜 그리도 초라한지 지금의 내 모습 같다는 것을 어느날
길을 걸으며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이 빠지고 쇠잔해 가는 슬픔이 안
타까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잘못된 것도 모두다 포용하고 너그러워지고
싶은 여유마저 생겼다.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라고 누가말했던가. 가다가 길동무를 만나면 나
란히 걸어만 갈 일이지 마주보려 하지 말라고'.
보고 싶었던 고향 친구를 만나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며, 미루나무가 서
있는 신작로 길을 다리가 아프도록 걷고 싶다. 해가 지면 허름한 토담집
이라도 찾아가 파란 애호박에 풋고추와 정구지를 송송 썰어 넣고 만든 녹
두 빈대떡에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잔 들이키면 온 세상이 내것이 되리라.
들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를 들으며 정다운 친구와 등을 맞대
고 앉아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기나긴 밤도 짧기만 하겠지.
고향을 사랑하는 연정이 치마자락 흩날리듯 연분홍 빛깔로 시야를 물들
일 때쯤, 그리운 연민으로 다가오는 해맑은 소년의 미소를 지금도 잊지못
한다.
얼굴이 희고 몸은 약했지만 웃는 모습이 선해보였던 친구.
가끔 먼 산을 바라보노라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꽃모종을 서로 주고 받으며 우리는 채송화, 봉선화, 백
일홍을 마당 가득 심어놓고 여름 내내 꽃을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조금
씩 친숙해 지고 서로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코스모스길을 걸으며 미래를 꿈꾸었고 나무그늘 아래 앉아 그 가능성에
대하여 토론을 벌리곤 하였다. 가난하고 힘든 세월이었지만 우리의 꿈과
우정이 있는 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제 다시 그 시
절로 돌아갈 수 있으려는지 꽃이라면 씨앗을 받아 두었다가 다시 심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세월속의 주인공들이 아니던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밤.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 작은 기침을 하며 내가 왔음을 알렸다. 호롱불 빛 아래 책을 읽고
있는 친구의 가슴에 정성껏 만든 분홍색 꽃 한 송이를 달아주고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는지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 집
을 빠져 나왔다.
멀리서 불빛이 희미해져가는 지창문을 바라보며 그가 잘 되기를 무언으
로 빌었다.
고향의 여름밤은 아름다웠다. 칠흙같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메마
른 가슴에 서정을 심어주었고 꾀꼬리, 종달새 소리는 무한한 미래를 상상
하며 펼칠 수 있도록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
느해인가 그는 취직 시험을 보겠다며 아무런 말도 없이 고향을 떠났다.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내 머리속은 언제나 나침판
처럼 한곳만을 가리킨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마음은 늘 고향을 맴도는
것일까. 한 지붕아래 가족 같았던 그리움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그리고 35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끔씩 친정에 갈 때면 그가 살던
양지 바른 기와집 마당을 서성거려 본다.
그가 떠나던 마지막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새하얀 눈을 밟으며 백
설이란 제목으로 건네준 세 장의 편지 내용을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따뜻한 우정의 글이었다고 믿고 싶다. 동네 한가운데서 이 논배미, 저 논
배미를 쫓아다니며 눈싸움했던 마지막 학창시절은 내게 있어 오래도록 담
아온 친구의 향기였으며 가슴속에 핀 꽃이었다. 단 한 송이 꽃을 달아준
의미가 무엇이었길래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어 그를 잊지 못하고
봄이면 가슴앓이를 한단 말인가.
오늘같이 비가 오는날에는 그 친구를 만나서 흐르는 무심천 뚝길에 떨
어진 벚꽃이라도 밟으며 걷고싶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빨간 장미를
울타리 가득 심어 놓고 여고 시절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한아름 꺾어 그
에게 주고싶다.
얼마전 고향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성격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모
습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거침없이 나오는 부산 사투리마저도 정겹게 느
껴졌다. 대기업의 이사로 중견사원이 된 친구를 보며 그 동안 어떻게 살
아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세월 그도 나처럼 힘겹게 살았을까. 앞만 보고 달려온 30여년의 세
월이 지금은 흔적도 없건만 어느새 서로의 머리엔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
려 앉았다. 헤어지기 전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잡았던 손에서 느껴지던 그
마음을 굳이 무어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 일뿐.
맑은 산촌 개울물이 흐르는 산모롱이에 그때 보았던 무지개의 빛깔이
지금도 내 인생의 봄을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한다.
1999.
첫댓글 헤어지기 전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잡았던 손에서 느껴지던 그
마음을 굳이 무어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 일뿐.
맑은 산촌 개울물이 흐르는 산모롱이에 그때 보았던 무지개의 빛깔이
지금도 내 인생의 봄을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한다.
어느새 서로의 머리엔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려 앉았다. 헤어지기 전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잡았던 손에서 느껴지던 그 마음을 굳이 무어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 일뿐.
맑은 산촌 개울물이 흐르는 산모롱이에 그때 보았던 무지개의 빛깔이
지금도 내 인생의 봄을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