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주의 죽음
1949년 실시된 농지개혁법의 후유증은
평야지대일수록 심각하였다.
그리고 농지개혁법의 빈 틈을 이용하여 더 돈을 벌려고 작정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중에 한명이 이 소설 속의 정현동 같은 사람이다.
그는 원래 양조장과 논을 모두 팔고, 몰래 광주로 가려고 했지만,
아들 정하섭에게 돈을 대주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이주 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다시 머리를 굴린 것이 농지개혁법의 빈틈을 이용하여 돈을 불리는 것이었다.
농지개혁법으로 값이 떨어진 논을 구입하여 염전으로 용도변경을 하였다.
염전은 농지개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들인 논에 추수가 끝나자마자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그 논에서 농사를 지내던 소작농들의 분노를 사게 하였고,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한 소작농이 휘두른 낫에 정현동은 죽고 만다.
욕심의 끝이 결국 죽음으로 끝난 것이다.
정현동의 부인은 횡사한 남편의 넋을 달래 주기 위해 소화에게 부탁하여 씻김굿을 한다.
이를 알게된 이지숙은 소화에게 부탁을 하나 한다.
손대잡이, 즉 망자의 혼을 불러 가족에게 망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할 때
자신의 농지를 소작농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소화도 이지숙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였다.
당시만 해도 무속신앙의 믿음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정현동의 혼이 소화의 몸을 빌려 이야기한 것은
곧 정현동의 말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망자의 말을 들어주어야 망자가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
이지숙은 뿐만 아니라, 정현동 살인사건으로 체포된 소작농을 위해
다른 소작농들을 조정하여 변호사를 고용하여 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1. 복수
강동식.
그는 그의 아내 외서댁은 염상구에게 폭행을 당해 임신을 하고,
저수지에 자살하려다 간신히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염상구에게 복수를 기도하고 있었지만,
염상구의 형 염상진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염상진이 도당지부로 이동한 이후, 강동식은 사촌동생 강동기와 함께
염상구 집을 기습하였다.
염상구도 눈치채고 맞공격하여 강동식은 염상구의 총에 죽고,
염상구도 강동식에 쏜 총에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 따른 조치로 염상구는 치료 후 완치하였다.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지,
그는 외서댁으로 하여금 벌교를 떠나 독립할 수 있는 돈을 주었다.
2. 한국전쟁 전 사정
태백산맥을 따라 산속에서 좌익들의 활동이 점점 활기를 띠자,
남한 정부는 태백산맥에 소개령을 내렸다.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을 무조건 산에서 내려오라고 하였다.
집을 잃은 그들에게 특별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재모 또한 불합리한 명령이었지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
벌교에서는 좌익들이 점령하고 있는 율하면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이 소식을 접한 율하면의 좌익은,
도당 지도부로부터 후퇴 명령을 받고, 율하면에서 물러났다.
아무런 격전없이 백남식이 이끄는 계엄군은 율하면을 차지하였다.
그 이후 산속으로 흩어져 숨어지내는 좌익의 움직임은 조용하였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자, 1950년 2월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백남식도 계엄사령관이 아닌 주둔군지휘관이었고, 계엄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하였다.
백남식도 마지막 계엄군이 철수할 때 같이 철수하였다.
한편, 남한정부는 좌익들의 전향이나 자수시 책임과 죄를 묻지 않는다는 방침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더욱 종용하여 전국적으로 30만을 넘어섰다.
그리고 1950년에 들어서면서
남로당 최고급간부급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여파로 서울에서는 좌익에 의심가는 사람들이 체포되어갔는데,
여기에 이학송과 손승호가 포함되었다.
...
1950년 5월 30일에는 남한에서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집권당 대한국민당과 친일파의 후세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민당이
각종 불법을 자행하고 돈을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그들을 외면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국민당이 22석,
전신 한민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23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126석이 무소속의원이 차지한 것이다.
정당정치를 표방한 나라에서 무소속의 압승은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당시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민심이 발휘되기 전에 조그마한 한반도에서는 거센 폭풍이 일어났다.
3.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진 멸공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의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남한정부는 수많은 백성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하나뿐인 한강다리를 폭파시킨다.
그것은 인민군의 진로를 잠시 지연시킨 것에 불과했다.
그들의 남진은 계속되었고,
남한정부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계속 남하하였다.
한편, 유엔에서는 미국을 위시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의하였다.
벌교에도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금방 도착하였다.
계속된 퇴진 속에서 남한이 전라도를 버리고 경상도로 대피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한편, 남한정부는 퇴각하면서 보도연맹 사람들의 처리에 있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들을 모두 처형하는 것이었다.
벌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서장 권병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국가의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권병제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전명환 자애병원 원장을 몰래 빼돌리고,
나머지 수백명에 대한 처형을 감행하고, 벌교를 빠져나갔다.
당시 전국적으로 처형된 보도연맹사건은 부끄러운 우리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지숙은 보도연맹에 처형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받고,
소화, 하대치 가족들을 데리고 벌교를 먼저 도망갔다.
그야말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
서울에서는 인민군의 진입으로, 손승호, 이학송이 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좌익 활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게 된다.
한번 전향했던 손승호는 공산주의로 재전향이라고 할 수 있다.
4. 2007년 12월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짜증만 나게 했던 대선이 끝났다.
하지만, 짜증은 끝나지 않았다.
짜증은 이제 시작이다.
조정래 선생께서 모잡지와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이야기했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은 한 가지예요.
얼마나 깨끗하면서 양심적이고 도덕적인가 하는 거죠.
민주주의는 참모정치예요.
대통령은 혼자 나라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수많은 참모들과 협의해서 나라를 이끌어가잖아요.
결국 대통령 한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은 ‘올바른 국가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라고...
하지만, 우리 백성들은 조정래 선생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직도 대통령 한명 바뀐다고 온 나라가 바뀔 줄 알고 있다니...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답답하다.
책제목 : 태백산맥 6
지은이 : 조정래
펴낸곳 : 해냄
펴낸날 : 1995년 1월 15일 (2판본)
정가 : 6,800
독서기간: 2007.12.16 - 2007.12.18
페이지: 353 page